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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

     

    내 사무실이 무슨 한정메뉴 파는 장인 맛집도 아니고, 밀물처럼 기사들이 몰려들어 하나같이 뭐라고 아우성을 쳤다.

     

    “선생님, 도저히 전염병이 안 낫습니다. 꼭 좀 도와주십쇼.”

    “저희 부대는 벌써 훈련이 닷새째 중단됐습니다. 단장님께 깨지게 생겼어요.”

     

    다들 하나같이 태도가 급했다.

    몇 명은 발음이 뭉개지거나 열이 후끈해서 감기를 앓고 있다고도 알 수 있었다.

     

    “입부터 막아 입부터. 내 반경 10미터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상대 안 해줘.”

     

    “저희도 사정이 급합니다. 좀 들어보십쇼. 어제는 아픈 기사가 반수를 넘어서 막사 청소도 못 하고….”

     

    유달리 말이 많은 한 명이 있었다.

    브루노가 저벅저벅 그의 앞을 가로막아 말없이 섰다.

     

    “뒤로.”

     

    “아니, 선생님께 이야기를….”

     

    “뒤로.”

     

    커다란 덩치의 브루노가 위에서 내려다보니 기사들이 풀이 죽어서는 사무실 입구까지 물러났다.

     

    타냐와 교대근무하는 기간인데, 이럴 땐 브루노가 꽤 쓸만하다.

     

    “우선 하나 묻자. 아스피린 나한테서 받았다고 누구에게 들었어?”

     

    “오오, 아스피린이라고 하는군요!”

     

    “약이라고 하던가? 신성력을 굳혀서 만든 물건입니까?”

     

    “저는 거트 중대장에게 들었습니다요.”

     

    나와 계약서를 쓴 중대장이다.

     

    이 입 가벼운 놈. 더 제대로 단속해둘 걸 그랬다.

     

    ‘뭐, 그래도.’

     

    의학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가능한 널리 퍼지고 많은 이가 혜택을 보는 게 올바른 존재의의다.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의 정신도 그에 부합한다.

     

    제 발로 약을 찾으러 온 이들이 많아진 건 꽤 긍정적인 사건이었다.

     

    의학을 퍼트리면 내 업적도 자연히 높아지고, 굿엔딩의 발생 확률도 높아질 테니 좋은 기회다.

     

    “좋아, 우선 알아둘 것. 아스피린은 지금 유행하는 전염병의 증상을 완화하는 약재야. 의학이라는 학문 덕에 탄생할 수 있었고… 어우, 입 아파.”

     

    언제까지 물어보는 사람마다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간이 나면 책이라도 한 권 써야겠다.

     

    아니지, 직접 쓰기도 귀찮으니 조수를 시켜야겠어.

     

    아, 내겐 조수나 간호사가 없었지.

     

    다른 주치의들은 파벌로 몇십 명씩 우르르 데리고 다니던데 난 여태 왜 이래?

     

    왜 제약부터 마스크 제작까지 온갖 잡일을 직접 하고 있냔 말이야.

     

    조만간 모집 공고부터 내야겠다.

     

    “우선 결론부터. 아스피린은 안 넘겨.”

     

    “예에?!”

    “어째서입니까! 내의원 아닙니까!”

     

    기사들이 내 대답을 예상 못했는지 충격받아 숨을 헉 내뱉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고가 없다.

     

    비무대회가 끝나기까지 약 일주일. 그때까지 월광궁 인원과 2연대 1중대 분량을 만들기에도 시간이 빠듯하다.

     

    하지만 굳이 밑천을 드러낼 이유도 없다.

    안 그래도 파벌이 무시당하고 있는데 얕보일 거리를 제공할 순 없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갑옷 휘장을 보니 넌 1연대, 1황녀파고. 3연대, 1황자파. 약 받아가고 쓱 입 닦을 녀석들에게 내가 뭐하러 친절을 베풀겠어?”

     

    “아니, 저희가 언제 입을 닦는다고….”

     

    “급한 사정이야 이해하지만 순서가 있지, 업무 시간에 사무실에 막 쳐들어오면 쓰나. 그리고 마땅한 대가를 가져와야 도리 아니겠어?”

     

    “그, 그건 죄송했습니다.”

     

    기사들이 당황하며 내 눈치를 보았다.

     

    몸살에 걸려 못 움직이는 사람도 있으니 마음이 급한 건 이해가 간다.

     

    “약은 못 넘겨도 몇 가지 대처법은 알려줄게. 치유주문보다 훨씬 효과가 좋을 거야.”

     

    “정말입니까?!”

     

    “그래. 내가 쓰고 있는 거 보이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그게 뭔가 싶긴 했습니다.”

