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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29

   별과 같은 백염의 불길이 황궁에 치솟았다.

     

   그 압도적인 광경 속.

   몸이 거의 다 타버린 시그린이 만신창이인 꼴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빛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벨라 그년이 나한테 흑마녀를 이용해 세뇌를 걸었구나.’

     

   이미 정신적으로 몰릴 대로 몰린 시그린이라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이렇게까지 앞뒤 없이 행동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준비라도 더 확실하게 했을 테니까.

     

   하지만 무너진 그녀의 정신은 세뇌에 너무나 취약했다.

   헐거워진 문고리를 뚫고 들어온 세뇌는 시그린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던 원한과 분노를 크게 자극 시켰고, 결국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다.

     

   “하, 하하, 쌍년이…….”

     

   아벨라를 떠올린 시그린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생각해보면 아서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함께 있었을 뿐.

     

   시그린은 아벨라와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연적에 가까웠다.

     

   아벨라는 시그린이 보기에도 과할 정도로 아서에게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서가 자신 말고 다른 여자를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서가 그녀를 설득해서 망정이지 원래였다면 시그린은 그녀와 피를 튀기며 싸워 아서를 쟁취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참에 나를 지우기로 한 거야.’

     

   시그린이 보기에 아벨라의 이번 제국 침공은 분명 제국의 멸망 말고도 다른 목적이 있었다.

     

   거기에 자기 죽음은 덤이었겠지.

   황궁에 시선이 쏠림은 물론 운이 좋으면 황제를 죽일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 사실을 알게 되자 허망한 웃음이 시그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이용당하는 삶이라니.

   참으로 의미 없는 삶이었다.

     

   저벅-

     

   그 순간 그녀의 귀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시그린이 희미하게 눈을 뜨며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검푸른 머리카락이 보였다.

     

   우뢰성의 검날을 바닥에 질질 끌며 걸어오는 크라슈의 입에서 새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사신의 모습과 같았다.

     

   그제야 시그린은 자기 죽음이 코앞에 왔음을 인지했다.

     

   멸망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자신인데.

   여기서 죽는다고?

     

   안 된다.

   그건 안 된다.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

   시그린 에파니아가 죽는다니 그런 세상이 어디 있어.

     

   저벅-

     

   “힉, 익!”

     

   크라슈의 눈에 담긴 살기를 엿본 시그린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다 타버린 팔과 다리로 모래로 변한 바닥을 밀어내며 그녀가 도망쳤다.

     

   하지만 크라슈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일정한 발걸음으로 쫓을 뿐이었다.

     

   시그린은 바닥을 끌며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팔과 다리는 이미 제 수명을 다했다.

     

   퍼석-

     

   다 타버린 팔이 부서지며 시그린이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얼굴에 잿가루를 잔뜩 묻힌 꼴로 부서진 팔을 이용해 가까스로 밀며 시그린이 서둘러 고개를 들자.

     

   우뚝-

     

   크라슈의 발소리가 멈췄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음영이 진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크라슈가 서 있었다.

     

   무섭다.

   그가 당장이라도 자기 목을 칠 것 같아 무서웠다.

     

   그러니 시그린은 자신의 자존심도 내려놓고 비굴하게 그의 앞에 몸을 조아렸다.

     

   “미, 미안해. 내가, 내가 잘못했어. 나, 나는 그냥 무서워서 그냥 그래서…….”

     

   크라슈는 시그린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분.

     

   “그때 네가 뭐랬더라. 시그린.”

     

   크라슈는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자기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시그린이 흠칫한 표정으로 크라슈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아, 그래. ‘훔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쓰레기가!’라고 했었나. 참.”

     

   크라슈는 겨우 기억이 떠올랐다는 듯 시그린을 향해 말하였다.

   그러자 시그린의 얼굴이 서서히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가 회귀했을 거라는 생각은 이미 진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크라슈가 그 생각에 확신을 더해주자 시그린은 더더욱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시그린은 과거 그에게 저지른 수많은 짓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점의 회차에서는 그나마 괜찮았다.

