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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

       우리가 학생회에 올 때 클레어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차라리 분위기가 나았을지 모르겠다.

       

        황녀 둘, 그리고 왕녀 하나. 누가 봐도 이상할 일 없는 사이이지 않은가. 한 나라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의 자식들. 그중 하나에게 피가 섞이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누가 거기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사이에 ‘남작 영애’ 하나가 섞여 있으니 그 서열이 이상해지는 거다.

       

        사실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은 아니긴 했다. 만약 이 중에서 감이 좋은 사람이 하나 있거나, 고위 귀족의 자식으로 여기저기 다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안에 있는 남작 영애와 그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알았을 테니까.

       

        예를 들자면—

       

        “아, 황녀님들, 그리고 왕녀님.”

       

        지금 들어 온 학생회장처럼 말이다.

       

        휘황찬란한 금발을 말끔하게 잘라서 넘긴 이 부티 나게 생긴 귀족은, 이 제국에서 황실 다음으로 고귀하다는 ‘그란체스터’ 공작가. 실제로 황실 사람들을 제외하자면 황실의 피가 가장 많이 흐르는 공작가이기도 하다.

       

        황실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당연히 황제와 앨리스였다. 그렇다고 황실에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중앙 권력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서 한적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고, 그냥 적당한 명예직을 받아 고위 공무원처럼 사는 사람도 있었다.

       

        전부 몸을 사리는 이들이다.

       

        공작가, 백작가 중에서는 눈치 없이 이런저런 일을 벌이다가 황제의 살생부에 이름이 적히거나, 아니면 아예 암살당하거나 하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오히려 황실의 일원이기에 몸을 사릴 줄 안다.

       

        실제로 게임에서도 종종 엑스트라로 황실 사람이 나왔는데, 보통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머리가 빈 것 같은 대사를 하지만 가끔 몸을 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도 모르게 털어놓고 비밀로 해달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게 털어놓지 않을 거다. 게임이니까 상황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런 대사를 택했을 뿐이지.

       

        “그리고…… 그레이스 가의 여러분.”

       

        나와 앨리스, 샤를로트에게 인사했던 것처럼, 학생회장은 웃으면서 예의 바르게 그레이스 가 아이들에게도 공평하게 인사를 건넸다.

       

        사실 지금까지 조용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레이스 가 애들의 이름이나 성격을 잘 모르니 아예 말을 안 걸고 있었던 거다. 황녀가 직접 데리고 온 애들이니 겉보기보다 훨씬 권력이 있을지도 모르고.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귀족사회에서는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것이 실례이기도 했고…… 아무튼 학생회실이 조용했던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잠시 업무가 있어서요.”

       

        저 말은 진짜일 가능성이 크다. 학생회장은 실제로도 바쁘니까. 초대장을 보냈더라도 우리가 몇 시에 오게 될지는 알 수 없고.

       

        “아닙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어요.”

       

        “으음.”

       

        앨리스가 대답하는 것을 듣고, 학생회장은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 곧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같은 학생에게 동등하게 대하겠다는 앨리스가 존댓말을 쓴 건, 아마 상대를 ‘선배로’ 존중했기 때문이겠지.

       

        학생회장의 눈이 앨리스에게 머물렀다가, 그다음에는 샤를로트를 향하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향했다. 그 순서대로 시선이 머문 시간이 짧았다. 클레어와 레오에게는…… 시선을 보냈다기보다는 스쳐 지나갔다는 표현이 오히려 맞겠고.

       

        “초대장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찻잎은 입에 맞으신지요?”

       

        “살롱에서 온 잎인가요? 황실에서 쓰는 것과 같은 것을 쓰다니, 학생회에서도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이군요.”

       

        나는 전혀 모르겠던데.

       

        시간을 아무리 돌려서 다시 먹어도, 음식을 먹기만 하고 원산지를 구분하는 것은 내 기준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차라리 이야기를 다 듣고 다시 넘어온다면 또 몰라도.

       

        내가 조용한 성격을 연기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굳이 피곤하게 시간 써가면서 정보를 드러내야 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저희 영지에서 가지고 온 잎입니다.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학생회장의 시선이 드디어 그레이스 가의 자식들에게 길게 머물렀다.

       

        “혹, 황녀님과 다른 분들의 관계가 어떤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클레어와 레오의 시선까지 앨리스에게 쏠렸다.

       

        그러게. 우리가 어떤 관계일까.

       

        친구라기에는 만난 지 아직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고,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딱히 친분을 나눈 관계는 아니다.

       

        앨리스가 그레이스 가의 두 사람을 데리고 온 것도, 그냥 샤를로트의 말을 듣고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그랬을 뿐이니까.

       

        “친구예요.”

