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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6

       우리는 마왕의 군세에 밟히고, 찢기고, 온몸이 까질 정도로 두들겨 맞다가 콘크리트 벽에 잡아먹혔다.

       

       그 과정이 어땠는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워낙 추레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아, 윽.”

       

       성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전신이 쑤셨다. 그리고 그건 버멜도 마찬가지였다. 얘는 정신을 잃었다가 조금 전 겨우 의식을 차렸다.

       

       “…에테르.”

       “왜.”

       “죽는다는 게 이런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새끼야….”

       

       버멜은 공허한 눈동자로 나를 마주 보았다.

       

       “왜, 저쪽 세상에선 박사까지 땄잖아. 이런 질문 하나 못 들어? 서운하게.”

       “나는 물리학 박사예요. 철학과 박사가 아니라.”

       “그게 그거 아닌가…?”

       “이 개새끼가?”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으로 버멜을 툭툭 때렸다.

       

       “아, 씁….”

       

       탈구된 팔이 제대로 움직여지질 않는다. 오히려 때리는 게 손해였다. 나는 농담을 던지려다 말고 축 늘어졌다.

       

       “그나저나.”

       

       천장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

       

       마왕의 촉수에 삼켜진 것까지는 기억난다.

       

       “알지.”

       “어딘데?”

       “마왕의 몸속.”

       “이렇게나 크다고?”

       “정령을 여럿 잡아먹으면서 비대해진 거야. 마왕은 어떻게 보면 마력 덩어리니까…. 인간이라 부를 수도 없어.”

       

       버멜은 이곳이 ‘배드 엔딩’에서 자주 본 장소라고 덧붙였다. 그런 장소치고는 생각보다 차분해서 놀랐다.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딱 좋네.”

       

       이곳이 내 무덤이다.

       

       “예전에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었지.”

       “무슨 꿈인데?”

       “주변은 온통 어두컴컴한데, 광원이 딱 하나 존재하는 곳이었어. 그 빛을 따라 정처 없이 걷는 꿈이었지.”

       

       나는 그곳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났다.

       

       마왕군 시절의 에테르. 그것은 나의 첫 번째 자아였다. 동시에, 현재는 융합되어 나 그 자체가 된 인물이었다.

       

       배신당하고, 실망하고, 흑주를 터뜨렸던 나. 영겁의 차원을 회귀하여 다른 세계선의 미래를 알고 있던 나. 그런 내가 나에게 꿈을 통해 알려주었던 것이다.

       

       죽는다면, 나는 이런 곳에서 죽을 것이라고.

       

       “묫자리로는 썩 괜찮은 장소야.”

       “여기 맹지인데?”

       “네가 있잖아.”

       

       내 말을 들은 버멜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여기서 혼자 뒈진다고 생각해 봐. 미쳐 죽을걸? 그나마 말할 동료라도 있는 게 다행이지. 안 그래?”

       “그, 그렇지.”

       “계획이 잘 들어맞은 것도 천운이 따랐고 말이지.”

       

       나와 버멜이 세운 계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 들어맞았다.

       

       계획을 세웠을 당시 노움은 미끼를 자처했다. 자신이 마왕을 유인하겠다고. 

       

       그렇게 그는 여신의 심복으로서 최후를 맞이했다. 비록 여신이 만든 AI였지만,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간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정령왕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슬슬 시작하자. 이러다가 바깥사람들 다 죽겠다.”

       “어, 응.”

       

       나는 씩 웃으며 품에서 기다란 스크롤을 꺼냈다.

       

       하나, 둘, 셋, 넷.

       

       “여섯, 여덟, 열, 열둘.”

       “잠깐만 너! 대체 몇 개를 가져온 거야?”

       “잠깐 기다려 봐. 스물, 스물둘, 스물넷…….”

       

       시무룩해져 있었던 표정도 잠시.

