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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5

     [제국력 1월 6일 오전, 노스트럼 왕도 오로솔 아카데미 협곡재단 이사장실.]

     사람의 선택은 바뀔 수 있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매국노 그레이든, 수호자 그레이든, 그레이 지브롤터라는 인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노스트럼 전체가 위기에 빠진 상황.

     ‘나였으면 지브롤터 빼고 전부 버렸겠지.’

     만일 지브롤터의 책임자가 나였다면, 철저하게 지킬 곳만 지키며 낙오되는 자들을 잘라내고자 했을 것이다.

     살고자 하는 이들만 살아남을 것이다.

     지브롤터에 도착한 이들만 살아남을 것이다.

     지브롤터를 믿지 않고 음해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자기 성에 틀어박혀 그 누구도 나가지 못하게 하는 이들은 죽을 것이다.

     지브롤터와 협곡, 그리고 바르셀로나까지.

     딱 그 정도만 수비하면서 모든 영지를 버린 채, 오히려 난민들의 수가 줄어들 수 있게 제국군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응원했을지도 모른다.

     왜냐고?

     경험해보지는 않았지만, 수호자 그레이가 지브롤터만 지킨다는 선택을 내려야했던 배경을 짐작할 수 있으니까.

     직접 회귀로 경험한 만큼, 매국노 그레이가 지브롤터로 흘러들어온 온갖 난민들을 상대할 때 겪었던 경험이 있으니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그레이 경.”

     지금.

     “식량이 부족합니다.”

     나리아 여왕이 다가와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 식량 문제다.

     “그렇군요.”

     “그레이 경.”

     “식량만 부족한 겁니까?”

     “당장은.”

     “그럼 됐습니다. 일단 차라도 한 잔 하시죠.”

     나는 솜누스 차를 직접 우려내어 나리아 여왕에게 건넸다.

     “그레이 경….”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도록 하세요, 나리아 여왕 전하.”

     비록 완벽한 온도는 맞추지 못했지만, 이런 바쁜 상황에서도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것.

     “만일 최악이었다면 지금 차를 마실 시간도 없이, 잠도 자지 못하고 계속 돌아다녀야했을 겁니다.”

     “…….”

     나리아 여왕은 차를 가볍게 홀짝였다.

     나름대로 본인 스스로 어떻게 해결 방법을 모색하고 다니고 있겠지만, 당장 늘어나고 있는 피난민들을 불어들인 명령권자로서 불안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결이 비슷하긴 해.’

     아버지나 나리아 여왕이나, 결국에는 근본적으로는 노스트럼을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세인트 지오라는 한 개인이 증오스러웠을뿐, 노스트럼이라는 국가와 국민 자체에 대해서는 부채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왕족, 혹은 귀족의 의무.

     지도자로서 국민들을, 영지민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

     그게 없었다면 아버지는 지브롤터 이외의 모든 것을 잘라내는 선택을 내렸을 것이며, 나리아 또한 국가고 뭐고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처럼 되었겠지.

     “차근차근, 현 상황을 짚어보죠. 여왕 전하께서 노스트럼 각 영지에 피난민 구조선을 보내면서 있었던 일들을.”

     차가 쓰리다.

     “각 영지에서의 식량 징발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피난민부터 먼저 챙기는 바람에, 식량은 각자 챙긴 며칠 분량밖에 없었습니다.”

     첫 날, 마도자동선을 타고 오로솔 아카데미로 온 이들의 수는 적은 편이었다.

     나리아 여왕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영지민이고뭐고 영주와 일가족들이 먼저 마도자동선에 오른 경우는-오히려 나았다.

     

     적어도 ‘영주가 튀었다!’라고 영지민들이 알게 된다면, 영지민들이 진짜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닫고 짐을 바리바리 싸기 시작하니까.

     “쓸데없는 황금만 냅다 가져오는 바람에…하아.”

     그런 이들도 식량이 아닌 황금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바람에, 당장 몸을 눕힐 곳은 있어도 먹을 식량이 없는 것이 현실.

     “안 그래도 겨울인데.”

     날씨는 춥다.

