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3

        

         신발너머로 스치는 지면의 감촉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녀가 추천한 가게만 아니었더라도, 나를 보면서 뭔가를 눈치 챈 표정으로 ‘특별한 재능’ 같은 수상한 단어만 언급 안 했더라도 무시하거나 돌팔이라고 욕했을 것이다.

         

         하필 이 중대한 부분부터 막히다니…? 꿈이라면 제발 깼으면 좋겠다.

         임플란트 시술 불가능 판정은 헬레나와 꼼짝없이 동거하게 된 것보다도 더 뼈아픈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메트로폴리스에 사는 모든 사람이 초인인 건 당연히 아니다. 당장 길에 널린 행인이나 마주쳤던 용병들만 떠올려도 사이버웨어의 혜택만 누릴 정도의 시술만 받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을 것이다.

         

         게다가 그 선생이라는 남자의 말을 신뢰한다면 시술비용, 적합도, 증폭률의 3중 나생문을 뚫어야 초인이 되는 거니까 진짜 위험한 인물의 수는 더 적을 것이고.

         

         …시발, 그건 당연히 일반인 얘기지! 기업을 포함하면 온갖 미친 인간들이 튀어나올 게 뻔하니 전혀 안심이 안 된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려면 무려 메가 코프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고…!!

         

         “으으으…!!”

         

         “아샤… 사이버 엔지니어는 그런 개조시술을 안 받아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어.”

         

         “…….”

         

         총알도 튕겨내는 기만자가 그런 말을 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고개를 들려 옆을 바라보니 어딘가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는 우리의 히로인님이 보였다.

         

         …임플란트 문제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역시 이상하다.

         

         전투경찰이라는 직업도 그렇고, 그녀는 이렇게 친절하고 친근한 캐릭터가 아니었을 터. 자꾸 스스럼없이 웃어주고… 멋대로 스킨십까지 시도하니 미칠 것 같다.

         

         “잠깐… 헬레나! 머리는 왜 쓰다듬는 건데?!”

         

         “…언니한테 말버릇이 험하네. 로봇 매장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야하나…?”

         

         “…!!”

         

         무서운 말을 듣고 거리를 벌렸다. 팔이 붙잡힌 상태라 그래봐야 두 걸음 떨어진 게 다이지만… 바로 협박책부터 꺼내 드는 건 내가 아는 헬레나 발렌타인이 맞는데…?

         

         아니면 아직 원작 시간대가 안 돼서 성격이 조금 둥글둥글한 걸지도 모르겠다.

         ……시간대? 어?

         

         “헬레나…! 내 쪽이 언…. 아니, 연장자야!! 난 27살이라고…!”

         

         “……?”

         

         이 끝없는 압박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드디어 찾았다.

         게임 시작 당시 헬레나의 나이는 20대 중후반으로 추정.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어도 노화억제수술 같은 건 받은 적이 없다는 대화문과 그 미모를 바탕으로 유저들이 브레인스토밍한 결과물이니 거의 확실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 쪽이 나이가 더 많다…! 하마터면 용병 삼총사 때처럼 속을 뻔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어서 다행….

         

         “…시민권.”

         

         “……시민권? 시민권은 갑자기 왜?”

         

         “전에 봤을 때는 절대 27살이라고 안 적혀 있었어. 만약 아니라면… 이상한 농담에 대한 벌로 매장에 도착할 때까지 껴안고 갈 거야.”

         

         “……대체 언제 훔쳐 본거야 그건?!”

         

         “당당하게 봤는 걸.”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헬레나는 꽤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하인리히 할아버지한테 구체적인 나이를 말했던가? 그러기엔 우리 둘 다 너무 부끄럼을 많이 탔던 것 같은데…?

         

         우선 무시무시한 기세를 풍기는 헬레나에게 데이터를 전송하기 전에 먼저 슬쩍 확인했다.

         

         [ 그린 등급 시민권자, 아나스타샤 발렌타인. 사이버 엔지니어, 20세. ]

         

         “….”

