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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

       “믿음이 가나?”

       

       물음을 던지자 여자가 황망히 나를 바라보았다.

       

       이해하네. 갑작스레 찾아온 기적은 쉬이 믿기 어려운 법이지.

       

       허나 그대는 알아야 할 걸세. 갑작스레 찾아온 것은 그만큼이나 간단히 떠나버린다는 것을.

       

       빠르게 결정을 내리게. 내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저를 저주하기 위해 저를 치료하겠다고요?”

       “그렇지.”

       

       답하니 여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복잡하고도 기괴한 웃음이었다.

       

       “정말 제가 평생 후회할거라 생각하시나요? 당신을 잊지 못하리라 보시나요?”

       “지금 되묻는다는 것이 그 증거겠지.”

       

       안 그런가? 자신의 구원밖에 생각하지 않는 이는 도움의 손길을 앞에 두고서 망설이지 않는 법이라네.

         

       사실 후회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네. 그대에게 원한을 가진 건 이 게임의 주인공이지 내가 아니니 말일세.

         

       “당신은.”

         

       여자는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대가 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방금 내가 한 말은 이방인이기에 지껄일 수 있는 망발이었으니까.

         

       여자는 한참을 고민하고 나서야 겨우 무거운 입술을 들어 부서질 듯 자그마한 목소리를 냈다.

       

       “…믿죠. 어떻게 하면 되나요?”

       “등을 보이게.”

       

       어차피 그대가 할 일은 마땅치 않아.

       

       가만히 앉아 고통을 견디고 있으면 있으면 족하다.

       

       창가의 달빛을 가린 천을 적당히 찢은 후 여자의 입에다 물렸다. 혹여 발악을 하다 제 혀를 물고 죽어버리면 안 되니 말이다.

       

       여자는 잠깐 망설이다 윗옷을 벗어 나신을 드러냈다.

       

       그녀의 몸은 아름다웠으나 그만큼이나 괴기했다.

       

       여자의 몸 이곳저곳에선 이미 괴사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새하얀 몸 위에 퍼져가는 보라색의 자국은 일견 누군가가 건 저주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자의 등 한가운데에 손을 올리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의 곁에서 비가 내린다면 그것은 바로 눈이 되겠군.

         

       천천히 진기를 만들어냈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류의 육신이다.

         

       내기의 운용에 신중하지 않으면 일에 차질이 생길 터.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여자의 몸 안으로 진기를 밀어 넣었다.

       

       “끄으으읍!”

       

       천을 문 여자의 입에서 비명이 울려 퍼진다.

       

       아해야. 벌써부터 발광해서는 곤란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니 말이다.

       

       이제부터 그녀의 몸 안에서 양과 음의 조화를 이루어 내야 했다.

       

       음양의 조화는 여러 무공에서 언급되는 부분이다.

       

       균형을 중시하는 무공이라면 한 번 쯤은 짚고 나가는 것이 음양이고, 다른 많은 무공에서도 음양의 조화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고 지나가지.

       

       그러니 이 음양의 조화라는 것은 무공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니 본인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이치인 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음은 구름이며 양은 태양이다.

       

       구름이 과하면 태양이 비치지 못해 작물이 자라나지 못하고, 태양이 과하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작물이 죽어가는 법이니.

       

       둘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지금 여자의 몸 안에는 먹구름만이 가득 껴서 세상을 빙하로 만들고 있으니 내가 할 일은 그저 그 먹구름을 뚫고서 대지에 햇빛을 전할 태양을 만들어 내는 것 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간신히 여자의 몸 안에 불꽃을 피워낸 후 그녀를 놓아주자 여자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기울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혼절해버렸나. 그래. 그리 가벼운 고통이 아니었겠지.

       

       일어나 뻐근한 몸을 풀었다.

       

       머리가 몽롱한 것이 정신적인 피로가 큰 모양이었다.

       

       경지 이상의 일을 기량만으로 이루어 낸 셈이니 그럴 수밖에.

       

       비틀거리며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의 단전 위에 손을 올려 보았다.

       

       그녀의 안에 흐르는 내기는 여전히 차가웠으나 그 안에는 자그마한 온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거면 충분했다.

       

       태양이 단번에 세상을 녹이진 못할 지라도, 결국에 얼음은 따스한 온기의 아래에서 물이 되어 바다로 떠내려 갈 지니.