     덕분에 시신의 부패가 더디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얼어붙어서 시신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차갑다.

     그나마 피난민들이 관리되고 있는 건 그들이 나리아를, 여왕 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철저하게 지시에 응하고 있는 것.

     이런 상황에 대한 매뉴얼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리아는 능숙하게 현 상황을 제어하고 있다.

     “그레이 경.”

     “예.”

     “보육원에서 했던 교육들 말입니다, 현 상황을 대비한 교육이었습니까?”

     “설마요.”

     나리아가 13살에 지브롤터에 왔을 당시, 보육원에서 생존 수업 비슷한 걸 하기는 했다.

     언제 어디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도록 숲에서 살아남는 법이라거나, 다른 영지로 갔을 때의 행동 수칙이라거나, 그런 상황에서 관리자에 해당하는 이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등에 대하여.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알겠습니다. 우연. 그 덕분에 효과를 보고 있으니, 더 이상은 묻지 않겠습니다.”

     나리아가 창 밖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아카데미 제복을 입은 이들이 허리에 검을 찬 채, 마석의 빛이 반짝이는 봉을 들고 피난민들을 인도하고 있다.

     “나리아 여왕님. 아카데미 학생들 말입니다, 지금 사실상 행정관과 군인으로 굴리고 있죠?”

     “예.”

     피난민들에 대하여 관리가 되는 비결이 있다면, 오로솔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던 학생들.

     “좋은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전부 지역으로 묶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귀족의 자제들이었고, 평민 중에서도 나름 입지가 탄탄한 부유층의 자식이었다.

     “자기 고향 사람들은 자기가. 다행히…왜 내가 해야 하냐, 그런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말이죠.”

     “…속으로 생각하고 있어도,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라고 했으니.”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자기 지역에서 온 이들은 각 학생이 관리한다는 상황이 펼쳐지게 되었고, 실제로 사람 여럿이 들어갈 수 있게 넓게 비어있는 강의동에는 같은 영지에서 온 이들이 모여있기도 하다.

     “귀족들은 불만이 없습니까?”

     “자기 자식이 직접 관리하는 경우에는 딱히 별다른 말은 없고, 평민이 관리인인 경우에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권력, 그리고 일러바치기.”

     나리아가 자신의 왼쪽 어깨를 가리켰다.

     “질서를 어지럽히고 따르지 않는 자는 여왕의 앞, 심판대에 올릴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붉은 완장을 찬 아카데미 재학생들 전원, 왕실 기사단의 일원인 셈이죠.”

     “잘 하셨습니다.”

     평민이 귀족을 억제할 수 있는 법.

     평민에게 ‘여왕에게 일러바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

     “학생들이 곧 행정관이 되고, 학생회 임원들이 대신들이 되는 거죠. 여왕도 따지고 보면 아카데미 3학년 학생 아닙니까.”

     “학기 수업 빼먹어서 규정상으로 따지면 출석일수 때문에 유급입니다만.”

     “그런 건 권력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후.”

     나리아가 깊게 한숨을 내쉰다.

     긴장 가득한 한숨이 아닌-

     “코르셋을 벗은 기분이군요.”

     안도의 한숨.

     “코르셋 끼고 있을 때보다도 숨이 갑갑했는데, 지금은 숨을 내뱉을 때마다 꽉 조이던 가슴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소한 이야기까지는 저한테 안 하셔도 됩니다만.”

     “그만큼,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는 거죠.”

     나리아 여왕이 옅게 미소를 짓는다.

     “왕도에는 내년 여름까지 버틸 수 있는 식량이 있습니다. 문제는 왕도의 백성들은 감당 가능하지만, 오로솔에 오는 다른 영지민들까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거죠.”

     “예, 그렇죠. 그렇다고 당장 식량을 내놓으라고 왕도 주민들에게 징발할 수도 없는 노릇일테니.”

     가능은 하다.

     “나리아 전하. 제국이라면, 황제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황제가 하는 방식을 따라가면 된다.

