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어…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몇 번째인지 모를 백장로의 탄식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탄식을 거슬려 하지는 못하겠지.
한때 잘나가던 친구가 다 쓰러져가는 폐가에서 살고 있을 줄이야.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가 이런 폐가에 몸을 뉘고 있는 것일까. 얼마 안 가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기까지 하고?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자네…어쩌다 이런…”
백장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닫은 채로 오랜 친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친구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기대감이 서렸던 얼굴과 지독하게 대조 되는 표정.
오랜 친구가 이런 꼴이 되었다는 게 현실감이 영 없는 모양이었다.
나라도 그렇겠지.
한때 잘나가던 객잔 주인이었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다 무너져가는 폐가에서 살고, 침상에서 죽어가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면 어떻게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새옹지마라는 게 이런 거구나.
나는 불쾌한 깨달음을 얻으며 조용히 다 쓰러져가는 벽에 기대어 두 친구의 해후를 지켜보았다.
“콜록…콜록…자네 왔는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된 건가? 철협도라 불리던 자네가 어찌 이런 꼴이 되었냔 말일세!”
절규 섞인 외침이 폐가를 뒤흔들었다.
고작 목소리로 그렇게 될 리가 없지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에 내공을 실었기 때문일까.
나는 피부를 간지럽히고 지나가는 내공의 울림을 흘려내고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꽤 귀찮은 사정에 휘말린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래도 일단 휘말린 이상 명 소인과의 상행 때처럼 어떻게든 풀어내면 될 일.
나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저 내가 쌓았던 업보 때문일세…”
“업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가 협행으로 구한 사람만 수십일세! 은퇴하기 전 까지만 해도 협객으로 칭송받던 자네 아닌가?”
백장로의 탄식이 분노와 슬픔으로 뒤섞여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거친 목소리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진정시켜야 할까?
저대로 놔두면 화병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나는 약간의 갈등을 품은 채로 둘의 대화를 계속 지켜보았다.
“산속에…사는…콜록…도인도…업보가…쌓이는…법이라네. 다 내…실수일세.”
“아버지! 형님이 타락한 게 아버지의 책임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야…내가…확실하게…이야기를…해두었어야…했다.”
…가족간의 사정인가.
“자네 첫째라면…문경이 아닌가? 그 애가 망나니기질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기 아버지를 해치는 패륜을 저질렀다니? 도대체 그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게야?”
“다…내 탓일세…”
“제가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마량의 이야기는 꽤 길었다. 울분에 가득 찬 목에서 튀어나온 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개판이군.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 때문에 그놈이 집을 나갔고, 어디서 무공을 배워와 자네 아버지에게 비무를 신청했단 말인가? 그 와중에 그 놈이 살수를 썼고?”
“그렇습니다…”
마량은 스스로도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형이 눈앞에 있다면 형제고 뭐고 죽이려 들 것만 같은 얼굴.
“다 내 불찰이야…불찰…솔직하게 말했어야…했는데…자존심이 뭐라고…”
반쯤 실성한 노인은 계속해서 자책만을 거듭했다.
그런데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은 이유는 뭘까. 현대라면 모를까, 이런 세상에 자기 아들이 구음절맥같은 체질이 아닌 이상 무공을 전수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텐데.
당장 객잔이라는 게 무림인들이 사고를 자주 치니 무공 배운다고 나쁠 것도 없고, 오히려 고명한 고수라도 될 수 있다면 자랑거리가 될 테니.
그리고 자신의 무공을 이어받을 제자가 생긴다면 이왕 아들인 쪽이 더 좋지 않을까.
“아버지, 그냥 형님에게 무공을 가르쳐주지 그랬습니까…”
“…안돼…칠절도는…안돼…!”
“아버지!”
“일단 침상에 눕히게나! 아니지, 당장 의원에게 데려가야겠네! 빨리 업거라!”
“아저씨, 너무 끔찍한 이야기에요…”
“세상 살다 보면 이런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려오지. 익숙해져라. 잔인한 말이지만 비극은 뜬금없이 찾아오는 거야.”
비극에 예고 따위는 없다.
누군가는 업보를 산더미처럼 쌓아도 평화롭게 살다 가지만, 누군가는 작은 업보가 커다란 눈덩이가 되어 불시에 덮쳐오는 것이 현실이니까.
안타깝게도 아들의 등에 업힌 노인은 예고 없는 비극의 희생자가 된 모양이었다.
“하진아, 너희들은 객잔을 잡아서 쉬고 있거라. 오늘은 나도 친구의 곁을 지키고 싶구나.”
“…예. 장로님.”
하진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빨리 자리를 잡자꾸나.”
그의 말에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
“아저씨…잘 잤어요오?”
“글쎼…”
솔직히 말하면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편하게 자는 건 못 하지. 당장 나한테 눈을 깜빡거리며 묻는 혜령이도 피곤해 보이고.
마음 같아선 더 자라고 하고 싶지만, 지금도 충분히 늦은 시간.
평소보다 반각은 더 늦은 시간에 일어났으니 지금은 백장로님을 기다릴 때였다.