    “새로 유행하는 패션인줄로만 알았는데요.”

    “좀 잘생겨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나는 서랍에서 예비 마스크를 하나 꺼내 구조를 보여주었다.

     

    “비슷하게 생겨도 좋으니 천으로 만들어서 입과 코를 막고 생활해. 그러면 이미 가진 병이 낫진 않아도 적어도 병이 옮겨지는 일은 줄어들게 돼. 구체적으로는 9할 정도.”

     

    “겨우 그런 물건으로요?”

    “월광궁 기사들은 다 하고 다니던데, 몸이 아주 쌩쌩하더군.”

    “저 천이 비결이었나! 선생님, 감사합니다!”

     

    기사들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우르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다음으로 황실 의상실이라도 습격할 생각이겠지. 행동양식이 단순한 이들이다.

     

    “다루기 쉽네.”

     

    그나마 황실에서 유일하게 별생각 없이 정직한 이들 같기도 하다.

     

    정치는 잘 모르겠고 밥 잘 주는 주군을 따라간다는 느낌이랄까.

     

    타냐도 그런 체질이다.

     

    월광궁 기사들이 아셀라를 닮아 특이한 편이다. 정치적 후각이 민감하다.

     

    아니, 월광궁은 그냥 황실 전체에서 모든 점이 튄다.

     

    “근데 브루노, 괜찮겠지?”

     

    “뭐가요?”

     

    “어차피 감기는 자연히 낫는 방법밖에 없으니 완치에는 1주일 넘게 걸릴 테고, 지금부터 마스크를 쓴다고 비무대회 때 다른 파벌 기사들이 쌩쌩하진 않을 거야.”

     

    “음, 쌩쌩하면 좋죠.”

     

    “안 좋아. 내가 다른 파벌을 도와줘서 우리가 깨지기라도 하면 나는 아셀라에게 마법으로 고문당하고 말 거야.”

     

    “선생님께 그런 취미가 있으셨습니까?”

     

    브루노는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내게 질문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대답 고맙다. 재확인했어.”

     

    참, 기사들이란.

     

     

     

    ***

     

     

     

    그런데, 다음 날 사무실에 또 외부 파벌 인사가 습격해왔다.

     

    “의사 고트베르크! 새로 왔다던 아셀라의 주치의가 너구나!”

     

    황실에 와서 반말을 들을 일은 흔치 않았기에 상당히 신선했다.

     

    심지어 아셀라를 막 불러도 되는 위치다.

    그녀의 지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존안을 뵙습니다, 황녀님.”

     

    불경죄는 큰일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아셀라와 같은 금발이지만 사치스런 비취를 연상케 하는 청록색 눈을 가진, 트인 어깨의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다.

     

    “어머, 사교계에서 소문난 망나니라더니 각 제대로 잡혀있네? 다 시기한 애들이 퍼트린 헛소문이었구나?”

     

    제국의 제2 황녀, 라우가 폰 뷔르템펠트가 꺄르르 웃으며 내 팔을 쓰다듬었다.

     

    거리감 없는 황녀님이네.

     

    “아셀라가 무직백수 약혼남을 일자리까지 줘가며 황실로 데려왔다길래 나는 영락없이 기둥서방인 줄 알았지 뭐니. 그런데 얘, 너 기사들이 좀 먹어준다더라?”

     

    가십도 좋아하고, 말투 경박하고.

     

    아셀라에게 들었던 내용이나 간접적으로 찾아본 정보에서 생각한 모습과 판박이였다.

     

    라우가는 전체에서는 넷째, 2황자 게오르크와 모친이 같은 2황녀다.

     

    하지만 보다시피 승계권자이지만 차기 황제와는 사실상 거리가 먼 모습이다.

     

    “하하, 황녀님께서 제 이름을 알아주신다니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기사들과는 친하게 지낼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이야기가 황녀님이 계신 금서궁까지 흘러갔군요.”

     

    “내 안방 이름도 알고, 황가 여자들 체크도 벌써 끝냈어? 곱상하게 생겨서는. 그리 기술이 좋으니 아셀라가 홀딱 넘어갔겠지.”

     

    나를 놀리듯 실실대는 라우가였다.

     

    “오해가 있으시군요. 제가 자랑할 기술은 놈팡질이 아니라 의학과 치료기술입니다.”

     

    “얘도, 진지하게 받기는. 농담이야.”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대는 라우가.

     

    이 가벼운 황녀님은 머릿속이 온통 화사한 핑크빛인 모양이다.

    나와 아셀라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한 정략혼 관계라고 모르지도 않을 텐데.

