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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3

     [그 시각, 테르시안 제국 황제궁 정원.]

     “…바토리 에르제베트로부터의 정기 연락이 끊겼다.”

     솜누스 꽃이 수수하게 핀 정원의 가운데, 회색으로 칠해진 티테이블의 앞에 앉은 합스베르크 황제가 담담히 말했다.

     “아무래도 바토리는 내가 아닌 그레이를 선택한 모양이군.”

     “당연한 거 아니겠어?”

     황제의 맞은편.

     “한 나라의 황후를 상대로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계속 따를 수 있겠어. 안 그래?”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에르윈 황후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이죽거렸다.

     “내가 그녀였어도 당신이 아닌 그레이 지브롤터를 선택했을 거야. 유감이네. 그녀는 당신 오른팔 아니었어?”

     “유능한 존재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그 대상이 그레이라고 한다면 그건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지.”

     “…….”

     “조금은 씁쓸하기는 하지만.”

     황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에 가득 담긴 음료를 들이켰다.

     “그레이는 품는 길을 선택했나.”

     “…어쩌나. 그렇게 싫어하는 흡혈귀를 그레이가 품으려고 하는데.”

     “품는다기보다는, 나의 적으로서 활용하고자 하는 것뿐이지.”

     “어찌 됐든 지브롤터에 바토리가 붙었어. 당신, 지금 불리한 거 아니야?”

     “불리하다?”

     황제가 키득거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브롤터가 아니었으면 노스트럼은 이미 멸망했을 것이다.”

     “그 지브롤터가 지금 떡하니 협곡에 버티고 있는데?”

     “협곡에 버티고 있지.”

     “……뭘 생각하는 거야?”

     에르윈 황후가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생각을 하냐고? 나는 언제나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황제는 찻잔에 다시 음료를 채워 넣었다.

     어딘가 걸쭉한 붉은 액체와도 같았고, 그 안에는 마석을 갈아 넣은 것 같은 가루가 반짝이고 있었다.

     “가장 완벽한 제국을 물려주는 것.”

     “…노스트럼을 전부 지워버리겠다고 전쟁을 일으킨 게 통할 것 같아?”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

     황제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나를 이해했다면, 나는 이사벨라 따위가 아닌 너를 내 곁에 두었을 것이다.”

     “…….”

     “한때, 너는 내게 사랑을 속삭였지. 적어도 아버지께 감사한 점이 있다면, 인간 세상이 아닌 엘프의 손에서 자란 여인이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게 낳아주셨다는 점이야.”

     “언제적 이야기를….”

     “엘프의 손에서 자란 사람은 다르지 않을까. 다르더군. 다르긴 한데, 완벽하지는 않았어.”

     “…….”

     에르윈 황후가 쓰게 웃었다.

     황제와 황후라는 부부관계가 되었지만, 그들은 황궁에서도 같은 침실을 사용하지 않았다.

     “됐어.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지 않아?”

     “그래, 늦었지.”

     그저, 정치적인 부부관계.

     “너는 내게 있어, 가장 우수한 자식을 낳은 어머니였다. 그 덕분에 가장 강력한 반역을 저질렀음에도, 이렇게 내 앞에서 살아있는 채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지.”

     “허이구, 그러셨어요?”

     “황후로서 역할을 다해준 건 고맙다.”

     황제에게는 다른 여인들이 감히 황후 자리를 노리지 못하게 할 방파제가 필요했고, 황후에게는 황녀를 지키기 위한 권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여기까지다.”

     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지금까지는 둘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아스타시아는 그레이의 옆에 있고, 너는 제국에 남는 길을 선택했다. 도망치지 않고, 여기에 남았지. 내가 너를 살려줄 거라고 생각해서 남은 건가?”

     전쟁만 아니었다면.

     “그레이 지브롤터가 그런 말을 해줬다고 해서, 정말로 너를 살려둘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죽으면 죽는 거지.”

     에르윈 황후는 다리를 꼬며 여유롭게 웃었다.

     “죽으면 엘프들 또한 전쟁에 참여하게 될 거고.”

     “…….”

     “인질이잖아. 안 그래? 어머니를 비롯한 하이엘프들이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만들 억제기. 내가 죽는다면 그건 지브롤터가 전쟁에서 패배하고 난 뒤가 되겠지.”

     “역시, 너는 우수해.”

     황제가 잔을 집어 든다.

     “네게서 그레이 지브롤터가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미친 소리라. 항상 듣는 말이지만, 오늘은 더더욱 마음이 쓰라리군.”

     “…….”

     에르윈 황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녀의 차이일까, 아니면 순수한 인간과 하프엘프의 차이일까.

