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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5

       ‘이것들이 미쳤나?’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정령과의 계약을 해지하다니. 죽을 작정인 게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짓이다.

       

       아니, 저 엘프는 처음 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원래 엘프라는 것이 앞뒤 안 재고 들이박을 만큼 멍청한 종족 아니던가? 마왕은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상천은 아니었다. 상천은 이 자리에서 순순히 죽을 인물이 아니다. 분명히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흐음.”

       

       마왕은 두 사람을 떠나가는 정령들을 쳐다봤다. 전계마도의 대정령, 앨리스가 펑펑 울고 있었다. 거짓 눈물인 것 같지는 않았다.

       

       이후 에어리얼이 앨리스의 뒷덜미를 잡아 날아올랐다. 앨리스는 계속해서 상천의 이름을 불렀다. 상천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설마.”

       

       알았다. 알겠다. 마왕은 곧바로 염화를 걸었다.

       

       “3석, 6석.”

       

       – 예, 폐하.

       

       “하던 일을 속히 멈추고 세계수 앞으로 와라. 전 병력을 이끌고 와야 한다. 포탈 바깥으로 개미 새끼 한 마리 도망치지 못하게 막도록.”

       

       슈우웅.

       

       두 정령왕이 통곡의 벽을 넘으려 했다. 마왕이 촉수를 뻗어 일차적으로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뭐, 당장 중요하진 않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기. 마왕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흑주의 기술을 가진 상천뿐이었다. 상천만 잡아 흡수한다면 남은 정령왕은 물론이고, 여신도 손쉽게 해치울 수 있다.

       

       마왕은 에테르와 버멜을 바라보며 말했다.

       

       “발버둥을 쳐봤자 무효하다. 너희는 독 안에 든 쥐야. 항복할 기회조차 발로 차버렸으니, 이제 남은 건 죽음뿐이리라.”

       

       쿠구궁. 통곡의 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 밑에 달린 거대한 촉수와 아가리가 지반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피할 곳은 없었다. 막을 수단도 없었다. 에테르와 버멜, 두 사람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여긴 내가 어떻게 해볼 테니까 심부로 가게!”

       

       노움이 그리 소리치며 앞으로 돌진했다.

       

       “우오오오!”

       

       맹렬한 포효였다. 그가 내디딘 곳마다 암석이 튀어 올랐다.

       

       신성한 기운이 담긴 돌덩이를 조종하며 벽을 향해 맹렬히 뛰어드는 노움. 

       

       이윽고 정령왕과 벽이 충돌하며 요란한 굉음을 빚었다.

       

       “건방진 것.”

       

       벽이 파도치듯 접혔다. 노움의 머리 위로 콘크리트 조각이 떨어진다. 노움은 사력을 다해 그 자리에서 버텼다.

       

       “저렇게 되면…….”

       

       에테르는 그 모습을 황망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자, 에테르!”

       “어? 어.”

       

       두 사람은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달렸다.

       

       여신과 맞닿은 곳, 심계(深界)를 향해서. 

       

       “흐하하! 제대로 도망쳤군.”

       

       노움은 씩 웃으며 통곡의 벽을 향해 정권을 내질렀다. 벽이 순간적으로 파이며 구멍을 만들었다. 그러나 곧 다른 부분에서 온 콘크리트가 노움의 팔을 집어삼켰다.

       

       “윽!”

       

       아프다. 정말이지, 더럽게 아프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보게 마왕! 자네는 당했어! 조만간 자네는 최후를 맞이할 걸세! 그러니 이 순간을 절절히 즐기게나. 흐하하하!”

       

       마왕이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어느덧 벽의 모르타르가 노움의 양쪽 다리와 팔을 전부 휘감았다. 사지부터 시작해서 몸통, 최후에는 머리까지. 한 번에 집어삼켜 자신의 양분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자네는 끝이야! 끝이라고!”

       

       그런데도 노움은 끊김이 없이, 호방하게 웃었다.

       

       정작 최후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자신인데도.

       

       “시끄러운 놈.”

       

       마왕은 있는 마력을 전부 끌어쳤다. 눅진눅진한 시멘트가 전부 노움에게로 집중된다. 노움은 웃고 또 웃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웃다가,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결국에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땅의 정령왕이 유명을 달리했다.

       

       마왕은 다시 한번 입을 벌렸다. 노움이 담긴 콘크리트 더미를 통째로 삼켜내며 그 힘을 흡수했다. 이제 마왕은 몰라보게 커져 있었다. 그 신장만 최소 수백 미터에 이르는 것이다.

       

       “후, 후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정령왕 세 마리를 잡아먹고, 사천 하나에 구천지대계 한 명의 힘까지 자신의 수중에 들어왔다. 여기에 대전쟁 시절 먹어치웠던 수많은 최상급 정령들의 힘도 있다.

       

       게다가 자신의 힘까지 합치면….

       

       이젠 여신을 제외하면 마왕을 대적할 자가 없었다. 에어리얼, 앨리스, 카우렐리아의 우수한 마도사들. 전부 덤벼도 단신으로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물론 마왕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마왕 파르켈수스는 계속해서 벽을 움직였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정령계를 먹어치우며 그 몸집과 힘을 불려나가는 중이었다.

       

       “마왕님, 두 대정령을 놓쳤습니다.”

       

       어느새 그의 곁으로 구천지대계 하나가 달려왔다.

       

       3석, 빌헬름 폰 슈델가이거.

       

       아이러니하게도 시키는 것을 묵묵히 해낸 자만이 끝까지 마왕의 곁에 있을 자격이 있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처벌을 내려주십시오.”

       “아니, 처벌이랄 건 없다. 짐은 너그러우니까.”

