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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8

       인간계와 정령계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 유일한 출입구는 포탈뿐이며, 이 포탈이 억지로 확장되지 않는 한 두 세계는 서로 별개의 것으로 취급된다.

       

       따라서 인간계가 사라지더라도 정령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한다. 또한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런 원리에 따라, 정령계에서 대규모 폭발이 벌어지더라도 인세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나마 영향을 줄 요소라면 두 계(界)를 잇는 마법의 불능이다.

       

       “내 스코프가….”

       

       다중차원 전파를 사용하는 로즈마리의 스코프가 꺼졌다. 정령계와의 통신이 두절된 것이다.

       

       더불어 로즈마리의 손도 점점 살굿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왕이 건 ‘철화의 저주’가 사라지며 본래의 모습인 인간으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이겼다.”

       

       로즈마리는 눈물 젖은 얼굴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중충한 천장. 그러나 가득히 쌓인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비춰 들어오고 있다. 모두가 그 광경을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품었다.

       

       로즈마리는 다시 고개를 돌려 로테에게 말했다.

       

       “종이, 전부 태워버려.”

       

       

       **

       

       

       전쟁이 끝났다.

       

       겨울이었다.

       

       

       **

       

       

       세계수 코앞까지 다녀온 에어리얼이 모든 것을 전했다.

       

       정령계는 멸망했고, 살아남은 정령들은 돌아갈 터전을 잃었다. 

       

       당분간은 여신님과도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여신에게 신탁을 받을 수 있는 ‘메인 서버룸’이 터져 버렸다. 복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때까지 남은 정령들은 대륙에 남은 이들을 도와 무너진 세상을 재건해야 한다.

       

       파괴된 곳이 워낙 많아서 어디부터 손써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왕이 죽었다. 희망의 싹이 움튼 것이다.

       

       피난을 가던 카우렐리아의 국민 중 일부는 수도 메르헤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정부는 예정대로 천도를 감행했다. 메르헤름보다는 티르판이 덜 파괴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대통령 각하.”

       

       행정부장관을 비롯한 각처 장관이 대통령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후 사정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하실 것인지, 고견을 여쭙고자 합니다.”

       “일단…. 선거가 코앞이군요.”

       

       다음 대선까지 석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

       

       마왕이라는 실질적인 위협이 사라진 세상에서 카우렐리아를 막을 집단은 없었다. 이젠 엘프들의 세상이었다. 이 시점에서 엘프국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곧 아렌스 대륙의 패자가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후 복구가 시급한 상황입니다. 국민 여러분께 잘 설명드려서 재임 기간을 늘려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될 일이오.”

       

       카우렐리아의 민주정은 공화국 출범 이래로 변한 적이 없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 최대 두 번까지 할 수 있다.

       

       연장한다거나, 3선 개헌을 한다거나. 그런 짓은 자칫하면 독재로 이어질 수 있다. 제 손으로 귀족 사회를 타파한 민중이 그것을 좌시할 리가 없다.

       

       “어떻게든 선거는 치러야 합니다. 그것이 이 나라의 근간이요, 멸망하기 전까지 지켜야 할 대원칙이지요.”

       “하지만 전쟁 때문에 가구 확인이 어렵습니다. 선거구 설치에도 자금이 들고요. 전후 복구에도 상당한 돈이 깨질 텐데, 이걸 야당에게 어떻게 설득합니까?”

       

       대통령이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반대하는 이들은 전부 왕정복고를 노리는 놈들이라고 주장하는 게 좋겠습니다.”

       “각하?”

       “사실 그게 맞죠. 예.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민중의 승리로 세워져서, 선거로 꽃을 피운 나라 아닙니까?”

       

       대통령의 몇 마디엔 강한 함의가 들어있었다. 과격한 발언이긴 했지만,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했다.

       

       “지지율이 떨어지실 수도 있습니다.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리라는 보장도 없고요.”

       “아, 그거라면…….”

       

       대통령, 그리고 행정부장관. 이들이 미리 생각해 둔 계획이 있었다.

       

       “금안족에게 시선을 돌리도록 하면 됩니다.”

       

       이제 그들의 다음 적은 금안족이었다.