     “자연도태시킵니다. 식물 중에서 악착같이 살아남는 이들만 남겨둔 채, 말라 비틀어져 죽어가는 이들은 시신만 조용히 태울 뿐입니다. 오히려 비료로 쓰기도 하겠죠.”

     “거기까지.”

     나리아 여왕이 내 말을 끊는다.

     “돌려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방법은 선택하지 않을 방법이기에.”

     “…….”

     가볍게 차를 들이킨다.

     씁쓸한 쓴맛이 내려가고, 알싸한 향기가 입안에 감돈다.

     “그리고 그레이 경,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 대한 해결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제가 무슨 문제만 생기면 즉시 해결책을 찾아내는 사람도 아니고.”

     “준비했거나, 생각했거나, 대응할 수 있거나. 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싹 다 오로솔로 긁어모으지는 않았겠죠.”

     “…….”

     어느덧, 이제 나리아는 나에 대해 어느정도 알아버리고 말았다.

     “예. 방법이 있습니다.”

     “역시.”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길을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오히려?”

     “더, 대응하기가 쉬워졌거든요.”

     유감스럽게도.

     “그거 아십니까? 오로솔을 피난민 임시 구호소로 생각했을 때와 지금, 원래 생각했던 피난민의 수보다 훨씬 그 피난민이 적다는 것을.”

     준비한 식량보다 오로솔로 도망친 사람의 수가 적다.

     “자책할 일은 아닙니다. 그저 상상 이상으로 세인트 지오스러운 이들이 많았다. 그 뿐입니다.”

     마도자동선이라는 이름의 구조선에 탑승하지 않은 이들은 누구인가.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이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고 생각하는 이들. 그런 영주가 여왕의 왕권을 무시하고 영지민들이 왕도로 떠나지 못하게 막는 이들. 세이레네가 그 지경이 되었는데 직접 보지 않아서 믿지 않은 채, 왕도로 인구를 강제로 끌어모으려는 권력 빼앗기라고 생각하는 이들.”

     왕이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전쟁이 일어났다.

     “음모론에 심취하여, 제 살 길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동시에 다른 이들까지 전부 발목잡고 같이 죽자고 드러눕는 이들.”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답답해서 복장 터지는 상황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정보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제국과의 전쟁이 끝난다면 직접 신문사를 만들어보세요. 그리고 신문을 통해 전파하는 겁니다. 왕국의 정책과 소식을.”

     “신문을 맹신하게 만들라는 겁니까?”

     “부작용은 있지만, 적어도 신속하게 소식을 전파할 수는 있겠죠.”

     여론은 기사를 쓰는 사람의 펜대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성숙한 의식을 갖추는 것보다 당장 빠른 소식을 전한다는 게 더 중요한 상황이다.

     “다행히, 오로솔은 모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왕께서는 오히려 백성들이 고향으로 떠나지 않고, 무일푼이더라도 오로솔에 남아서 청소부라도 하겠다면서 떠나지 않을 걸 걱정하셔야겠죠.”

     “…너무 시설이 좋아서?”

     “다른 건 몰라도, 제국의 문화가 삶에 편의를 가져온다는 것 하나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사장실 장식장의 문을 열었다.

     “식량이라. 하긴. 다들 집에서 매일 톱밥섞인 빵을 구워먹고 묽은 스프에 빵을 찍어먹고 그랬을테니, 그런 시설도 없는 곳에 와서 당장 먹을 빵이 없으니 곤란하기는 하겠죠.”

     “그건….”

     “간단합니다.”

     나는 장식장 속, 아직 상하지 않은 음식을 하나 꺼냈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죠.”

     “…….”

     “그다지 많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당장 바르셀로나의 황금평야에서 수확한 밀을 가져오는 사이에 먹일 음식으로는 충분할 겁니다.”

     제국 것이지만.

     “배고픈데 제국 물건이 대수입니까. 만일 이게 제국 거라고 해서 먹기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강제로라도 입에 쑤셔박을 겁니다. 그래도 먹기를 거부한다면.”

     나리아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 안에 비스킷 대신, 머스킷을 박아넣겠습니다.”

     “…….”

     저런 농담, 아버지가 주로 하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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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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