       

       겨울철 옷에 꼭꼭 숨겨두었던 흑주 스크롤을 주르륵 꺼내는 나를 보며 버멜이 질겁했다.

       

       “총 서른 개네.”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에 버멜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죽는데 뭐가 과해?”

       

       하나 처맞든 서른 개 처맞든 우리가 죽는 건 똑같은데.

       

       “버멜, 나는 말이야. 마왕을 확실하게 조질 의무가 있어. 너와 그리 약속했으니까 말이야.”

       

       마왕이 죽는다고 해서 아렌스 대륙이 평화를 되찾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 다른 마왕이 튀어나올 수도 있고, 이세계판 춘추전국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전란의 시대가 이어질 가능성을 무시 못 한다. 애초에 사람의 역사란 싸움의 역사였으니. 이 세계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로테가, 프레이가, 클라이스나 헤를라인 선생님도 물론이다. 내가 없는 세계에서도 웃으며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

       

       “마왕은 확실하게 죽여야 해.”

       “하아….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나는 삐걱거리는 팔로 바닥과 위벽에 스크롤을 붙였다.

       

       하나씩, 하나씩. 터지기 좋은 위치를 고려한다. 물론 의미는 없었다. 다 같은 그라운드 제로다. 뭐가 터지든 정령계가 박살 나는 건 각오해야 한다. 심지어 길라흐를 잡았을 때 썼던 것보다 위력이 배 이상은 큰 놈들이다.

       

       “조금만 나눠 줘.”

       

       정성스레 붙이고 있자니 버멜이 절반을 가져갔다. 곧 그도 피를 철철 흘리는 몸뚱이로 스크롤을 붙였다.

       

       툭.

       

       “엇….”

       “왜?”

       “아니, 갑자기 손이 닿아서.”

       “그게 왜.”

       “…아무것도 아니다.”

       

       버멜은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그야 긴장되겠지. 이런 경험은 처음인데. 제아무리 빙의자라도 정신적인 피로가 심한 모양이다.

       

       “다 붙였어.”

       “이제 끝인가?”

       “그래.”

       

       나는 몸에 남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 받아요, 동생….

       

       앨리스 언니가 작별 선물로 준 마나다. 그래서 마왕군에게 죽도록 처맞을 때 한 방울조차 쓰지 않고 온존해 두었다. 덕분에 마왕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

       

       정신을 집중했다. 남은 마력을 정확히 30등분하여 각 스크롤이 꽂힌 지점에 겨냥했다. 모든 스크롤이 웅혼한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헀다.

       

       버멜은 내 곁에 양반다리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워낙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좋아. 터지기 전에 농담 좀 던져볼까.

       

       “야,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 줄까?”

       “……뭔데?”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냐?”

       

       버멜의 표정이 다시 한번 멍청해졌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심장에 총알이 박혔을 때?”

       “…아니.”

       “그러면 뭔데?”

       

       내가 웃었다.

       

       “맹독 버섯 스프를 마셨을 때다─!!”

       

       짜악!

       

       양손을 맞대자마자 서른 개의 스크롤이 일제히 공명하기 시작한다. 사방에서 탄내가 나고 있었다. 각각의 회로가 가열되어 마나를 운행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뭐야 씨.”

       

       내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는 버멜. 아까보다는 밝아진 얼굴이 된 그가 내게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나는 그쯤에서 맞대고 있던 손을 풀고는 무너졌다.

       

       몸이 한계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버멜은 내 머리를 자신의 다리에 살포시 받쳐 놓았다.

       

       젠장. 무릎베개는 엄마한테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죽기 직전인데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테르.”

       “왜.”

       “이제 정말 끝이구나.”

       “계약 말이야? 이 정도면 훌륭하게 해냈지?”

       “…어.”

       

       그가 씁쓸하게 웃는다. 시선은 내게로 고정한 채였다.

       

       “에테르.”

       “또 왜.”

       

       버멜은 그 순간에 입을 우물거렸다. 사내새끼답지 않게 눈가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녀석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가 행복하길 바라.”