         

         괘… 괜찮다. 딱히 기업 데이터베이스랑 교차검증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숫자 하나만 바꿔서 보여주면 완전범죄는 일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내 얄팍한 생각은,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의해 간파 당했다.

         

         “아.”

         

         

         

         

         대롱대롱. 땅을 딛지 못하는 슬픈 워커화가 흔들린다. 차마 주변을 직시할 용기가 없던 나는 두 손을 모아 얼굴을 가려버렸다.

         …감추기 직전에 지나가던 꼬마와 눈이 맞아서 더 화끈거린다. …야! 엄마한테 안아 달라고 하지 마!! 그런 거 아니야…!

         

         숨겨진 맛집처럼 상점가와는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임플란트 샵과는 다르게, 로봇 매장이 있는 곳은 하베스트 플래닛의 상층부, 중층부, 하층부 전체를 관통하는 초대형 쇼핑센터.

         

         그 말은 곧 통행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고… 거기서도 유별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거짓말할 거야?”

         

         “아니… 거짓말은 아닌데 진짜…!”

         

        허리춤을 휘감고 있던 헬레나의 팔이 풀어졌다. 내 억울함을 마침내 알아준 건가 싶었으나, 정신없는 와중에 가게에 도착했던 거였다.

         

         멋지고 정교한 로봇이 발길을 잡아 끄는 건 시대를 불문하고 똑같은 지 가장 접근성이 좋은 정문 근처 한 구획을 통째로 차지한 로봇 매장에는 별의별 종류와 용도의 기계병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리만 보더라도 이족보행, 사족보행은 기본. 바퀴나 무한궤도까지 달린 모델도 보였다.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한없이 진지해진 내 기색을 느낀 그녀도 별말없이 붙어와 주었다.

         

         기약 없는 부활을 약속한 주제에 나는 그 바보 멍청이의 모델명도 모른다.

         …뭐, 애당초 본인도 모르던 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마는.

         

         인간처럼 생긴 안드로이드, 위압감을 불러일으키는 드로이드 섹션을 지나쳐 안쪽에 있는 케어봇 섹션으로 진입했다.

         안내판에 붙어있는 홍보문구가 눈을 잡아 끌었다.

         

         [ 가족을 위한 이 시대 최고의 선택! 귀찮은 가사부터 환자의 안전까지 모두 책임지는 가정의 수호자를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

         

         “…풉.”

         

         저 논리대로라면 나는 무려 네 대를 구입해야 한다. 할아버지… 헬레나… 그리고 케어봇을 위한 케어봇까지. …진짜 뭐 빠지게 일해야겠네.

         

         슥 둘러만 봐도 가격들이 만만치 않았다.

         

         별다른 옵션을 포함하지 않은, 기초적인 뼈대와 부품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케어봇조차도 7천, 8천만 크레딧이 기본. 황무지에서 한 끼니에 3, 4천 크레딧만 있어도 얼추 끼니를 해결하던 걸 떠올리면 이건 도를 넘은 사치품이다.

         

         하지만… 목숨 값 치고는 분명 싸다.

         

         “아!!”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이 시야 한구석에 보였기에 재빨리 움직였다.

         비록 부착된 드로이드 팔도, 여러 개의 스캐너도, 살벌한 추가무장도 없었지만. 불타는 대지 위에서 저 머리를 내려다보던 건 내게 남은 가장 선명한 기억 중 하나.

         

         처참한 최후를 안겨줬던 추적자의 얼굴은 이미 잊어버렸어도 나에게 그 심장까지 맡긴 로봇은 잊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묘하게 눈물이 많아진 것도 다 이놈 때문이 분명하다. 그런 꼴을 보면 누구라도 트라우마가 생길 것이다.

         

         “…이걸 사고 싶어서 용병일을 했던 거야? 1억 크레딧이면… 목표액이 꽤 크네.”

         

         “……아니, 이건 목표가 아니라… 음… 일종의 출발선?”

         

         유리 전시대에 달라붙은 사이 다가온 헬레나가 의문을 표했다.

