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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

       

         

         

         

        발터크루아를 떠나기 직전에 래빈은 린을 따로 데리고 나왔다.

         

         

        ““괜찮아?””

         

         

        둘의 목소리가 겹쳤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말이 래빈의 가슴 깊은 곳에 감미롭게 울렸다.

         

         

        “자.”

         

         

        린은 짐꾼의 낭에서 포션을 꺼내 건넸다.

         

        래빈은 포션을 손으로 밀어냈다.

         

         

        “이씨, 널 위해 써.”

         

        “날 위하고 싶으니까 네게 주는 거야.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지니까.”

         

         

        주저하며 받아들었다.

         

        유리병에 남은 그의 온기를 느끼며 래빈은 린에게 물었다.

         

         

        “바로 떠날거지?”

         

        “그래, 용사 파티에게 추적당하고 있으니 빨리 움직여야지.”

         

        “거기에 마용사 파티도 널 노리는 것 같고 말야.”

         

        “왜 날 노리는 지는 모르겠어.”

         

        “인기가 너무 많은 거 아냐?”

         

        “내가? 하하.”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내는 마른 웃음소리가 서글펐다.

         

        그녀가 아는 린은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서 풍부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래빈.”

         

        “뭐든 말만 해, 이씨.”

         

        “오늘 안에 용사 파티 일부가 발터크루아로 올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녀는 분명히 그 안에 껴있을 거야.”

         

        “그 녀석이야 늘 앞장서서 움직이는 스타일이니 당연하겠지.”

         

        “우리가 즈라문 군도로 갈 거라고 말 좀 전해줘.”

         

        “…녀석들한테 네 행선지를 알리겠다고?”

         

         

        필요한 일이었다.

         

        즈라문 군도에 있는 마용사는 절대로 루시 혼자 감당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린이라는 핸디캡을 가진 채로 맞서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원래라면 발터크루아 암시장에서 각종 아이템이나 강화를 할 수 있었지만 하필 라이벌로 환술사 아도라가 나타나버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발터크루아에 잠입해 밑작업을 했는지 암시장 일대 자체가 아도라의 환술이었으니 모든 능력치 강화 이벤트가 없던 게 되어버린 셈이었다.

         

         

        “노림수가 있는 거지?”

         

        “맞아.”

         

        “설명해서 날 납득시킬 시간은 부족하고.”

         

        “그렇지.”

         

        “알았어. 그것만 전해주면 돼?”

         

        “하나 더 있어.

         

        “뭔데?”

         

        “교국에, 그리고 교단에 신앙심이 깊고 지식 있는 사제와 교인들을 파악해줘.”

         

         

        도적 길드의 수장인 그녀에게만 할 수 있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아르실의 소원과도 관련이 있었다.

         

         

        “맡겨만 두라고.”

         

        “고마워, 래빈.”

         

         

        전할 말과 부탁은 모두 얘기했다.

         

        이제 지체할 틈이 없었다.

         

        린은 몸을 돌려 루시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려했다.

         

        멀어져 간다.

         

        5년을 꼬박 기다린 저 남자의 등이 점점 그녀에게서 거리를 둔다.

         

        이젠 애가 아니니까 억지를 부릴 수는 없어.

         

        래빈은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가 한걸음 옮길 때마다 철렁하는 이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이씨!”

         

         

        결국, 그를 부르며 달려나갔다.

         

        뒤도는 그의 품에 자신을 내던졌다.

         

        반사적으로 안아주며 린은 당황했다.

         

         

        “래빈?”

         

        “가지 마….”

         

         

        간절하게 그에게 호소해 본다.

         

         

        “그냥 내 곁에 있으면 안 되겠어? 나라면, 나라면 네게 상처주지 않아. 상처 준 적도 없고. 누구보다도 널 귀하게 소중하게 대할 자신 있어. 아니 나는 너와 만난 처음 그 순간부터 널…!”

         

        “래빈.”

         

         

        친절한 린은 부드러운 천조각을 꺼내 래빈의 입가를 훔쳤다.

         

        비약의 부작용으로 토해냈던 피가 묻어나왔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야.”

         

        “대체 왜? 왜 이씨가 이렇게까지 해야하는데? 다른 용사 파티 녀석들도 있잖아!”

