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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

       *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등 뒤엔 마차. 사태가 해결될 때 까지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눈 앞엔 수많은 엘프들. 흉흉한 무기를 뽑아 들고 으르렁 거리는.

         

         도망칠 곳은 높디높은 하늘. 떨어지면 그대로 아작이 나 버리는.

         

         

         “캬, 죽기 딱 좋은 날이구만.”

         

         

         유진은 울적한 얼굴로 농담을 뱉었다. 그는 방패와 검을 들어 올리며 자세를 다잡더니, 대뜸 유리를 앞으로 툭 밀쳤다.

         

         

         “어…?”

         “가라, 유리 프란크! 얀스크 대학 기사학부 수석!”

         “어어…?”

         

         

         유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앞으로 한 걸음 앞서 나갔다.

         

         

         “저, 음. 제가 전위긴 한데요. 그게, 저 혼자? 진짜로요?”

         “난 21세기에서 와서 싸우는 걸 해본 적이 없어!”

         “난 일러스트레이터였다구요!!”

         “넌 기사학부잖아!”

         “당신도 무기 들었잖아!”

         “이건 호신용이야!”

         

         

         두 사람이 빽빽거리기 시작하자 주위를 포위한 엘프들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듣자하니 학생들 같은데 여긴 어떻게? 그리고 왜?

         

         게다가 무기까지 챙겨들고 기습한 주제에 서로 싸우라고 등을 떠밀어…?

         

         

         “저거 어쩝니까?”

         “인간 귀족들이 놀러 나온 모양인데, 적당히 상대해 줘라. 죽이진 말고.”

         

         

         대학 학생이면 기본적으로 귀족들이다. 살인적인 학비를 감당해야 하니까. 그러므로 이들을 포획하면 크라실로프 왕정과 다소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할 수 있을 터.

         

         갑판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승무원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기를 들어 올렸다.

         

         다행히 상대는 싸울 의지도, 경험도 없어 보이는 어린 인간들.

         

         무기를 든 두 침입자의 뒤에서, 후드를 뒤집어 쓴 키 큰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들었다.

         

         

         “멍청하긴. 전열 하나에 후열 둘이면 파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게임이란 걸 안 해 보셨나?”

         

         

         오스왈드는 손을 휘저어 주문을 얽었다. 보라색 마력이 꿈틀거리며 그의 손짓에 따라 기이한 도형을 직조했다.

         

         [용맹 부여]. 하급 주문이었지만, 그는 경험상 알고 있었다. 유진이란 녀석에겐 정신계열 마법 면역이 없다는 것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21세기에서 막 넘어온 빙의자들이 ‘의지’로 이겨내야 하는 정신계열 마법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키이잉—!

         

         “오엌.”

         

         

         주문이 걸린 유진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뭐, 뭐 했어요?”

         “용기를 조금 불어넣어 줬습니다. 제가 지원할 테니 앞에서 시간을 끄세요. 그, 이반 씨가 올 때까지.”

         “어어… 네에. 저, 유진 씨?”

         

         

         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네? 괜찮으세요?”

         “예브게니다.”

         “…네?”

         “내 이름은 예브게니 노비코프 카람진이다.”

         

         

         유진은 칼을 쥔 손으로 작게 성호를 긋고는, 검신에 입술을 맞추며 속삭였다.

         

         

         “주께서 오늘 우리의 전투를 굽어 살피시기를.”

         “저기, 오스왈드 씨? 주문을 잘못 건 거 같은데요?”

         “그럴 리가. [용맹 부여] 맞았는데…?”

         

         

         당혹한 빙의자들의 대화를 무시한 채, 유진은 고요히 눈을 떴다.

         

         굳건한 의지가 타오르는 푸른 눈을 빛내며, 그는 칼을 높게 치켜 들었다.

         

         

         “주의 영광을 찬미하라. 정의로 미덕을 바로세워 이 땅에 평강을 가져오시는 분이시니라.”

         “어…음….”

         “사제 클래스에 검사 클래스를 섞은 상태에서 용기가 들어가니까 뭔가 충돌이 일어난 건가?”

         “굉장… 히 굉장하네요. 저한텐 그런 거 쓰지 마세요. 알아서 해볼 테니까.”

         

         

         자의식을 잃어버린 걸까? 유리는 공포에 부들부들 떨었다.

         

         게임 설정에 빙의한 채로 자아를 잃어버리고 완전히 RP(롤플레잉)에 심취하면 저렇게 된다고 치자.

         

         그럼 능욕물 아카데미 야겜에서 롤플레잉에 심취한다면 그녀 자신의 자아는 대체 어떤 모습일까.

         

         그러느니, 차라리 칼을 들고 싸우는 편이 낫다. 다행히 유리는 검술의 재능이 뛰어났다. 기사학부 수석인 만큼.

