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24

       어린 시절 보았던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많이 봤던 장면을 꼽아보라면, 단연코 이 문구였을 것이다.

        

       ‘다음 이 시간에’

        

       일본에선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가 어린 시절 봤던 애니메이션은 방송국이 광고를 1초라도 더 넣기 위해서 앞뒤를 잘라먹는 일이 자주 있었다. 본편을 잘라먹는 일은 아니었지만, 주로 애니메이션 오프닝이나 엔딩이 그 희생양이 되었다.

        

       오프닝에서 제목이 나오는 부분만 짧게 편집되어 나온 뒤 바로 애니메이션이 시작하고, 끝날 때도 엔딩같은 것 없이 광고 후 ‘다음 이 시간에’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문구를 보면 안심이 되었다.

        

       다음 이 시간에라는 말은 말 그대로다. ‘다음 이 시간에’도 똑같이 여기서 이 애니메이션을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오프닝과 엔딩을 다 떼어버린 애니메이션을 TV 앞에서 보다가, 이번 화가 끝나는 것을 보고 아쉬움을 느끼고, ‘다음 이 시간에’라는 말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다음 이 시간’을 기다리면서 두근거리며 다음 주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끝은 있다.

        

       아무리 긴 애니메이션이라도 마지막 화는 반드시 다가온다. 설령 기승전결이 없는 단편이 모여있는 애니메이션이라도 마찬가지다.

        

       1년에 준비되어있는 에피소드가 끝나면, 그 끝에는 ‘다음 이 시간에’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오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볼 때마다 마음에 먹먹함을 느꼈다.

        

       마치, 이 문구가 지나간 다음에는 뭔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참 이상하지.

        

       애니메이션 속도 아닌데,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그런 것이었다.

        

       “허탈하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왠지 루카스의 말에 지기 싫어서 그렇게 대답했다.

        

       왠지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루카스를 찾아왔다.

        

       루카스뿐만이 아니다. 이전에는 벨라, 제이든, 데미안까지 만났다. 황제는 아직 만나지 않았지만.

        

       의외로 그 세 사람 다 나에게는 별다른 원한이 없는 것 같았다. 데미안이야 원래 딱딱한 인간이라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지만, 벨라는 다소 나른한 표정으로, 제이든은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마주 앉아 시시껄렁한 대화를 하는 와중에는 이 두 사람이 정말로 갇혀있는 게 맞나 싶었을 정도다.

        

       내가 루카스와 황제를 만나는 순서를 가장 마지막으로 정한 것은 의도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을 보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인생이 가장 많이 바뀐 사람을 꼽으라면 그 두 사람이니까. 부정적인 의미로 말이다.

        

       “가면을 벗기로 한 모양이다?”

        

       루카스는 우리 둘 사이에 있는 탁자 위에 발을 올려두고, 의자 앞다리 두 개를 띄우고 뒤의 두 다리만을 세운 채 엄청나게 불량한 자세로 그렇게 말했다. 손을 깍지 껴 뒤통수에 둔 것이 여러 가지 의미로 그림 같았다.

        

       “이제는 필요가 없으니까?”

        

       “진짜로? 주변에서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런 게 아니고?”

        

       “아니야.”

        

       나는 딱 잘라 말했다.

        

       “하긴, 네가 여기 올 이유도 없는데 온 걸 보면 딱히 남이 시켜서 그런 건 아니겠지. 생각해보면 넌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으니까.”

        

       “그쪽도 전부 다 기억난 모양이네.”

        

       “그렇지.”

        

       루카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왜, 내가 반칙이라도 쓴 것처럼 굴 때는 언제고.”

        

       내 말에, 루카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루카스는, 이내 그딴 게 다 무슨 상관이냐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

        

       “야.”

        

       “왜?”

        

       “미안했다.”

        

       “…….”

        

       앞뒤 다 잘라먹은 것이 꼭 광고 끼워 넣겠다고 애니메이션 오프닝 엔딩 잘라먹는 지상파 방송국 같네.

        

       “뭐가 미안한데?”

        

       내가 대놓고 말을 놓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는 루카스에게 어이없다는 듯 물어보자, 루카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내가 원망스럽지 않냐?”

        

       “뭐 하러?”

        

       “너를 몇 번이나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까.”

        

       “…….”

        

       아, 그런가.

        

       나는 루카스가 ‘내가 루카스를 이겼던 것’을 기억할 줄 알았는데, 잘 생각해보면 그런 기억만 떠오른 것도 아닐 것이다.

        

       아마 나를 벤 기억이 훨씬 더 많겠지.

        

       “진짜로 전부 기억난 모양이네.”