         

        “모두에게 각자의 역할이 있어. 내 역할은 그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짐꾼일 뿐이야.”

         

        “짐은 혼자서 지는 게 아니야. 같이 나눠질 수도 있어. 너랑 같이 짐꾼이 되어 떠나도 좋아.”

         

        “네게도 역할이 있잖아. 가령 이 발터크루아를 통치한다던가.”

         

        “널 위해 준비한 도시였어. 이씨랑 함께 있을 곳으로 정한 도시였다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세상 따위, 난 너만 있으면 돼.”

         

        “래빈.”

         

         

        린은 미안함에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구하고자 하는 세상 속에는 너도 있어. 네가 살아가는 세상이잖아.”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고집을 피울 수 있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

         

        섭섭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여전히 그녀가 알던 린이었다.

         

        인형 따위가 아니라 따스한 마음을 가진 린.

         

        래빈이 울지 않기를 바랐던 린은 나름의 선물을 주기로 했다.

         

        아무리 둔감한 린이라도 래빈의 마음을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날 린이라고 불러줘.”

         

        “아….”

         

         

        래빈의 눈이 커졌다.

         

         

        “그래도 돼?”

         

        “응, 꼭 그렇게 불러줘.”

         

        “…린.”

         

        “응, 래빈.”

         

        “린, 린…!”

         

         

        다행이도 린의 선물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소중하게 되뇌이던 래빈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구정물골목 시절에는 왜 이씨라고 하고 다녔어?”

         

        “그때는 이름이 없었어. 그냥 정말 이씨였지.”

         

        “언제 이름이 생긴거야?”

         

        “아르실이 떠난 이후에.”

         

         

        이것까지 말해줘도 될까.

         

        고민하던 린은 이내 결심했다.

         

         

        “우리의 골목이 사라지기 얼마 전에 이름이 생겼지.”

         

        “누가 지어준 거야?”

         

        “맞아.”

         

        “누구?”

         

         

        린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영특한 래빈은 머리를 굴렸고 빠르게 답을 찾아냈다.

         

        린, 이 린.

         

        성은 이씨고 이름은 린.

         

        린, 왜 하필 린일까.

         

        누구 이름에서 따왔나?

         

        역사적인 인물 중에 린이라는 이름 가진 사람이 있던가?

         

        린, 린, 린, 린.

         

        대체 누구….

         

         

        “아.”

         

         

        있었다.

         

        그의 이름과 비슷한 여자 한 명이.

         

         

        “설마 리나가?”

         

         

        린은 다신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알고 싶지 않던 이유였고, 보고 싶지 않던 긍정이었다.

         

         

        “자기 이름 줄여서 만들어준 게 린이야?”

         

        “…맞아.”

         

        “그건…!”

         

         

        그 여우 같은 계집애가 이름으로 널 자신에게 종속시키려고 한 거잖아!

         

        입이 아닌 가슴으로 따져묻는다.

         

        허락해주길 바랐던 이름이 하필이면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여자가 지어준 거였다니.

         

         

        “우릴 세상에서 없애버리려고 했던 년이야.”

         

        “리나가 지어준 건 맞지만 이 이름을 가장 불러주지 않은 것도 그녀였지.”

         

         

        불린 횟수가 10번도 넘지 않았다.

         

         

        “골목이 사라진 이후로 온전히 나와 함께 한 나만의 이름이야.”

         

        “이름 바꿀 생각 없어?”

         

        “써온 세월이 있으니 간단히 바꾸기에는 좀 그래.”

         

         

        바꾼다면 언젠가 그녀 앞에 대등한 남자가 되어 나타났을 때, 그녀의 입을 통해 마지막으로 듣고서 바꾸고 싶었다.

         

        보란듯이 자신을 보여주고 미련을 완전히 털어내고 싶었다.

         

         

        “아직도 리나를 좋아해?”

         

        “아니, 전혀.”

         

         

        비록 골목을 떠난 뒤 3년 동안 정처없이 일만 하고 출세를 위해 용사 파티 짐꾼을 자원한 이유가 그녀 때문이었지만 마왕 토벌 여정을 떠나면서 그의 마음은 죽었다.

         

        그때, 그녀를 향한 감정도 죽었다.

         

        진작에 마모되어 가고 있던 감정이었다.