       

       빌헬름을 먹을 필요가 없는 덴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노움을 흡수한 상태에서 빌헬름을 먹어 봤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둘째. 별다른 꿍꿍이가 없고, 그저 주어진 역할만 충실히 수행하는 충신을 죽여 봤자 이득이 될 게 없으니까.

       

       공포 정치는 충성심이 없는 자들에게 충성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원체 충정이 있는 자들에게 시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도망친 정령왕들 따위, 심계를 제패하고 나면 조무래기에 불과한 것들이다. 우선 상천을 제압한 뒤, 그녀의 힘을 사용하여 남은 대정령을 모조리 토벌하고 여신에게로 향하는 길을 열 것이다.”

       

       마왕의 말에 빌헬름이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저, 여신님께 가는 길목은 어떻게 엽니까?”

       

       여신 르퀴네스는 이곳 아렌스 대륙과는 달리 상위 차원에 존재하는 신이다.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그녀와 만날 수도 없다.

       

       그러나 오랜 기간 연구를 거듭한 끝에, 여신이 속한 ‘방’으로 향할 수 있는 샛길을 발견하고 말았다.

       

       “심계.”

       “심계요?”

       “그렇다. 심계. 심계로 향하면 된다.”

       

       정령계의 심부에 여신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심계는 인세에서 가장 떨어진 곳이다. 동시에 정령왕들이 평소 거처하는 곳이기도 하지. 정령왕들은 저곳에서 신탁이라는 이름으로 명령을 하달받아 온 대륙에 퍼뜨린다.”

       “그렇다는 말씀은… 심계를 점령하면 여신과 만날 수 있다는 뜻이로군요.”

       “그냥 점거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차원의 틈을 찢어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이 도대체 뭐죠?”

       “흑주.”

       

       대답을 들은 빌헬름이 입을 다물질 못했다.

       

       “힘의 원천이란 곧 에너지야. 막대한 에너지를 심계에 가하면 시공간이 뒤틀린다. 그것이 곧 여신에게 향하는 길이다.”

       “그렇, 군요.”

       “여신이라 해도 이 세상을 전부 먹어치운 짐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전지전능했으면 진작 짐을 해하려 했겠지. 하지만 아무런 짓도 하지 못했어. 그 조잡한 기술로 짐을 봉인하는 것에 그쳤지. 그만큼 그년에겐 내가 성가신 존재라는 뜻이다.”

       

       빌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짐이 왜 상천이 군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는지 알겠느냐?”

       “마왕님의 뜻을 정확히 알겠습니다.”

       “좋다. 지금 당장, 남은 병력을 이리로 데려오도록.”

       

       빌헬름이 손을 휘적거렸다. 그러자마자 마수의 대군이 포탈을 통해 정령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도 안 됐다. 마왕의 군대가 정령계 내부를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이거, 흥분되는군.”

       

       대업이 이루어지려는 순간이다. 흥분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만약의 경우를 전부 준비했다. 비상 탈출용 텔레포트 스크롤도 챙겨 두었다. 만에 하나, 상천과 그 엘프가 위험한 수작을 부리면 일단 탈출할 계획이었다. 그것만 감안한다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마왕은 잔뜩 고양된 목소리로 한 마디를 외쳤다.

       

       “진격하라!”

       

       

       **

       

       

       나와 버멜은 정령계의 심부까지 단숨에 도달했다.

       

       “하아, 하아….”

       “헉, 헉, 헉…….”

       

       어찌나 빠르게 달렸는지 숨이 가쁘다. 밤송이를 삼킨 것처럼 목 전체가 따가웠다. 침을 내뱉을 때마다 걸쭉한 핏물이 덩어리져서 딸려 나왔다.

       

       “……에테르.”

       “……버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쓰게 웃었다.

       

       “…우리,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

       “그러게.”

       “…….”

       “……그래서?”

       

       막상 죽으려니 실감이 안 난다.

       

       그렇다고 딱히 나눌 말도 없었다. 가족이나 연인이었으면 뭐 사랑한다, 고마웠다, 행복했다. 이런 말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낯뜨거운 말을 하기엔 우리 사이가 아직 좁혀지지 않은 것 같았다.

       

       왜냐. 죽어도 지구로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지구로 귀환하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전부 하룻밤 꿈처럼 산화할 것이다. 여자인 에테르는 사라지고, 남자인 이태연만 남을 것이다. 이는 버멜도 마찬가지다. 버멜 호르데는 사라진다. 남는 건 김성현이라는 이름뿐.

       

       우리 둘 다 한국인으로 돌아간다. 원래 있어야 할 정체성으로 돌아간다. 아렌스 대륙이야, 남의 세계다. 어찌 되었건 간에 알 바인가?

       

       알 바냐고.

       

       응?

       

       “…오네.”

       

       버멜이 그리 말했다. 투두두두, 하고 지축이 울렸다. 저 너머로 다가오는 마수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모르타르의 벽.

       

       잔뜩 비대해진 마왕과, 그가 벌리고 있는 아가리까지. 전부 우리를 모래알 마시듯 삼켜버리려는 파도 같은 군세였다.

       

       사천씩이나 되는 몸이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령과의 계약을 해지한 탓에 마력이 거의 돌지 않았다.

       

       – 동생, 같이 죽게 해줘요. 동생…!

       

       “미안해, 언니. 언니는 여기서 남은 사람들 돌봐야지.”

       

       앨리스에게 들리지 않을 마지막 말을 전한다.

       

       눈앞에 콘크리트 벽이 덮쳐오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하룻밤 힘낸 덕분에 비축이 잔뜩 생겼습니다

    모두 해피 어린이날, 어버이날 보내세요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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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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