     

    “황궁을 화사히 빛내주시는 황녀님께서는 어쩐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직접 행차하셨는지요.”

     

    라우가가 슥, 내 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째 경박한 손놀림이 마음에 안 들어서 턱을 빼니 그녀가 뱁새눈을 했다.

     

    기분이 상했나? 설마 불경죄라고 시비 걸진 않겠지.

     

    “어떻게 이럴 땐 아셀라랑 반응이 똑같니.”

     

    누구라도 똑같지 않나. 초면인 사람이 냅다 손을 들이미는데 누가 가만히 있겠냐.

     

    “다른 건 아니고 이 마스크라는 물건 말이야, 네가 만들었다며?”

     

    “그렇습니다.”

     

    “지나가다 월광궁 기사들을 봤는데 다들 이걸 쓰고 있더라구. 아셀라에게 물어보려니까 매몰차게 쫓아냈어. 너무하지 않니? 황실에서 가장 나이도 가까운 자매가 난데 그리도 붙임성이 없다니까.”

     

    왜 마스크 얘기하다가 그리로 새는데.

    라우가와 대화하는 건 굉장히 정신력을 많이 소비했다. 흐름의 갈피를 못 잡겠다.

     

    “마스크에는 왜 관심이 가셨습니까?”

     

    “아, 그렇지. 이거 나도 만들어주라.”

     

    그 용건이었구나.

     

    “마스크는 아셀라 황녀님께 진상한 헌상품입니다. 제 마음대로 배포했다간 황녀님께 불경한 일이 됩니다.”

     

    “에이, 그건 내가 잘 얘기해 놓을게.”

     

    “전염병의 감염 방지 용도로는 모양만 비슷하게 만들어 사용해도 효과가 있습니다. 저도 주치의 업무가 있으니 라우가 황녀님의 기사나 시종 전원이 쓸 양은 못 만들고….”

     

    “응? 아냐, 아냐. 내 것만 만들어 줘.”

     

    라우가가 내 예상 밖의 말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황녀님 것만요?”

     

    “응응. 왜, 아셀라가 볼살이 꽤 통통한 편이잖니. 근데 마스크를 쓰니까 턱선이 갸름해 보이는 게 세상에! 내 동생이지만 커서 절세미녀가 될 상이라고 느낌이 오더라.”

     

    라우가는 꽤 눈썰미가 좋았다.

    마스크의 순기능은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외모 버프다.

     

    라우가는 소위 마기꾼이 되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때, 그 정도는 만들 수 있지?”

     

    “흠, 1인분이라면 가능은 합니다만.”

     

    그렇다고 굳이 만들어줄 이유도 없다.

    대가가 있다면 모를까.

     

    내가 슬쩍 눈치를 보이니 라우가도 바로 이해했다. 사교파티에 자주 참가한 경험은 많겠지.

     

    “욕심도 많아라. 후작가의 자제인 데다 주치의니 금화는 필요 없을 테고.”

     

    아뇨, 필요한데요.

     

    돈은 늘 다다익선이다.

     

    아버지는 보기 드문 청렴결백한 귀족이랄까. 재산도 전부 공금으로 돌리기 때문에 고트베르크 후작가의 사유재산은 어마어마한 정도는 아니다.

     

    무엇보다 내가 사적으로 쓸 수도 없는 재산이고 말이지.

     

    지금의 난 월급쟁이에 불과하다.

     

    “황실의 비보라도 주면 그 손으로 바느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니?”

     

    매력적인 눈빛을 흘리는 라우가.

     

    파티의 귀족들이야 그 눈빛에 넘어가 온갖 선물을 바쳤을지 몰라도 나에겐 안 통한다.

     

    어쨌든 아셀라의 언니다.

    풍기는 분위기가 닮았기 때문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눈빛에 불과하다.

     

    당면한 과제는 비무대회에서 어느 정도 우리 파벌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파벌의 평가가 올라야 황실에서 내 대우도 한결 나아질 테니 말이다.

     

    사무실도 이사 가고.

     

    “황녀님께선 비무대회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계실 듯한데, 어떤지요?”

     

    “비무대회? 꽃놀이 날 열리는 검과 마법 제전이었던가. 구경은 재밌어.”

     

    “황녀님의 기사단도 출전하잖습니까.”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 다 같이 청춘의 땀도 흘리고 얼마나 좋아.”

     

    “어차피 활약하지 않으셔도 된다면, 다른 황자나 황녀 파벌과 붙게 되었을 때 몇 가지 전략 사용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떤 전략인데?”

     

    라우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트롤링이라고 하는 전략입니다만.”

     

    적은 적으로 잡는 게 효율적이다.

     

    판을 깨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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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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