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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4

       마왕은 파스모를 든 채로 고개를 젖혔다. 경추와의 각도가 둔각에 이르렀을 때, 죽은 파스모의 두부가 천천히 사라졌다.

       

       뒤이어 끌려가는 것은 몸통이었다. 마왕은 쌈을 먹는 것처럼 파스모를 집어삼켰다. 몸통과 함께 견갑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 다음은 기다란 팔이었다. 손, 하반신, 이젠 다리도 안 보인다. 그만한 거체를 전부 먹어치웠다.

       

       마왕이 배신자를 숙청하는 모습은 대개 저러했다.

       

       “씨, 씨발.”

       

       간신히 잊었다고 생각했다. 실은 아니었다. 1천년 전, 에테르라는 소녀의 머릿속에도 저 그림이 남아있다. 동료가 동료를 잡아먹는 광경 말이다.

       

       금안이 금안을 먹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먹는 것과 진배없다. 명백한 식인이었다. 마왕은 저 짓을 수백 년이나 반복해 왔다. 그런데도 프리온 질병에 걸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로, 사람인가?

       

       장담하건대 사람이 아니다.

       

       저건 괴물이다. 반드시 토벌해야 할 괴물.

       

       그렇다고는 해도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마왕이 파스모를 흡수함으로써 전력이 뒤집혔다. 우리가 전부 덤빈다고 해도 재래식 전력으로는 마왕을 상대할 수 없게 되었다.

       

       나와 버멜은 스태프를 쥐고 물러섰다.

       

       “모두 뛰어!”

       

       노움의 말에 따라 포탈로 달렸다.

       

       “늦었도다. 어리석은 것들아.”

       

       후욱, 하고 땅 밑이 꺼진다.

       

       그 위로 검은 그림자의 창이 돋아났다. 파스모의 기술이다. 하지만 더욱 세련됐다. 복잡함 또한 궤를 달리한다.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마라.”

       

       그림자 창의 대부분이 내게로 쇄도했다.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서 피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사각지대가 없었다.

       

       카앙!

       

       하는 수 없이 스태프를 방패로 삼았다. 캘리퍼스의 날 끝에 무수한 창이 꽂힌다.

       

       “큭…!”

       

       힘을 분산해서 겨우 버텨냈다. 그래도 끝이 아니었다. 마왕은 계속해서 이쪽으로 암기를 날려보냈다.

       

       몸을 과도하게 움직인 탓인지 갈비뼈가 쓰라렸다. 위가 경련하고,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머리도 어지러웠다.

       

       “에테르!”

       

       버멜이 손을 내밀었다. 불과 3미터 거리. 나는 정신을 잃어버리기 전에 녀석을 붙잡았다.

       

       “우욱.”

       

       세상이 빙글, 하고 반 바퀴 돌았다.

       

       스태프를 집어넣은 버멜이 나를 안았다. 왼손으로 목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오금을 잡은 모양새였다. 뭔가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불평불만을 가질 시간은 없었다.

       

       버멜은 나를 든 채로 부리나케 뛰었다. 이제 마왕의 표적은 버멜이었다.

       

       촤아악!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기질이 바뀌었다.

       

       “여기부터 정령계네. 이보게 소년, 이대로 심부까지 뛸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거기, 전 상천 아가씨는 컨디션 괜찮고?”

       “아뇨.”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정령계라니. 심지어 심부까지 가야 한다고?

       

       이거, 100퍼센트 죽겠구나 싶었다.

       

       “이런! 놈이 오는군!”

       

       뒤를 돌아보니 마왕이 지척까지 와 있었다.

       

       그런데 마왕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정령계에 온 탓에 컨디션이 나빠진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마왕은 평소대로의 마왕이었다. 자줏빛 로브를 두르고, 군데군데 촉수가 뻗어 있는 괴물 형상의 남자.

       

       마법을 난사하며 오던 마왕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럼에도 시선은 나에게로 고정한 채였다.

       

       “상천.”