        

       내가 시간을 돌린다는 것을 알기 전, 루카스는 나를 그렇게 싫어하지만은 않았다. 사실 나를 습격해서 칼을 휘두르던 것도 루카스 딴에는 정말로 베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반쯤 장난으로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발두르라고 했던가. 북유럽 신화에서 무적의 몸을 가지고 있어서 신들이 발두르에게 이것저것 던지며 놀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딱 그것이었다. 루카스는 내가 죽지 않고 그 검을 모두 피할 거라고 생각하고 검을 휘둘렀다.

        

       실제로, 루카스가 마음만 먹었다면 당시 어린아이였던 나는 그대로 목이 떨어지거나 반토막이 났을 거다. 나를 나름대로 재미있는 상대라고 생각하던 루카스가 진심으로 날 죽이겠다고 검을 휘두르지는 않았고, 그래서 나는 보통 피를 철철 흘리며 검이 몸에 박히거나, 팔이나 다리가 떨어지거나, 허리가 반쯤 잘리거나 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루카스는 그때마다 패닉에 빠졌다. 그래, ‘그’ 루카스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손이 덜덜 떨리고, 몸이 굳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

        

       ‘나, 나는 그러려고 그런 게—’ 

        

       그 상황에서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은 그 말이었다.

        

       황제의 아이들은 당시에 서로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유대감은 있었다. 비록 서로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는 아니더라도 가끔 마주칠 때 안부 정도는 묻는 사이였다.

        

       그리고 루카스는 나를 정말로 여동생으로 여기기라도 했는지, 비교적 자주 마주치는 나를 볼 때마다 그런 장난을 걸어온 것이다.

        

       장난으로 여동생을 밀쳤더니 그대로 목이 꺾여 죽어버린다면 오빠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언제나 결과만을 기억하던 루카스였으니, 그 중간과정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던 거지.

        

       “그…… 많이 아팠냐?”

        

       “어땠을 거라고 생각해?”

        

       내 질문에 루카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루카스의 그런 반응 하나하나가 꽤 신선했다. 사실 내가 알고 있는 루카스는 자기 여동생에게 검을 휘두르고, 내가 시간을 되돌려 자길 이겼다고 생각해 반칙이라고 판단하고, 그래서 나를 죽여버리겠다고 생각한, 좀 너무 위험하게 단순한 인간이었으니까.

        

       서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

        

       “나는 몇 번이나 베였는지 기억도 못 해. 나를 만날 때마다 그랬으니까. 그리고 피할 때도 그랬지. 한 번 베인 다음 바로 피할 수 있으면 운이 좋은 거고,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시간을 돌리며 시도해야 했으니까.”

        

       “……알고 있어.”

        

       루카스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때 그 영감이 그랬는데. 네가 시간을 몇 번이나 돌리며 시도하던 것을 무시하지 말라고.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 생각이 짧아도 엄청나게 짧았더라고.”

        

       “…….”

        

       나는 한참 동안 루카스를 뚫어져라 보다가 말했다.

        

       “너, 루카스 맞아?”

        

       “맞거든. 나라도 그런 거대한 사건을 겪으면 배우는 게 있다고.”

        

       “허.”

        

       이걸 칭찬을 해줘야 해 말아야 해?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뭐, 어차피 지금 와서는 다 없는 일이나 다름없고, 나도 너를 한 번 죽여본 적이 있으니 그걸로 만족할게.”

        

       “엉?”

        

       “응?”

        

       내 말에 루카스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날 죽인 적이 있다고?”

        

       “그런데?”

        

       “네가?”

        

       “그렇지.”

        

       “어떻게? 시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일부러 암살이라도 해봤다는 거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는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냥 돌아서면서 경고 사격용으로 쏜 탄이 너무 정확하게 나가서 네 이마를 관통한 적이 있었거든.”

        

       “…….”

        

       내 말에 루카스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내가 죽은 적이 있다고?”

        

       “죽었던 때의 기억은 자세하게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네. 다행이다.”

        

       “아니, 야, 다행이라니?”

        

       적어도 그 환상 속의 세상에서 전장에 나가 죽은 사람들이 평생 한 번 죽었다는 PTSD에 시달릴 일은 없으니 다행이었다.

        

       “……뭐, 됐어.”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내가 더 대답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루카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그냥 네 말대로 다 없었던 걸로 하자.”

        

       “내 쪽이 더 억울하긴 하지만.”

        

       “……그래, 네 쪽이 더 억울하긴 하지만.”

        

       내가 덧붙인 말에,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성은 잘 지내고?”

        

       “지나치게 잘 지내서 탈이지.”

        

       “검성 늙어 죽기 전에 나 좀 내보내 주어라. 그래도 누가 이겼는지는 제대로 결판을 내야지.”

        

       “죽여버릴까 봐 안되겠는데.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이유는 네가 전 황제와 저지른 일 때문이잖아.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야. 황태녀한테 탄원서라도 써주던가.”

        

       내 말에, 루카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미안하니 뭐니 해도, 사람은 역시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뭐, 나도 솔직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앙금이 완전히 풀어진 건 아니고,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기로 할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