         

         나도 자존심이라면 어디 가서 지지 않는 놈이다

         생명을 빚진 채로 살아있는 지금의 나는 출발 지점에조차 제대로 도착하지 못한 상태. 그러니 그가 날 위해서 회로를 불태웠던 만큼 나 또한 그를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그럼 볼일은 이제 끝?”

         

         “……응.”

         

         오늘의 수확은 막대한 실망감과 그걸 뛰어넘은 확고부동한 결의.

         역시 두 매장을 같은 날에 방문하기를 잘 했다. 이 정도 의욕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리라…!

         

         콱!

         

         “…어?”

         

         그렇게 기분 좋게 밖으로 걸어 나가던 내 팔을 헬레나를 붙잡았다.

         

         “지금 어디 가는거야…?”

         

         “어디냐니… 그야 당연히 호텔로 돌아가야지…?”

         

         시술도 못 받은 탓에 아직 점심시간도 채 안 됐지만 그게 편안한 호텔 침대에서 쉬는 걸 막을 이유는 안 된다고 믿는다.

         환경이 자꾸 밖으로 내몰았을 뿐이지, 원래 나는 이불 바깥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신중한 사람이다.

         

         그러나 지극히 상식적인 대답을 들은 그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숨은 덤이었고.

         

         “하아…. 당장 몸에 두른 게 가진 짐의 전부라면서? 그럼 생필품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는 거 아니야?”

         

         “어… 탄약은 충분히 있는데…?”

         

         “…….”

         

         …실수했다. 아무래도 또 잘못 대답한 모양인지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좋아…. 어떤 사연 때문에 그렇게 마음도 여린 주제에 비장하게 사는지도 묻지 않을게. 하지만!”

         

         “우꺅?!”

         

         비유가 아니라, 진짜 번개 같은 속도로 몸이 잡아채졌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눈이 맞춰진 상태에서 헬레나가 물었다.

         

         “아무리 반소비주의자(Minimalist : 불필요한 물건은 사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여도 갈아입을 옷도 없이 여태 지내지는 않았지?!”

         

         “그… 그러라고 있는 게 세정용 젤 아니야…?”

         

         …만약 3초 뒤의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나는 제대로 된 22세기 가게에 와본 게 오늘이 처음이라고 더 구체적으로 증언했을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괴상한 인간 취급당할지 언정 내 정신은 보호할 수 있었을 테니까.

         

         “……아샤는 언니랑 속옷 가게부터 가야겠다.”

         

         “네…?”

         

         머리가 채 이해하기도 전에 팔이 질질 끌려간다.

         

         “! 이봐, 무슨 짓… 히익?!”

         “어억…!!”

         

         유례없는 헬레나 발렌타인의 기백에 쇼핑 센터 인파가 갈라진다. 제때 비키지 못해서 어깨빵을 당한 행인도 그녀의 모습을 막상 보면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끼기기기긱…!!

         

         최선을 다해 브레이크를 걸어도 보인다. 가까워진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본능적으로 입장을 꺼리게 만드는 디자인의 상점이.

         

         유려한 필기체에 분홍색 간판, 입구부터 요염한 자세로 서있는 마네킹까지. 심지어 기억속의 흰색 물체가 아니라 진짜 사람처럼 얼굴도 있어서 두 배로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안에서 이루어진 쇼핑 과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샤…? 이게 미니멀리스트들에게 인기있는 속옷이래.”

         “?! 이… 이런 그냥 반창고가…? 아니, 난 그런 변태가 아니야!!”

         

         “어머, 손님? 그럼 따로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편한 거…! 무조건 활동하기 편한 걸로 부탁드려요!!”

         

         “그걸 알려면, 먼저 확실하게 시착도 해야지?”

         “언니?! 잠깐…!”

         

         

         ……우리의, 그녀의 쇼핑은 점심을 거르고도 계속 이어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탈의실 공방전 묘사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남겨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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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독점 마크도 달려서 가슴도 두근두근거리는데, 살짝 어지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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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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