       

       이 이후의 일은 그녀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찢어진 천 사이로 창밖을 살피니 하늘의 달이 태양을 맞이하러 가는 것이 보였다.

       

       벌써 시간이 저리 되었나.

       

       잘 움직여지지 않는 팔을 억지로 사용해 문을 열자 그 앞에 기다리고 있던 빙궁의 장로가 보였다.

       

       “이야기는 끝마치셨습니까?”

       “안으로 들어가 그대의 당주를 보필하라.”

       “예?”

       “구음절맥을 치유하기는 했으나 훼손된 혈맥과 낡아버린 몸이 돌아온 것은 아니다. 이전의 건강을 찾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야. 실력 있는 의원을 불러 천천히 치유를 하도록 하거라.”

       “그게 무슨.”

       

       헛소리인 듯 싶으냐? 그렇다면 안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거라.

       

       그대의 주인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을.

       

       예의를 차리는 것조차 잊은 채 방으로 달려가는 장로를 지나 바깥으로 나왔다.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길을 따라 나열하고 있던 무인들은 어디로 사라진 뒤였다.

       

       조용해서 좋구나.

       

       문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저 안에서 장로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임 클리어]

       [히든 엔딩 빙궁의 구원자]

       

       *

       

       “진짜로 쫓아내시다니!”

       

       VR기기를 벗은 하린은 투덜거리다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숨겨진 루트의 결말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화령이 싫다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아쉬움을 더해도 오늘 하루는 무척이나 환상적인 날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녹화했던 영상을 컴퓨터로 옮긴 그녀는 진한 만족함에 긴 숨을 내뱉었다.

       

       정말 이렇게 운이 좋아도 괜찮은 걸까. 나중에 번개라도 맞는 거 아냐?

       

       하린은 오늘 낮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밥을 먹다 화령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의 외모는 방송에 나왔던 VR아바타와 완벽하게 똑같았다. 심지어 손짓 발짓 하나에서 느껴지는 기품마저도.

       

       그랬기에 하린은 눈앞의 여성을 보자마자 그녀가 화령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젯저녁부터 밤을 새워가며 화령의 영상을 돌려보던 그녀다. 눈을 감아도 그 모습이 아른거리는 상황에서 본인이 나타났으니 어찌 몰라보겠는가.

       

       다행스럽게도 화령은 잔뜩 흥분한 하린을 너그러이 받아주었다. 여러 질문을 받아준 것은 물론이고 사인까지 해주셨으니까.

       

       참고로 화령이 해 준 사인은 이미 액자 안에 들어가 하린의 침대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걸려 있었다.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화령이 아피스에서 보자 말해준 덕택에 그토록 동경하던 화령을 아피스에서 만나게 되었고, 무공에 대한 가르침까지 얻었지.

         

       화령이 아니었다면 하린은 자신이 평생 다뤄 온 풍류권이 그토록 가볍고 변화무쌍한 무공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 있었던 일은 좀 꼴사납긴 했다.

       

       하필이면 화령님의 앞에서 눈물을 질질 짜다니.

       

       그것도 그냥 운 게 아니었다. 마트에서 부모님을 잃어버린 아이마냥 대성통곡을 했다.

       

       자신을 달래느라 허둥지둥하던 화령의 모습을 떠올린 하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싸맨 채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미쳤지. 미쳤어.

       

       나는 대체 왜 그랬던 걸까.

       

       그 때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화령님이 쫓아오는 게 너무 무서워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등 뒤에 소름이 돋는 게 느껴질 정도니까.

       

       살기인가.

       

       단순히 소설 속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몸으로 겪고 나니 도저히 웃어 넘길 수가 없었다.

       

       하린은 어렸을 적 아빠가 읽어주었던 무협지 속 주인공을 떠올렸다.

       

       뿜어내는 기운만으로 수없이 많은 잡졸들을 무릎 꿇히던 광경을.

       

       열심히 수련한다면 나도 그 광경을 재현할 수 있는 걸까. 무협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화령님을 따라갈 순 없겠지만 그 분의 발끝에라도 설 수 있는 걸까.

       

       쉽진 않겠지.

       

       하린은 복수를 플레이하던 화령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름보다는 환불시간의 수호자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첫 보스를 아이 다루듯 가지고 놀던 모습.

       

       오만하게 환불을 하지 않은 이들의 머리를 박살내는 두 번째 보스를 순살하던 모습.