그나저나 몸져누운 홍가객잔 주인이 왜 무공을 가르치지 않은 걸까. 아들인 마량도 그 이유를 몰라서 답답해하는 것 같고.
무공을 가르치지 않은 이유가 핵심일 것 같고.
어떤 이유라도 그게 아들에게 말하지 않을 이유가 되는 걸까. 제자도 아니고 아들인데.
그런 의문을 품고 혜령과 함께 객잔 1층으로 내려간다. 나머지는 운기조식을 하느라 시간이 좀 걸리니 나와 혜령만이 먼저 식사하기로 했으니까.
우리는 한산한 객잔 구석에 앉아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일단 백장로님한테 객잔 위치를 알려뒀으니까 금방 오시겠죠?”
“잘 모르겠는데. 당장 벗의 몸 상태가 오늘내일하는 상태이니 말이야. 아무래도…우리가 찾아가는 게 빠를 거다.”
어젯밤에 무광이가 의원에 다녀왔으니 위치를 알 터. 다 찾아가기엔 상태가 심각하니 일부는 객잔에 남고 두셋 정도만 찾아가는 게 나을 듯했다.
애초에 우리가 이 일에 끼어드는 게 맞는지조차 모르겠고.
이런 민감한 가족 사정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정말 껄끄러운 일이었으니까. 내가 빙의 전 한국인이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아저씨, 우리 어두운 소리 말고 아침 먹어요 아침!”
“그래. 그래야지…”
우리가 궁상 떨어봐야 뭐하나.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아들이 전해준 반쪽짜리 사정으로 무언가를 판단할 순 없는 법이다.
“점소이! 여기 소면과 만두 2인분만 주게!”
“예이! 소면 두 그릇에 만두 2인분!”
살짝 목이 잠긴 점소이의 목소리와 주방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 나는 그들이 요리를 만들기 위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배경 삼아 찻잔을 손끝으로 돌려가며 시간을 죽였다.
평소라면 열심히 재잘댔을 혜령이도 말이 없는 걸 보니 어제 일이 충격이었던 걸까.
“주문하신 소면 두 그릇에 만두 2인분 나왔습니다!”
“고맙다.”
“아, 아닙니다!”
점소이는 내가 색목인이라서 그런지 대답을 살짝 절더니, 부리나케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외국인이랑 대화하는 건 어렵다 이건가.
나 중원어로 말하고 있는데.
“잘 먹겠습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아침을 먹어치우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것 말곤 할 것도 없었으니까.
얼마 안 가 우리들이 앉은 식탁에 해남검문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고 조용한 식사가 끝나고, 침묵 속에서 하진이 입을 열었다.
“저와 위 대협 둘이서 다녀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하자.”
“대사형, 저도…”
“하경아, 우리가 없는 동안 네가 사제들을 잘 봐주고 있거라.”
“예.”
하경이 알겠다는 듯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위 대협. 갑시다.”
별일 없었으면 좋을 텐데.
나는 그의 말에 수긍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오겠다.”
“잘 다녀오세요. 저는 방안에서 쉬고 있을게요.”
혜령이 평소보다 낮은 톤으로 일정을 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은 그만 신경 써도 되겠지?
일이 연속으로 터질라고. 나는 약간의 걱정을 담은 채로 하진과 함께 의원으로 향헀다.
——————
“하진아. 왔느냐.”
“예, 장로님.”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백장로님의 얼굴은 눈에 띄게 수척해 보였다. 하룻밤 사이에 마음고생을 얼마나 한 걸까.
“어르신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구나.”
최악의 소식이네. 나는 그의 옆에서 넋이 나간 채로 앉아있는 마량을 쳐다보았다. 그도 상태가 영 좋지 않은 게, 잘못하면 아버지의 뒤를 따라갈 것 같았다.
“혹시 뭔가 더 들은 이야기는 없습니까?”
“모든 게 다 자기 잘못이라는 말을 반복하기만 했단다.”
답답해 미칠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을 해준 백장로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의 장례는 치뤄주고 가고 싶구나. 너희들은 먼저 가거라.”
“아닙니다. 어차피 여유롭게 왔으니 장사를 지내는 정도는 저희도 가능할 겁니다. 한때 협객으로 유명하셨던 철협도 대협을 후배로서 보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어 힘을 보탰다.
어차피 원작이 제대로 시작하려면 최소 몇 달은 걸린다.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금 늦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
“너희는 돌아가서 쉬고 있거라. 나는 좀 더 친구의 곁을 지키고 싶으니…”
“예. 장로님도 조금이라도 몸을 챙기십시오.”
“나는 괜찮으니 가보게.”
우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의원을 걸어 나왔다.
후, 답답해.
그러니까…이럴 땐 치고 나가야지.
“하진 소협.”
“예, 위 대협.”
“혹시 이곳에도 거지들이 있나?”
“세상천지에 거지가 없는 곳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세상에 넘치는 게 거지들이니까.
“여기 거지들은 어떻게 사는지 한번 구경이나 해보러 가자.”
하진은 내 말에 굳게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도 갑자기 이런 일이 터질 줄은…
그럼 다음편에서 만나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