       

       놈이 나를 부른다.

       

       “기회를 주겠다.”

       

       협상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

       

       

       상천은 다른 사천과는 다르다.

       

       나머지 세 사천은 처음부터 강했다. 민천은 고룡이었고, 호천은 치유력을 타고났다. 창천은 계략과 군단 통솔에 특화되었다.

       

       셋 모두 ‘전투’에 어울리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패업을 이루려면 그들처럼 전투에 빼어난 금안족이 많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에테르는 영 아니었다.

       

       열심히 가르치면 중간은 갈 수 있다. 상급 정령이라면 어찌어찌 상대할 실력이다. 하지만 정령왕과 맞붙기에는 한참이고 모자랐다.

       

       본래 마왕의 계획은 각 사천이 한 명씩 정령왕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사천이 정령왕과 대적하는 동안 자신은 여신을 상대할 요량이었다. 처음에 그랬었던 계획은 수백 번의 수정을 거쳐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모든 사천을 잘 기르고, 흡수해서, 자신이 여신을 뛰어넘는 것.

       

       계획대로라면 사천 중 가장 먼저 먹어야 하는 것은 상천이다. 

       

       에테르는 약하지만, 학문을 타고났다. 그것은 또 다른 강함이었다.

       

       ‘상천을 먹어 치운다면, 대업을 완성할 수 있다.’

       

       흑주(黑晝).

       

       마왕은 상천의 지식을, 흑주를 원했다.

       

       호천이나 되는 거물을 한 번에 보내버리는 위력. 그로도 모자라, 하늘을 2주 동안 검게 물들였던 파괴력.

       

       그것은 지식이라는 존재가 낳은 산물이다. 아는 것은 곧 힘이었다. 에테르의 진가는 무력이 아닌 지력에 있었다.

       

       “상천.”

       

       그랬기에 공격을 멈추었다.

       

       “기회를 주겠다.”

       

       마왕은 모든 촉수를 거둬들였다. 양손은 허리 뒤로 뻗어 뒷짐을 졌다. 로브를 정돈하고 매무새를 다듬었다.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지금이라도 짐의 곁으로 오라.”

       “뭐?”

       

       예상대로 에테르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뭐라는 거야.”

       “말 그대로다, 상천. 지금 마왕군으로 복귀하면 배반한 죄를 묻지 않겠다. 호천을 죽인 죄, 해룡을 벌한 죄까지 합쳐서 모조리.”

       

       겉으로 보기에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동시에 자애로운 군주처럼 보이도록 하는 제안이었다.

       

       “거기, 미개한 엘프들과 함께 있어 봤자 네 가치만 휴손할 뿐이다. 시간 낭비에 체력 낭비다.”

       

       어디 그뿐인가?

       

       “그대들이 힘을 전부 합쳐 맞서더라도 짐을 이길 수는 없다. 그걸 알았으니 이리로 도망쳐 온 것이겠지. 짐의 말이 틀렸느냐?”

       “……허어.”

       “순순히 항복하라.”

       

       마왕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뿐이었다.

       

       물론 상천만. 나머지는 전부 죽일 것이다.

       

       “아렌스 대륙을 제패할 무렵에는 내 상천에게 포상을 내릴 것이다.”

       “…지랄하지 마시죠. 제 마법을 노리는 거잖아요?”

       “허허, 지랄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군. 엘프와 같이 살더니 사용하는 단어도 걸쭉하게 변해버린 건가?”

       “알 거 없고.”

       

       천 년이면 강산이 수백 번은 바뀐다. 사람 성격이 바뀌었다고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아쉬울 뿐이다.

       

       “그래서, 짐의 제안은?”

       “유감이네요.”

       

       에테르는 버멜의 품에서 내려와 나란히 섰다. 그녀가 곧 버멜을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이미 선약이 있거든요.”

       “……선약이라.”

       “나는 당신 죽일 때까지 이 친구와 같은 길을 가기로 맹세했어요. 그것도 아주 오래 전에. 이중 계약은 할 수 없잖아요?”