       

       왜 무협게임에 특수부대가 나오냐는 불평을 듣는 세 번째 맵에서 한 번의 상처도 입지 않고 모두를 정리하던 모습.

       

       그리고 마지막.

       

       약물을 몸에 주입해 죽이지 않고서는 쓰러트릴 수 없다 평가받던 보스를 살린 채 제압해낸 모습.

       

       해석도 평가도 할 수 없었다. 하린은 그 광경을 보며 감탄을 하는 것이 한계였다.

       

       방금 녹화한 이 영상을 마이 튜브에 올린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볼까.

       

       얼마 전 데케이 마이 튜브에 올라 온 화령과 외신의 첫 번째 전투가 이틀 만에 칠십만을 넘긴 걸 보면 이 영상도 백만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하린은 이 영상을 홀로 간직하기로 결심했다.

       

       이건 나와 화령님만의 추억이었으니까.

       

       – 커피~ 톡!

       

       커피 톡 알림음이 왔다. 상대는 엔리였다.

       

       지금이면 방송을 끝내고 주무실 시간 아니신가? 어쩐 일이시지?

       

       하린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하린이 엔리와 여러 번 연락을 주고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이 사적으로 연락을 할 만큼 친한 것은 아니었다.

       

       커피 톡의 내용은 화령과 관련된 것이었다.

       

       – 오늘 화령 씨랑 게임 한 거 다 녹화하셨죠? 저한테도 보내주세요.

       

       그걸 어떻게 아셨대.

       

       그러고 보면 내가 울고 있을 때 화령님이 누구랑 통화를 하러 갔었지. 그게 엔리님이었나 보네.

       

       둘이 사적으로 친하지 않을까라는 추측이 있었는데 사실이었구나.

       

       그럼 엔리 님이 화령님한테 복수를 추천해 주신 건가.

       

       잠시 고민을 하던 하린은 엔리에게 영상을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화령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건 엔리 덕분이었으니까. 그녀에게도 이 영상을 감상할 권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강의를 받다 질질 짜는 걸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화령님이 복수를 플레이 한 부분만 보내드려야겠다.

       

       편집을 할 요량으로 프로그램을 킨 그녀는 금방 영상에 몰두했다.

       

       “하린아!”

       “우아아악!”

       

       어느새 그녀의 귓가에 다가온 하린의 아버지가 장난을 치기 전까지는.

       

       하마터면 의자 채로 넘어갈 뻔한 하린은 눈을 치켜뜨고 아버지를 노려보았으나 그녀를 어릴 적부터 봐왔던 이유룡은 그런 하린의 모습이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아빠. 노크 좀 해달라고 했잖아.”

       “난 했어. 네가 못들은 거지.”

       

       그럼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놀래키실 필요는 없을 텐데.

       

       하린이 한숨을 팩 내쉬는 동안 이유룡은 하린의 모니터 속 영상을 살폈다.

       

       “복수네. 이번이 몇 회차니?”

       “내가 한 거 아냐. 다른 사람이 한 걸 본 거지.”

       “네가?”

       

       유룡은 무협을 앞에 두면 가만있지 못하는 하린의 성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볼 시간에 차라리 제 몸을 움직일 사람이었다.

       

       그런 하린이 얌전히 구경만 했다는 건 영상 자체가 하린을 매혹시킬 정도로 뛰어났다는 거겠지.

       

       “이 영상 속 사람이 엄청나게 게임을 잘하는가 보네.”

       “응. 화령이라고 들어봤어?”

       “들어봤지. 요즘 무협 커뮤니티에서도 그 사람 때문에 난리가 났어.”

       

       유룡은 화령에 관해 이야기를 하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지금 무협을 즐기는 이 중에서 화령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그녀를 두 눈으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자신도 할 수만 있다면 꼭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고.

        

       “진짜로 무협지에서 튀어나온 천마 같은 사람이던데. 이게 그 사람이야?”

       “영상 한 번 볼래?”

       “그래. 한 번 보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길었던 에피소드가 끝났습니다. 와아!
    댓글과 추천을 남겨주시는 독자 분들 덕에 글을 쓸 힘을 얻습니다.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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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eavenly Demon is Broadcasting

The Heavenly Demon is Broadcasting

천마님 방송하신다
Status: Completed Author:
He couldn't pass his habits to others upon his return. The Heavenly Demon remained a martial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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