     

   크라슈와 시그린은 엮일지언정 서로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수준은 많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저번 회차에서만큼은 시그린조차 떠올리면 머리가 새하얗게 될 정도로 시그린은 크라슈를 집요하게 괴롭혔었다.

     

   “그, 그때는 내가 어떻게 됐나 봐! 아, 마, 맞아! 스트레스나 그런 거 때문이었어! 난 황제가 돼야 하니까. 뭐든 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정말로, 정말이야 정말이니까! 크라슈, 너를 어떻게 하려던 게 아니라.”

   “푸흣, 하, 하하하.”

     

   그러자 크라슈가 대뜸 웃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시그린은 크라슈를 따라 애써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하, 아니, 아니야. 시그린, 내가 하려는 말은 그게 아니라고.”

     

   크라슈는 천천히 웃음을 멈추더니 시그린에게 고했다.

     

   “난 네 말대로 훔치는 것밖에 모르는 쓰레기야. 그게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었어.”

     

   시그린이 멍하니 크라슈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었다.

     

   지금, 이 순간 그걸 왜 인정하는 걸까.

     

   시그린이 점점 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인정했다는 사실이 더 무서워졌다.

     

   “그러니까 난 네가 말해준 쓰레기답게 네 모든 걸 빼앗기로 결심했다.”

   “뭐, 뭐어?”

     

   시그린이 입을 벌렸다.

   그녀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나한테 뭘.”

   “우선 네가 지닌 비기 검광.”

     

   시그린이 몸을 우뚝 굳혔다.

     

   “나는 네 검광을 빼앗을 거다.”

     

   크라슈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아귀에서 흘러나온 블랙 후드의 빛이 시그린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시그린은 자기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그만!”

     

   그녀가 비명을 내지르며 몸서리쳤다.

   하지만 크라슈는 블랙후드를 사용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콱!

     

   곧이어 크라슈가 주먹을 틀어쥐자 블랙 후드의 빛이 사라졌다.

   시그린은 그 광경을 보고, 자신의 속이 텅 빈 감각을 느꼈다.

     

   빼앗겼다.

   정말로 검광이 빼앗긴 것이다.

     

   “안, 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시그린이 부서진 팔로 크라슈의 다리에 매달렸다.

     

   “내 거야! 검광은 내 거라고! 미안해. 돌려줘. 제발 돌려줘! 돌려주세요!”

     

   그러고는 횡설수설하며 크라슈에게 빌었다.

   그런 시그린을 내려다보며 크라슈는 자세를 낮춰 자상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그린,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러면 어떡하냐.”

     

   시그린이 눈물 자국이 가득한 눈으로 크라슈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직 네게 뺏어야 할 게 잔뜩 있어.”

   “뭐가, 뭐를.”

   “황녀라는 직위.”

     

   시그린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이 크라슈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크라슈는 시그린과 마주하며 환한 미소를 그렸다.

     

   “이번 일이 끝마쳤을 때, 너는 황녀가 아닌 범죄자가 되어 있을 거다. 거기에 더해 나는 네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제국마저 빼앗을 생각이다.”

   “제, 제국을, 네가, 네가 무슨, 수로!”

   “수는 너도 알고 있잖아? 네가 아서를 황제로 만들었던 거.”

     

   시그린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아서를 황제로 만들던 모습을 옆에서 크라슈는 줄곧 지켜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게 아니었다.

     

   가능하다.

   자신과 함께 회귀한 크라슈라면 가능하다.

     

   충분히 가능하다 못해 넘쳤다.

     

   “끄윽, 그으, 흐으.”

     

   시그린의 눈동자가 불타버리듯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그에게 뺏길 것이란 걸 알고, 그녀는 완전히 공포심에 빠졌다.

     

   “싫어. 난, 나는 시그린 에파니아, 제국의 3황녀예요. 황녀인데.”

     

   철컥-

     

   그 순간 시그린의 목에 강철로 된 족쇄가 채워졌다.