       

       “전후에는 국론이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국민 단결을 만들어내려면 어떤 수단을 써야겠습니까?”

       

       관료들은 침묵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면, 행정 명령을 반포하겠습니다.”

       

       금안족은 마왕의 거병에 동조했던 종족이다. 이젠 공연한 사실이다. 금안족은 사회의 악이다.

       

       이러한 미명 하에 금안족을 특수 격리 구역으로 이주하거나 아예 국외로 추방하는 정책이 차례로 입안됐다.

       

       이 소식은 곧 요르문간드의 귀에도 들어갔다.

       

       “민천 각하.”

       

       요르문간드는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카우렐리아의 공무원들이 도착했습니다.”

       “나가보겠다.”

       

       부하의 말대로 막사 밖에 사무적인 옷차림을 한 엘프가 수십 명 있었다. 이들은 앞서 테이블을 마련하고 그 위에 종이를 한 무더기 올려놓은 채 요르문간드를 맞이했다.

       

       “당신이 유일하게 남은 사천이라고 들었습니다.”

       “본인 맞으십니까?”

       

       요르문간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당신이 지금 남은 군대를 통솔하고 있겠군요.”

       “그렇네.”

       

       마왕이 죽었어도 잔당은 남아 있다. 그리고 사천 중에는 유일하게 민천인 자신만이 생존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종족의 미래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가며 죽기살기로 싸웠건만, 정작 살아남았다니.

       

       애달프다. 특히 상천을 잃은 것이, 너무나도 애달프다.

       

       “저희가 찾아온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민천, 당신은 상식이 통하는 분이라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라는 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요르문간드의 시선이 살짝 아래를 향했다. 줄글이 적힌 종이 한 장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러나 눈이 보이지 않았기에 이 이상을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일단… 알겠네.”

       

       요르문간드라면 이곳에 온 공무원들을 단신으로 전부 죽여버릴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일로 꾸민 뒤 산중으로 도망쳐 유유자적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는다. 홧김에 죽일 생각도 없었고.

       

       ‘졌으면 진 거다.’

       

       마왕은 죽었고, 남은 이들도 전의를 상실했다. 이 이상 농성을 계속해 봤자 양측의 피해만 가중될 뿐이다.

       

       “보십시오. 강화 문서입니다.”

       “여는 눈이 멀어 글을 읽을 수가 없네.”

       “그러면 대신 읽어드리겠습니다.”

       

       요르문간드의 눈이 매섭게 변한다.

       

       “혹여라도 문서와 다른 내용을 읊는다면…….”

       “그,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면 읽어 주게.”

       

       공무원이 종이를 들고 차례로 줄글을 읊었다.

       

       전후 처리 보상과 마왕군의 해체, 전범의 재판 및 처벌이 주된 내용이었다. 다른 건 요약할 게 없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군.’

       

       어차피 전쟁을 일으킨 건 마왕군이다. 이제 전쟁에서 졌으니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르는 건 당연하다.

       

       다만 요르문간드는 걱정하고 있었다.

       

       ‘만약, 이 조약이 여 외의 금안족에게 족쇄가 된다면….’

       

       그렇다면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쥔 펜에 금안의 미래가 걸려있었다.

       

       “여기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공무원은 펜의 위치를 짚어주었다.

       

       요르문간드는 서명하기 전 애원하듯 내뱉었다.

       

       “여는, 나는 재판에 넘겨도 좋네. 사형을 내려도 좋아. 오래 살았으니 더는 죽어도 여한이 없네. 하지만, 하지만 말일세…….”

       

       그녀가 자신의 이름 첫 글자를 적으며 고개를 들었다.

       

       “……다른 무고한 이들은 살려주게.”

       “국제법에 따라 선처하겠습니다.”

       

       공무원은 딱딱한 어투로 그리 대꾸했다.

       

       “죄송하지만 저희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가능한 한 빨리 적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아악!!

       

       “억…!”

       

       요르문간드에게 독촉하던 공무원의 머리에 바이올린이 들이닥쳤다. 민머리 공무원은 몇 마디 신음을 토해내더니 책상에 대가리를 처박고 기절했다.

       

       “뭐, 뭐냐! 어억!”

       “너흰 누구… 으아악!!”