         

         

         “이교도들이여!! 우리 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으라!! 경배하라, 찬미하라!!”

         

         

         유진은 버럭 소리치며 뛰어나가서 대뜸 검을 휘둘렀다. 콰앙! 거친 폭음과 함께 새하얀 빛이 그의 검신에서 타오르며 폭발했다.

         

         

         “[신성한 강타]…!”

         “저 멍청이. 차라리 치유 스킬을 배웠어야지.”

         

         

         유리와 오스왈드는 앞서 뛰는 유진을 따라가며 투덜거렸다.

         

         세 빙의자는 갑판 위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것에 성공했다. 모두, 이반의 계획대로였다.

         

         

        *

         

         

         경고등이 점멸하는 어두운 함내 복도를 걸으며 이반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위잉, 위잉.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사이렌 사이로 들려오는 자그마한 소리를 하나하나 도해하며.

         

         좁은 실내 공간을 울리는 반복적인 소음은, 소음의 발신원을 구분할 수 있다면 반향정위(反響定位)의 지표로 사용할 수 있다.

         

         엘프들만큼 예리하진 못하지만, 충분히 훈련된 요원의 청각은 음파의 메아리가 사물에 부딪치며 잔류하는 시차를 통해 대상을 특정할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지금 이반은 복도의 코너를 돌기 전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타앙—!

         

         

         복도에서 몸을 드러내는 것과 거의 동시에 격발. 상대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황급히 몸을 틀어 사선을 빗겨갔다.

         

         사선 감지가 있군.

         

         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끼를 뽑아 들었다.

         

         

         “누구냐!”

         

         

         질문이 틀렸다. 이 녀석들의 훈련 상태를 알 수 있는 지표였다.

         

         사격을 받은 이상 상대를 무력화 한 이후에 질문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원칙이며, 상대가 명백한 적의를 지니고 있는 이상 상대의 정체를 묻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질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반은 대답하는 대신 몸을 날렸다. 어리숙한 엘프 승무원은 잘못된 질문의 대가를 받아야 했다.

         

         

        -후웅

        -콰앙!

         

         

         “크헉!”

         

         

         도끼가 공중에서 빙글 돌아 엘프의 목을 후려쳤다. 깨끗한 궤적을 그리며 일어난 강타. 엘프는 컥, 숨 넘어가는 소릴 내지르며 벽에 틀어 박혔다.

         

         동시에 권총을 들어 황급히 다가오는 녀석에게 겨눈다. 조준도 하지 않고, 격발.

         

         

        -타앙—!!

         

         “이 놈!!”

         

         

         당연하게도 피한다. 사선 감지를 지닌 녀석이다. 하지만 놈이 사선을 피해 몸을 트는 그 찰나의 순간, 그 짧은 시간이 필요했다.

         

         놈이 다시 몸을 돌렸을 때, 이반은 어느새 그의 턱 밑에 도끼를 후려 갈기고 있었다.

         

         

        -콰앙—!!

         

         

         턱이 돌아간 채로 고스란히 허물어지는 엘프는 신음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날이 아닌 등으로 상대한 탓에 도끼라기보단 짧은 둔기로 후려친 모양이 되었지만, 어쨌건 죽지만 않으면 그만 아니겠는가.

         

         이반은 턱뼈가 부서진 엘프를 발로 툭 밀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위이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사이렌이 시끄럽게 복도를 울렸다.

         

         빨간 경고등이 윙윙 울리는 시끄러운 복도 사이로, 이반은 눈을 감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위잉, 위잉. 복도의 구석구석에 난반사하는 음파의 시차를 계산하며.

         

         

        *

         

         

         칼레온 군도의 ‘볼프스탈’급 공중 전함, ‘보일의 영광’ 호의 함장 오네스트는 함장실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보고는 분명 ‘신원미상의 학생들이 급습을 시도했으며 무력화 시도중입니다.’ 였다.

         

         하필이면 알렉산드르 왕세자의 사절과 밀약을 준비하던 찰나에 일어난 습격인지라 신경이 예민해지긴 했지만, 딱 그 정도에 불과했다.

         

         애초에 대학 위에 선박을 정박 시킨 것이 잘못 아니겠는가.

         

         저 나잇대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라면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어떻게, 부양 마법이라도 써서 침투를 시도해볼 법했다.

         

         그 나이엔 한창 용기나 담력 따위를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이 평범한 일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왜 추가 보고가 없지?”

         

         

         듣자하니 어린 학생 셋이란다.

         

         얀스크 대학의 모든 학생들은 귀족이거나 최소한 유력한 중인 가문이므로, 그는 생포를 명령했다.