     “당신, 왜 그렇게 그레이에게 집착하는 거야?”

     “집착이라.”

     “핏줄도 아니고, 같은 나라 사람도 아니고, 나이대가 비슷한 것도 아니야. 도대체 왜?”

     “나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황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 전쟁이 일어난 배경, 원인, 그리고 나의 목적까지도 그레이는 전부 이해하고 있을지도 몰라.”

     “…….”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고? 아니, 말해봤자 너는 이해하지 못해.”

     황제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황제가 작게 중얼거린 순간.

     “……미쳤어?”

     

     에르윈 황후는 황제의 말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그건….”

     “간단한 이치야.”

     황제가 찻잔에 담긴 핏빛의 음료를 전부 들이켰다.

     

     “나를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게 완성시켜줄 수 있는 건 오직 그레이 지브롤터뿐이지.”

     “…….”

     “네게도 나쁜 조건은 아닐 텐데. 너는 그저 이곳에서 인질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히 말해둘게.”

     에르윈 황후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왜 단 한 번도,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주고자 하지 않았지?”

     “…….”

     “이기적인 말이지만,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아스타시아만큼은 달랐잖아. 당신이 가장 원하던 걸 이루어냈잖아.”

     “그래. 그렇기에, 지금 아스타시아는 특혜를 누리고 있는 거지.”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부모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남자를 택한 제국의 배신자.”

     “…….”

     “그렇게 역사에 남게 될 것이야.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아스타시아에게 베풀 만큼 베풀었어.”

     “그게 정녕, 아버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

     “아버지의 역할이라. 흠, 글쎄.”

     황제는 어깨를 으쓱이며 정원 밖을 향했다.

     “아이페리아 인더스트리의 모든 자금은 동결한다. 사업체는 유지되겠지만, 모든 군수물자는 징발하겠어.”

     “…직원들 목숨값이라고 생각할게. 마음껏 가져가.”

     “고맙군.”

     “…당신.”

     에르윈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라. 내 일생에 있어 후회가 있다면.”

     합스베르크 황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 손을 흔들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와의 사이에서 그레이를 낳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정원을 떠났다.

     “…뭐야, 그게.”

     에르윈 황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어.”

     부우웅.

     황궁의 아래.

     거대한 비행선들이 하나둘 지상에서 떠오르기 시작했고, 에르윈 황후는 비행선을 망연히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 * *

     “그레이 도련님. 세이레네 백작성 수색이 끝났습니다.”

     “이상은?”

     “숨어있던 제국군 흡혈귀가 일곱 정도 있었습니다. 무사히 격퇴했습니다.”

     “고생했네.”

     카를로스 경을 위시한 기사들은 세이레네 백작성을 정리했다.

     아직 주택 지하실이라거나, 하수구라거나, 백작성에서 해협으로 통하는 비밀통로라거나 그런 곳에 적들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곳은 전부 확인했으니, 나머지는 이제 아침햇살을 맞이하는 것뿐.

     “도련님. 저것이….”

     “흡혈귀의 말로지.”

     어둠이 완벽하게 걷히고 아침햇살이 세이레네의 해협 너머를 비추기 시작하는 때.

     푸쉬이이이ㅡㅡㅡㅡ

     흡혈귀들이 재가 되어 사라진다.

     햇빛이 닿은 부분부터 황금빛 불에 불타오르더니, 곧 순식간에 아래에 잿가루만 남기며 바스러진다.

     “흡혈귀 뼛가루는 좋은 소재야. 자네가 종종 복용하는 캐롤라인이나 제국군 병사들이 사용하던 백은도 전부 원료에 흡혈귀 뼛가루가 들어가지.”

     “저 캐롤라인 안 씁니다.”

     “그런가? 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게. 흡혈귀 뼛가루를 그냥 넣는 게 아니라, 원료 중 하나일 뿐이니까.”

     독초도 잘 이용하면 약으로 쓰이는 법.

     잘 중화하여 이용하기만 한다면, 인간의 삶에 너무나도 큰 도움이 되는 물건일 뿐이다.

     “앞으로는 수급하기 눈치 보이겠지만.”

     “…….”

     “흡혈귀는 지브롤터의 적이었어. 그렇기에 적의 유해든 뭐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지. 하지만-”

     “아, 써도 상관없는데?”

     바토리 소장의 눈치를 보고 말했는데, 정작 바토리 소장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나도 연구용 재료로 쓰고는 하는데 뭐 어때?”

     “…….”

     “죽은 이를 그런 식으로 쓴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걸릴 수도 있겠지만, 모르게 하면 그만 아니야?”

     “뭐, 그렇긴 하죠.”

     새삼스럽지만, 백은과 캐롤라인의 원재료를 아는 이들은 거ㅡ의 없다.