       

        하지만 앨리스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클레어의 반짝이는 시선을 받고 조금 당황했다.

       

        어째 두 사람 이미지가 영 반대로 가는 것 같은데.

       

        …….

       

        아니, 뭐, 싫다는 건 아니고.

       

        오히려 밸런스가 맞지 않는가? 앨리스는 클레어한테 뭘 질투할 필요도 없고, 클레어는 클레어대로 앨리스에게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을 질투하지 않으니까.

       

        갈등이 시작하기도 전에 봉합된 느낌이다.

       

        게다가 내가 보기에도 좋아 보였다. 왜, 그런 팬픽도 있지 않은가. 관계를 반전시켜둔다거나, 성별을 반전시킨다거나. 여캐가 많은 이 게임에서 성 반전을 보면 각혈했겠지만, 이런 관계 반전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 그러십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학생회장은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어쩌면 앨리스와 샤를로트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했는지도 모른다. 엄격한 귀족 집안에서 귀족식 교육을 받고, 귀족같이 사교 파티에 나가며 자랐을 테니까.

       

        “그렇다면…….”

       

        학생회장은 천천히 걸어서, 학생회장의 자리로 갔다.

       

        그리고 느긋한 태도로 자리에 앉았다.

       

        “혹시 저희가 초대장을 왜 보내드렸는지 알고 계시는지요.”

       

        “학생회 가입을 권유하기 위함이 아니었나요?”

       

        “그렇습니다.”

       

        앨리스의 말에 학생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귀족 사이에서는 이렇게 직설적인 화법을 쓰는 사람을 싫어할 이유가 없다. 자기 약점을 대놓고 드러내고도 모를 사람이니까.

       

        상대가 앨리스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혹시 그럴 의사가 있으신지요?”

       

        그 말은, 여기 앉아있는 클레어와 레오도 포함해서 물어보는 것이리라. 원작에서도 레오가 얼떨결에 앨리스를 따라갔다가 가입 권유를 받아 선택지가 뜨니, 그게 조금 일찍 떴다고 생각해도 되겠다.

       

        그때는 앨리스와 학생회장이 여러모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적어도 지금 이 시점은 아니다.

       

        “학생회의 어떤 자리가 남았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어떤 자리가—”

       

        하지만, 학생회장의 그 권유는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똑똑.

       

        학생회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괜찮을까요?”

       

        학생회장이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학생회장도 한 여학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문밖에 있는 사람은, 아마도 학생회장이 미리 불러둔 사람이……

       

        ……아녔다.

       

        “오.”

       

        학생회장의 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마치 기대도 하지 못한 사람이 찾아왔다는 것처럼.

       

        초대장이 우리에게만 오지는 않았을 테니, 다른 고위 귀족이 찾아와도 이상하지는 않다.

       

        다만, 문제는,

       

        “크로우필드 양.”

       

        그래, 활짝 웃는 학생회장이 말을 건 상대가, 바로 미아 크로우필드였다는 거였다.

       

        백작가의 영애치고는 별로 관리가 잘 되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고위 귀족 중 하나이기는 한지라 안 씻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잘 관리했다면 분명 윤기가 흐를 검은 머리카락은 다소 푸석푸석했다. 머리카락 끝 중 몇가닥이 다소 꼬여있었다.

       

        그리고 그런 헤어스타일 중 가장 음침해 보이는 부분이 바로 얼굴 위로 대충 흘러내린 기나긴 앞머리였다.

       

        혹시 사다코라는 일본 공포영화에 나오는 귀신을 아는가.

       

        금방이라도 흑백 TV의 화면에서 기어 나올 것 같은 그런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만약 여기가 게임 기반이 아니라 그냥 보통 지구였다면, 분명 저 머리카락 아래에는 거의 관리되지 않은 거친 피부의 여드름투성이 얼굴이 있을 것이다. 머리카락을 아무리 잘 관리해도 기름이 나오는 법이니까.

       

        물론 저기 있는 미아 크로우필드의 머리카락 아래 있는 얼굴은 청초한 이미지의 미소녀.

       

        “……초대장을, 받았는데요…….”

       

        다소 힘없는 목소리는, 10년 넘는 세월을 넘어온 내가 들어도 바로 목소리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음울한 목소리였다. 음울해서 특색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나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렇지. 초대장은 내가 보냈다.”

       

        우리에게는 존댓말을 하던 학생회장이 바로 말을 낮췄다. 그렇다고 예절을 내다 버린 것은 아니다. 마치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 젊잖은 사장이 평사원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그런 목소리.

       

        “아, 다만…….”

       

        “괜찮아요.”

       

        곧 학생회장이 미안한 표정으로 미아에게 뭔가 말하려는데, 앨리스가 그 말을 도중에 끊었다.