         

        그녀를 향한 미련은 없지만, 그녀에게 내뱉었던 말에 대한 미련은 있었다.

         

         

        “그렇다면 괜찮아.”

         

         

        래빈도 더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처럼 속 좁은 여자가 아니었다.

         

        래빈은 도적이었고 필요한 걸 약탈과 도둑질로 챙겨왔다.

         

        이번에는 좋아하는 이의 마음을 훔칠 차례였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그녀는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린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살짝 물러난 래빈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서걱

         

         

        “래빈!”

         

         

        놀랍게도 도적은 자신의 꽁지머리를 단번에 잘라냈다.

         

        얇은 고무줄에 묶인 머리칼 뭉치를 작은 주머니에 넣은 후 그에게 다소곳하게 두손으로 내밀었다.

         

         

        “부적으로 삼아줄래?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지켜줄 수 있게.”

         

         

        그리고 어디에 있든 내가 함께할 수 있게.

         

        무릇 여자라는 생물은 좋아하는 이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법이었다.

         

        그건 언제나 그와 같이 있다는 상징이자 다른 여자에게 임자가 있는 사람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자격도 없는 주제에 호시탐탐 린을 노리는 붉은 포니테일의 용사라던가.

         

        물끄러미 주머니를 바라보던 린은 쓴웃음이 아닌 미소를 지으며 받아들였다.

         

         

        “고마워, 래빈.”

         

        “고맙긴 뭘.”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 털털한 래빈이 시선을 아래로 하고 몸을 배배 꼬는 게 무척이나 낯설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그걸 들고 날 만나러 와. 꼭 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중간에 먼저 만나러 갈 수도 있어.”

         

        “그래도 조금 아깝다. 난 네 꽁지머리 좋아했는데.”

         

         

        훅치고 들어오는 린.

         

        래빈은 진심으로 린이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경쟁이 치열한데 얼굴까지 더 잘생겨 버렸으면 여자 여럿이 자기 단검에 썰려 나갔을 거라고.

         

         

        “그, 그러면! 내가 다시 꽁지머리를 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널 만나러 가도 될까?”

         

        “물론이지. 서로 위험한 곳에 있지 않다는 전제 하에 말야.”

         

        “응, 응!”

         

         

        묘한 기류가 흐르던 대화가 끝났다.

         

        어색하게 서있던 두 남녀.

         

        갈 길이 바쁜 린이 먼저 작별을 고했다.

         

         

        “그럼 래빈, 안녕히.”

         

        “안녕, 린. 꼭 몸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

         

        “너도 그 비약 마시는 일 없도록 하고. 알았지?”

         

        “알았어.”

         

         

        그가 멀어져 간다.

         

        그래도 아까와는 달리 후련한 기분으로 보낼 줄 수 있었다.

         

        점이 되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래빈은 허물어져 내리고 말았다.

         

         

        “우… 우우우우우…!”

         

         

        혹여나 들릴까봐 입을 틀어막는다.

         

        보내고 말았다.

         

        5년을 기다려온 그를, 이렇게 맥없이.

         

         

        “린…! 린…!”

         

         

        벌써부터 그립고 보고 싶었다.

         

        지금 보내버린 그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자신의 머리칼이 담긴 주머니를 린이 가졌가다는 기쁨과 감동을 그가 가버렸다는 슬픔이 짓누른다.

         

         

        “차라리 구정물골목 시절에 네게 제일 빨리 고백했다면 지금 곁에 있는 건 나였을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과거는 과거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비록 그것이 아프고 힘들지라도 지난날을 통해 현재의 자신이 있는 법.

         

        현재의 래빈은 린에게 앞날을 기약하는데 성공했다.

         

        그 앞날에 둘이 함께하는 반려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래빈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스-읍.”

         

         

        심호흡을 한다.

         

        들이쉬며 방금까지 있었던, 달콤했던 한때의 온기를 가슴 속에 품고.

         

         

        “하아.”

         

         

        다시 내쉬었을 때, 그녀의 눈빛은 다시 도적 길드의 수장이자 발터크루아의 통치자인 래빈 더 시프로 돌아가 있었다.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Abandoned Hero's Only Ally, 버림받은 용사의 유일한 아군이 되었다.
Score 6.8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saved the Warrior who used to ignore and bully me and now she is obsessed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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