     “그러면 내키는 대로 쓰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화르륵.

     거리 곳곳에 던져진 흡혈귀 병사들의 몸이 불타오른다.

     “예전부터 저걸 신세를 지기는 했지만, 시신 정리하기 정말 편리하군.”

     “그러게. 아, 도련님. 저거 어디에 쓸 거야? 혹시 용도 생각해 둔 곳 있어?”

     “잘 모아다가 뭉친 다음, 마도 엔진에 쓸 연료로 써야죠.”

     흡혈귀 뼛가루에는 미량의 마나가 깃들어 있다.

     그다지 많은 양은 아니지만, 적어도 마나를 담아둔 마석이 떨어졌을 때 급하게 쓸 수 있는 정도로는 충분하다.

     “그래? 그러면 앞으로 더 바쁘겠네.”

     바토리 소장이 하늘을 가리켰다.

     “세이레네 백작령 말고도 흡혈귀들이 넘쳐날 테니까.”

     “…….”

     나는 바토리 소장의 말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

     “바토리 소장.”

     “응, 도련님.”

     “황제 폐하 말입니다. 조금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내 옆,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잠든 아스타시아를 가리켰다.

     “휴식을 취할 시간도 안 주고, 그렇게 연달아 전투를 일으키려고 하다니.”

     “선전포고야 구시대의 국제법을 따른 거라고 치더라도, 이건 전쟁이잖아? 심지어 노스트럼을 전부 섬멸하고자 하는 전쟁. 전쟁인데 편의 봐주고 그런 게 어디 있겠어.”

     “…….”

     “황제의 의도, 도련님은 알고 있잖아. 나도 알고 있고.”

     “예. 그래서 여기로 오신 거 아닙니까.”

     “저기….”

     카를로스 경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도 이해할 수 있게, 최대한 간단하고 쉽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어머, 어디까지 낮춰야 하는 거야?”

     “카를로스 경은 아카데미 학생이 아닙니다, 소장.”

     

     나는 카를로스 경에게 하늘을 가리켰다.

     “카를로스 경. 하늘을 날아온다면, 제국의 침공 경로는 어떻게 되겠나?”

     “어, 그야….”

     카를로스 경이 손가락을 전부 폈다가 접으려고 하더니.

     “……제한이, 없네요?”

     그대로 표정이 창백하게 굳었다.

     “그래. 하늘로 날아오면 끝이지.”

     비행선의 풍석 출력을 최대한으로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마석만 있다면, 제국 끝에서 왕국 끝으로 편도로 날아가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아직 보고는 안 들어왔지만, 곧 보고가 들어올 거야. 그 시작은 분명 북쪽이겠지.”

     알고는 있지만.

     예상은 하고 있지만.

     “파발이 늦게 도착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저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쯧.”

     북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펄럭이며, 우리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모르가니아의 용기병…!”

     “창문 열어두게. 착지할 수 있도록.”

     내 지시에 카를로스 경이 창문을 열자마자, 곧 용기병이 우리 쪽으로 내려오며 바로 착지했다.

     “급보입니다!”

     “롤랜드 후작령에 제국군이 쳐들어왔나?”

     “……어떻게?”

     “뻔하지.”

     나는 아스타시아를 토닥였다.

     “그리고.”

     “예?”

     “그리고 또.”

     “저기, 일단은 그게….”

     “쯧.”

     노스트럼 기준으로는 가장 빠르겠지만, 답답할 따름이다.

     “잘 듣게, 경.”

     나는 손가락을 다섯 개 펼쳤다.

     “지브롤터, 세이레네.”

     그리고 두 개를 접었다.

     “나머지 셋.”

     설원지대. 마수 오염지대. 엘프의숲.

     “뿐만이 아니지.”

     남부 해협을 빙 둘러 가면서 바다 위를 날아가는 것도 가능하며, 300m 이상 고도를 높여 협곡 위를 그대로 넘어오는 것도 가능하다.

     “나라면 그렇게 할 거야. 모든 방면으로 병력을 보내, 지브롤터의 발을 묶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작정했다면.

     “노스트럼의 땅을 우회하여, 왕도 톨레도를 친다.”

     “…….”

     방 안의 온도가 내려가는 듯한 착각은 무엇일까.

     “뭐, 왜.”

     이상하다.

     “못할 게 뭐가 있겠나.”

     약 30분 뒤.

     지브롤터 성에서 정보가 들어왔다.

     -노스트럼 대륙 전체에, 제국군 출현.

     협곡과 영지를 막아낸 지브롤터와 이미 습격당해 쑥대밭이 된 세이레네를 제외한 노스트럼 전역에 제국의 군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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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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