       “보잘것없는 엘프와 한 약속이라면 얼마든지 파기해도 된다.”

       “싫은데? 위약금 물어야 하잖아.”

       

       에테르가 어깨를 으쓱인다. 버멜도 씁쓸한 듯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엘프.’

       

       뭔가 있다. 동시에 재수 없다.

       

       ‘상천을, 흑주를 앗아간 놈이 저놈이렷다.’

       

       상천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변심했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저 엘프가, 상천을 좋게 꼬드겼을 것이다. 그런 판단을 한 마왕이 촉수를 이처럼 까득까득 갈았다.

       

       협상은 결렬이다.

       

       “어어? 그 이상 다가오지 마세요.”

       “이런, 건방진 것들이, 감히.”

       “난 분명히 경고했어!”

       

       에테르가 스태프를 겨누었다. 버멜인가 뭔가 하는 엘프도 그녀를 따라 영문을 알 수 없는 의식을 준비했다.

       

       설마, 흑주인가?

       

       이런 곳에서 흑주를 사용하면 자기들도 휘말리고 말 텐데?

       

       상천은 보신을 중요하게 여긴다. 마왕이 아는 그녀는 그러했다. 매사에 소극적이어서 과거 대전쟁 당시에도 후방에만 있었다.

       

       그러니 자신을 그라운드 제로로 놓을 리가 없다. 그런 판단이 선 마왕은 우쭐하여 앞으로 나섰다.

       

       “허세를 부려봤자 소용없다.”

       “이게 허세로 보여?”

       

       눈가를 샐긋 올리는 에테르. 의심의 여지없이 허세였다.

       

       설령 허세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흑주가 발동하면 자신은 텔레포트로 도망가면 된다. 결국 멸망하는 건 정령계뿐이다.

       

       “짐의 제안을 받지 않았다니, 정말로 기구한 운명이구나.”

       

       마왕은 촉수를 꿈틀거리며 손을 합장했다.

       

       다음 순간, 그의 손끝에서 빛이 모여들었다.

       

       [전설급 고유마도 ─ 통곡(慟哭)]

       

       파바박!

       

       등 뒤로 난 수백 개의 촉수가 땅을 헤집는다. 정령계의 옥토가 묵빛으로 변해간다. 그러더니 장벽을 이루듯 서서히 융기되었다.

       

       벽은 얼굴의 형상을 이루었다. 입이 쫙 찢어진 사람의 대가리였다. 높이는 최소 수십 미터. 철로 이루어진 이물이었다.

       

       “아니, 저 마법은 대체…!”

       

       노움이 당황하며 소리치는 사이.

       

       “나아가라.”

       

       마왕은 완성된 벽을 진격시켰다.

       

       쿠구궁! 땅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지반이 잡아먹힌다. 정령계가, 세상이 통째로 먹히기 시작했다. 노움은 눈을 끔뻑거리다 말고 에테르와 버멜을 흔들었다.

       

       “지금 도망쳐야 하네!”

       “어디로 도망치는데요?”

       

       에테르는 버멜을 따라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흑주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늦었다.

       

       “이 벽은 통곡의 벽. 우리 종족을 능멸한 너희가 받아야 할 대가다. 얌전히 먹히거라.”

       

       포식의 권능을 극한까지 끌어친 마왕의 암기(暗器)였다. 이 마법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다. 노움이 당황하는 것이 당연했다.

       

       에테르나 버멜은 오히려 평안한 모습이었다.

       

       ‘왜지…?’

       

       마왕은 도의적으로 벽이 전진하는 속도를 늦추었다. 두 사람은 무언가를 읊고 있었다.

       

       “나는 바람의 정령왕, 에어리얼과의 계약을 이 자리에서 해지한다.”

       “본관은 전기의 대정령, 앨리스와의 계약을 이 자리에서 해지한다.”

       

       마왕은 제 귀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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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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