       

        “여기서 같이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별로 문제는 없지 않나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학생회 가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니 같은 목적으로 방문한 미아 크로우필드도 이야기를 듣는다고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문제가 없기는 한데…….

       

        그거야 학생회장과 이야기를 듣는 사람 입장에서나 그런거고, 솔직히 나에게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

       

        어, 그러니까, 원작에서도 미아 크로우필드가 학생회에 왔던가?

       

        성적도 준수하고, 크로우필드 백작가도 몰락하지는 않았다. 가주가 사망했을 뿐, 영지는 그대로고 죄가 폭로되는 일도 없었다. 황제가 그 암살을 명령한 이유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이유였을 뿐, 정의를 위해 단죄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권력과 영지가 그대로라 미아 크로우필드 개인에 대한 가치는 더 올랐을지 모른다. 아카데미 졸업, 혹은 그 도중에 중퇴하면서 결혼하게 되면 그 비어있는 영지를 어떻게든 할 수 있을 테니까.

       

        혼자 남은 크로우필드 백작 부인을 유혹하는 법도 있기는 하겠다만, 백작 부인 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런 속이 뻔히 보이는 유혹에 쉽게 넘어갈 일은 없을거다.

       

        얼굴이 가리긴 했지만, 잘 보면 머리카락 사이로 눈이 보였다. 저쪽도 앞을 보긴 해야 하니 당연히 이쪽을 볼 때는 눈의 일부가 바깥으로 노출된다.

       

        그리고, 내가 확신하건대, 크로우필드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심지어 한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까지 했다.

       

        “…….”

       

        크로우필드의 정보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황제는 백작이 죽고 분명 남은 백작부인과 뒷거래를 했을 거다. 그 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백작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눈감아주는 대신 입 다물고 조용히 살라고.

       

        황제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려들지 말라고. 다음에 죽는 건 당신일테니까.

       

        그리고, 그런 이유로 잠자코 살게 된다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은 황제에게 큰 원한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원한은 대를 이으며 정제된다. 부모는 자식에게 상대를 증오해야 하는 이유만 가르치고, 어쩌다가 그런 약점을 잡히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크로우필드가도 그랬다면 분명 나에게 극도로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을 거다.

       

        열심히 조사했다면 황제의 아이들이라는 소문 정도는 들었을테니까.

       

        “……응?”

       

        앨리스의 시선이 미아 크로우필드와 나 사이를 오간다. 내 표정도 알아볼 정도니, 미아의 ‘행동’을 알아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거기 계신 분들은.”

       

        “음?”

       

        미아 크로우필드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학생회장은 다소 당황한 모양이었다.

       

        황녀, 왕녀에 대한 예의도 차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자기한테 인사를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거기 계신 분들도, 학생회에 참석하시는 건가요?”

       

        “…….”

       

        음침하고, 어느 부분은 다소 불분명하게 들린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가 가진 의도는 알 것 같았다.

       

        나랑 같은 부활동을 하고 싶은 건가?

       

        ……나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한 번 미아 크로우필드의 얼굴을 살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내 짐작이 맞다면, 미아 크로우필드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후원 감사합니다!

    익명으로 후원해주셨기에 독자닉네임 기능으로 인사드립니다!

    제 글을 좋아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요즘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 너무 행복합니다. 분명 처음 연재하기 시작했을 때는 크게 기대한 적 없던 글에 이렇게 갑자기 많은 분들이 선작해주시고 읽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글 쓰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망상으로 끝날 뻔한 이야기를 소설로 쓰며 완성해나가고, 그 글을 다른 분들께 보여드리고, 좋은 반응까지 받는다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죠.

    하지만 글 쓰기가 즐거운 이유는, 딱 그렇기 때문입니다.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오늘도 이렇게 글을 써서 올릴 수 있었습니다.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이 이 글에 큰 기여를 해주고 계신 셈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글을 쓰며 즐거움을 느끼듯,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모두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Ilham Senjaya님, 후원 감사합니다!

    공모전은… 사실 연재 시작할 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지만 입상을 할 가능성을 따지는 것도 조금 그랬고, 무엇보다… 음, 사실 지금까지 살아봤더니 누군가와 경쟁하는 것이 너무 물리더라구요. 일하고 시험보고 면허를 따고… 인생 다 살았다고 하기에는 아직 한참 젊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만큼 살고 나니 순위를 신경쓰고 입상을 고민하는 것이 너무 피곤했습니다.

    너무 늙은이같은 소리였나요? 그래도 공모전을 하건, 하지 않건, 저는 언제나 진심으로 글을 쓰겠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독자 여러분을 심사의원으로 두었다는 마음가짐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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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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