         

         제 아무리 엘프가 오만하다 한들 타국의 영토에서 타국의 학생을 사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학생 셋이다. 배움이 깊어 봐야 한계가 있는 법이고, 그 나이치고 대담하다 한들 ‘학생 수준’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생포를 성공했든, 아니면 용케도 갑판 밑으로 탈출했든지. 습격 이후 10분이 지난 지금이라면 무언가 추가 보고라도 있어야 한단 소리다.

         

         

         “거기 아무도 없나? 위병! 갑판 상황 확인하고 와!”

         

         

         그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가 직접 갑판으로 향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갑판 위엔 알렉산드르 왕세자의 사절이 도착해 있을 것 아닌가. 함장이 직접 마중을 나가는 것은 위신에 좋지 않고, 국가 간의 밀약에 앞선 이 상황에서 얕보이면 그걸로 끝이다.

         

         

         “아무도 없나? 다들 뭣들 하는 거야! 저 개 같은 사이렌도 좀 끄고! 시끄러워서 살 수가 있나!”

         

         

         마침내 오네스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성마른 태도로 함장실을 가로질러서 격문을 벌컥 열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이잉!

         

         

         시끄러운 사이렌이 들리는 복도엔, 그러나 어떤 조명도 보이지 않았다.

         

         고장 났나? 하는 생각이 짧게 스쳤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고장 났을 리가 없다. 이건, 습격이다.

         

         

         “칫!”

         

         

         그는 인상을 와락 구기며 재빨리 문 뒤에 몸을 숨겼다. 벽에 장식해둔 의장검을 꺼내 뽑아 들고, 그는 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

         

         

         “엘리자베타가 보냈나!”

         “….”

         “제기랄, 거기 있는 거 아니까 대답해! 학생 습격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양동작전을 걸겠답시고 학생까지 이용해!?”

         

         

         갑판 위의 대치가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아직 상황이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제 아무리 대단한 병력을 끌고왔다 한들 고작 셋으로는 승무원 전원을 10분 안에 몰살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일단 버텨 본다. 알렉산드르 왕세자가 상황을 파악하면 군사 투입을 고려할 수도 있도록.

         

         오네스트나 알렉산드르나, 둘 모두 이 시점에서 엘리자베타에게 들통나는 것을 원치 않을 테니까.

         

         그때, 목소리가 울렸다.

         

         

         “궁내장관이 분명 말했을 텐데.”

         “뭐…?”

         

         

         오네스트는 복도 끝에서 낮게 들리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거리는, 아마도 함장실 앞 격실 복도의 끝. 저 정도 거리라면 중대 규모 파괴 주문을 던져도 피해가 함장실까지 닿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얽었다. 마력이 새파랗게 타오르며 손 끝에 엮여 나갔다.

         

         그때.

         

         

        -부우우우웅—!!

         

         

         대기를 찢어 발기는 소음과 함께.

         

         

        -콰아아아앙!!

         

         

         열린 문 사이를 스쳐 지나간 ‘무언가’가 함장실 원탁을 내려 찍었다.

         

         주문? 파괴 마법인가? 오네스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폭발형 마법이라면 방어 주문을 걸 준비까지 하면서.

         

         

         “…도끼…?”

         

         

         밧줄이 걸린 도끼 한 자루가 함장실 원탁을 반쯤 박살낸 채로 처박혀 있었다.

         

         오네스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무꾼이란 말이… 진짜였다고?”

         

         

         어떤 악의 섞인 은유도 없는 담백한 표현이었을 줄이야.

         

         오네스트는 허탈하게 웃었다.

         

         피잉, 하며 도끼에 걸린 밧줄이 바짝 당겨졌다.

         

         

        -콰직!

         

         

         도끼가 밧줄을 따라 뽑혀 나오며, 그 탄성으로 빙글빙글 돌아 오네스트의 다리를 후려쳤다.

         

         

         “크흑!”

         

         

         다행히 날이 아닌 등으로 맞았다. 오네스트는 발목이 꺾인 채로 바닥을 굴러 도끼의 범위를 벗어났다.

         

         도끼는 복도 끝 어둠 사이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오네스트가 칼을 지팡이 삼아 부들거리며 일어설 때, 어둠 속에서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새파란 안광이 그림자 사이에 일렁였다.

         

         곧, 덥수룩한 수염이.

         

         힘줄이 뱀처럼 도드라진 팔과, 그 손 끝에 단단히 감겨 있는 도끼날이.

         

         그를 겨누고 있는 권총까지.

         

         

         “협상을 하지.”

         “그건 내가 들은 명령이 아니군.”

         

         

        -타앙—!

         

         

         불 꺼진 복도 사이에서 권총 끝에 불똥이 튀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반향정위 : 특정 공간 내에서 반사되는 음파의 메아리를 들으며 대상과 자신의 방향과 거리를 가늠하는 기술. 박쥐의 초음파와 비슷한 기술인데 사람도 제한적으로 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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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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