       

       [팔정도(八正道) 제0식(式)]

       

       [흑주(黑晝)]

       

       다음 순간.

       

       시야가 암전됐다.

       

       

       **

       

       

       정령계 심부.

       

       땅의 정령왕이 남긴 잔당들도 모조리 죽고, 대지와 하늘은 묵빛으로 물든 세상에서 마왕은 웃음을 터뜨렸다.

       

       “좋구나. 아주 좋아.”

       

       근엄함을 유지하려 해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간다.

       

       몸은 이미 비대해졌다. 마왕은 더는 인간이라 부를 수가 없는 존재였다. 정령을 먹고, 동족인 금안족을 먹었다. 양극단에 위치한 두 종족을 흡인한 결과가 이것이다.

       

       심계의 정상에 오른 마왕이 다시 한번 광소를 흩었다.

       

       “감축드립니다. 마왕님.”

       “그래, 빌헬름. 수고했다.”

       

       마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빌헬름을 곁에 앉혔다.

       

       “배신자도 많고, 손실도 그만큼 컸다. 정말 다사다난한 삶이었군. 결국 자네와 6석, 민천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부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구나.”

       “저 따위 한낱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왕님의 은총이 없으셨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있었겠습니까?”

       “녀석. 여태 살아남은 이유가 있었구만.”

       

       평소 의심이 많던 마왕도 지금만큼은 긴장을 풀었다.

       

       풀어도 될 것 같았다. 더는 상천이 없으니까. 그녀를 콘크리트에 싸서, 한입에 털어 넣었으니까.

       

       “마왕님.”

       

       정령계의 황혼을 감상하던 빌헬름이 화두를 바꾸었다.

       

       “아직 전계의 대정령과 공계의 정령왕이 남아 있습니다. 마왕님께서 대륙을 온전히 제패하기 위해선 그들을 찾아가 격퇴해야 합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긴 하지. 하지만 짐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네. 이미 6석에게 일을 시켜 두었으니까.”

       

       상천이 기술을 확립하고 민천이 빚어낸 원자폭탄. 그만한 폭탄만으로도 피난민 행렬과 정령왕 둘을 동시에 궤멸할 수 있다.

       

       “지금쯤 카우렐리아는 끝장이 났을 것이다.”

       “그 장면을 직접 보러 가시는 것도 묘미 아니겠습니까?”

       

       마왕은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는 디저트로 즐길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상서롭더라도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마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빌헬름도 서둘러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무얼 하시렵니까?”

       “이곳, 심계를 전부 박살낼 것이다.”

       

       여신에게로 향하는 길을 뚫는다.

       

       처음부터 그 생각뿐이었다.

       

       “여신이 새로운 정령왕을 탄생시키면 골치 아파진다. 그전에 속전속결로 여신을 찢어 죽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옹골지게 우리 것이 되겠지.”

       “영명하십니다.”

       

       마왕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신체 내부에서 뜨듯한 기운이 올라왔다. 상천과 그 옆에 붙어 있는 엘프를 먹었더니 새로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모양이다.

       

       그중에서 유독 뜨거운 감각이 있었으니.

       

       ‘이 감각은…….’

       

       위장에 넣고 다니는 마법이 하도 많다 보니 색(色)과 열(熱) 따위를 이용하여 사용할 마법을 구분하던 마왕이었다.

       

       이 정도로 뜨겁고 벅찬 감각은 처음이었다.

       

       틀림없이 상천의 고유마도, 흑주였다.

       

       “이것이 상천의 힘이로군.”

       

       과연. 일반적인 무력은 별로 강해진 것 같지 않은데, 마도학적으로 꽤 많은 깨달음을 얻은 듯하였다.

       

       마왕은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악신 르퀴네스여, 똑똑히 봐 두거라!”

       

       다음 순간.

       

       마왕의 몸을 찢고 버섯구름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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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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