   그 족쇄는 메리 때와 똑같은 효과가 새겨진 황가의 족쇄였다.

     

   크라슈가 시즐리에게 받아 일부러 챙겨온 물건이다.

     

   그녀는 앞으로 황가의 어떠한 명령에도 불응할 수 없다.

   어차피 그녀는 앞으로 불릴 일도 없을 거다.

     

   황족이 반역했다는 것은 황가에도 반드시 숨기고 싶은 일이다.

   그러니 이번 일은 익시온의 짓이라 부치고, 시그린은 영원히 지하 감옥 깊숙한 곳에 갇히겠지.

     

   크라슈가 앞으로 시그린을 마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백룡왕의 껍데기마저 강제로 불사 질러 버린 시그린은 오늘이 지나면 일반인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검광까지 빼앗겼으니.

   이제 시그린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에게 지독한 고독감과 처절한 지옥이 눈앞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시그린, 지하 감옥에서 내가 네가 평생토록 이루는 걸 빼앗기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봐둬.”

     

   시그린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는 완전히 풀려 버린 눈동자로 입을 헤 벌린 채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조르르륵-

     

   어딘가 물이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라슈가 아래를 보자 시그린의 치마가 노란색 물로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린 그녀가 육체의 조절도 하지 못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지독한 인연이었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크라슈는 그만큼 함께 전장을 굴렀음에도 시그린과 단 한 번도 마음을 튼 적이 없었다.

   시그린만큼이나 크라슈도 그녀에게 마음을 내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라슈는 그런 시그린을 잠시 바라보곤, 몸을 돌렸다.

     

   “마지막까지 너다워서 참 다행이다.”

     

   검광은 빼앗았다.

   이로써 시그린과 지긋지긋한 인연도 끝이었다.

     

   저 멀리 백룡 기사단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뒷수습과 함께 정리하기 위함이겠지.

     

   서걱!

     

   그 순간이었다.

     

   크라슈는 들려온 소리와 함께 고개를 뒤로 돌리자 거기에는 하늘 높이 날아가는 시그린의 머리가 있었다.

     

   쿵-

     

   시그린의 머리가 바닥에 닿으며 데구루루 굴러갔다.

     

   그 광경을 본 크라슈가 눈을 크게 뜬 순간.

   저 멀리 시란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크라슈를 힐끗 보더니 말을 고했다.

     

   “시그린 에파니아는 간악한 익시온의 무리와 맞서다 장렬히 전사했다.”

     

   크라슈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황가에는 어떤 오명도 남기지 않겠다는 겁니까.”

     

   시그린이 망가졌다는 것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이미 퍼져 있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곧 황가의 핏줄을 욕보이는 일.

     

   그러니 이참에 시그린을 죽여 황가를 위해 써먹겠다는 속셈이었다.

   정말 황가답다면 황가다운 처우였다.

     

   “황제 폐하께서 공께 큰 상을 하사할 것이다. 앞으로도 제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시기를 폐하께서는 바라고 있으시다.”

     

   그건 시즐리의 이야기겠지.

     

   크라슈는 아주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제국과 척질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제국은 방파제로서 필요했다.

   익시온을 포함해 수많은 세계 침식종들은 가장 인구가 많이 모인 곳을 노릴 테니까.

     

   저 멀리 굴러간 시그린의 목을 수습하는 기사들이 보였다.

   머리를 감싸 들어 올려진 시그린의 눈은 죽은 뒤에도 멍하니 풀려 있었다.

     

   멸망을 피해 회귀까지 하며 오늘날까지 살아온 황녀치고는.

   참, 허무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영웅은 두 명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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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Thief Who Steals Overpowered Skills

I Became A Thief Who Steals Overpowered Skills

Became a Munchkin skill thief meonchikin seukil dodug-i doeeossda 먼치킨 스킬 도둑이 되었다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used to think that my stealing skill only worked on what was worthless to a person.

But just before I died, I realized that I could also steal the skills.

So I stole the 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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