       

       그 뒤로 이변이 발생했다.

       

       공무원, 마도사 할 것 없었다. 모두가 스태프로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풀썩풀썩 쓰러진다. 민천의 군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요르문간드도 당황하는 사이.

       

       그녀의 앞에 인족과 수인족, 그리고 금안족으로 구성된 수백 명의 마도사 무리가 나타났다.

       

       그중 선두에 선 이가 바이올린 현을 휙휙 돌리며 웃었다.

       

       “이거 완전히 바보들 아니냐? 상대방 군영에서 항복 문서를 체결하는 병신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뭐, 그만큼 엘프국도 여유가 없다는 거지만. 소녀는 그리 덧붙이며 앞으로 나섰다.

       

       이윽고 종이 한 장을 집어든 소녀가 그것을 그대로 읊어 나갔다.

       

       “금안족의 강제 이주 정책에 민천의 이름으로 동의. 현재 마왕군이 점령하고 있는 구제국령과 엘랑카야 이북 지역까지의 영토를 모조리 카우렐리아 당국에 양도할 것. 전쟁에 사용했던 마왕군의 핵심 기술은 전부 넘겨주고, 하위 마수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폐기 처분. 마지막으로 사천과 구천지대계 급은 모조리 색출해서 사형이라….”

       

       소녀가 광소를 터뜨린다.

       

       “이거 완전히 미친 새끼들 아니야?”

       

       잠깐.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대! 혹시 ‘위령’인가?”

       “예, 오랜만이네요. 멍청한 고룡 씨.”

       

       걸쭉한 입담을 지닌 소녀의 정체는 로즈마리였다. 상천의 직속 부관이자, 그녀의 열렬한 추종자. 그 때문에 상천에게 잔소리를 하던 민천에겐 늘 모질게 굴던 아이.

       

       “민천, 그거 알아요? 이 사람들, 당신이 장님인 걸 이용해서 가짜 조약 문서를 만들었다고요. 당신이 서명하려 했던 건 방금 제가 읽었던 거랍니다.”

       “뭐, 뭣이…….”

       

       빠득, 하고 이를 가는 요르문간드.

       

       국제법을 따르네 뭐네 하며 온갖 말을 늘어놓았던 엘프 공무원들이 실은 유치한 수법으로 자신을 속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 이 무례한 것들…! 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엘프들과는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

       

       요르문간드가 노발대발하고 있던 사이.

       

       로즈마리 외에 또 다른 금안족이 나섰다.

       

       겨울 하늘에 내리는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에, 에테르와 정확히 똑같은 외모를 지닌 미형의 소녀.

       

       아카샤였다.

       

       “그러면 민천, 우리와 동행합니다.”

       “……우리?”

       “그래요. 우리.”

       

       아카샤는 손을 내밀며 민천의 팔을 끌어당겼다.

       

       감각이 느껴진 것은 팔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꼬순내가 올라왔다. 누구의 냄새인지는 눈을 뜨지 못해도 뻔히 알 수 있었다.

       

       와락!

       

       “신령니이임!! 보고 싶었어요!!”

       “꼬맹아!”

       

       요르문간드는 프레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프레이는 여기까지 오면서 숨을 몇 번이고 씨근댔다. 친한 친구를 잃어버린 탓에 눈물로 며칠을 지새운 탓이다. 그랬기에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비록 요르문간드는 프레이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숨소리나 심장 소리를 듣고 기분을 짐작했다.

       

       “왜 이리 울었던 것이냐? 응?”

       

       프레이는 아무런 말 없이 요르문간드를 껴안았다. 사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에테르. 그녀를 잃어서 이리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쁜 일도 있었다. 프레이는 요르문간드라도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픈 기억을 떨쳐낸 프레이가 요르문간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랑 함께 가요, 신령님!”

       “너희와 함께 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우리 북쪽으로 가서 나라를 세울 거예요. 제국 사람들이랑, 수인족이랑, 금안족이랑 전부 합쳐서요. 신령님도 같이 가서 도와주세요!”

       “뭐, 뭐라…?”

       

       깜짝 놀란 요르문간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라를 세운다니.

       

       갑자기 일이 커지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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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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