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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

       이쯤에서 이스메라는 어떤 망상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황성에서는 디안을 차기교장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스메라는 이런저런 루트로 황성에서 키르린을 갈아치울 후임자를 물색한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다.

       

       황제 때문에 몇 년을 참아 왔지만 내년에 첫 기수 졸업생이 나오는 시점이라 안보실장이 더는 참고 넘어갈 수 없었다는 분위기.

       

       그래서 이스메라는 내심 교감을 겸하는 자신이 교장이 되리라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대륙의 영웅 라이너스 경의 이름이 오르내리더니 정작 온 것은 생전 처음 보는 갈색 더벅머리 불량한 인간남자.

       

       오자마자 황성의 압박에도 요지부동이던 키르린의 아카데미 운영방식을 박살내고 대뜸 상점가를 올리고 어디선가 야생마들을 끌고 왔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는 황성의 적극적인 지지가 동반.

       

       게다가 지금은 고등석사 출신 이스메라와 날고 기는 이론학과 교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계획은 비교도 안 되는 완벽한 안을 가져온 것이다.

       

       처음에 이스메라는 디안이 어디 높으신 분들과 연줄이 있어 여차저차 수석교수가 된, 키르린과 비슷한 부류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제 보니 저 인간, 실력이 굉장하다.

       

       이스메라가 생각하던 그런 인간이 아니야. 분명… 분명 뭔가 있다.

       

       어느 각도로 보나 디안은 황성에서 준비한 차기 교장감.

       

       키르린이 황제의 비호를 받고 있으니 즉각 교체에 부담이 있어 일단 수석교수로 배정해 놓고 천천히 아카데미를 장악하게 할 속셈인가.

       

       그렇다면 나는…?

       

       디안과 키르린을 보는 이스메라의 눈에서 당장이라도 드래곤의 브레스가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이스메라의 타들어 가는 속과는 전혀 달리 키르린은 싱글벙글해서 디안의 계획안을 기본양식으로 채택했다.

       

       디안의 계획에 전투학과의 세부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전반적인 사안들도 정립이 되어 있기에 거기에 이론학과 분야만 포함하면 거진 완료.

       

       행정실장을 불러서 계획 추진에 필요한 예산 등의 소요를 논의하고 당장 오후부터 준비하는 것으로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이스메라 교수님. 의무소에 가보세요. 신성치료를 받으면 기력이 회복됩니다.”

       

       교장실을 나오며 디안이 말하자 이스메라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일과중에 교수가 의무소에 출입하는 건 부적절하지요.”

       “그러지 말고 같이 가시죠. 저도 어제 늦게 잤더니 피곤해서 버프 좀 받아야겠습니다.”

       “버프요? 그게 뭔가요? 앗! 이거 놓으세요!!”

       

       디안이 다짜고짜 손목을 잡아 끌자 이스메라가 기겁하면서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디안의 악력이 어찌나 강한지 이스메라는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끌려 가야만 했다.

       

       “제 발로 갈 테니까 놔주세요! 손목이 아파요!”

       “아, 죄송죄송.”

       

       디안이 손을 풀어주자 이스메라는 손목을 주무르면서 디안을 노려본 후 성큼성큼 의무소로 걸어갔다.

       

       원래라면 감정의 가면을 썼겠지만 지금 이스메라는 철야를 해서 굉장히 피곤한 데다 황성이 디안을 교장으로 밀고 있다는 추측에 정신적으로도 내몰린 상황.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본성이 나와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스메라에 대해 모조리 파악한 디안은 놀라지 않고 웃으며 이스메라의 뒤를 따라갔다.

       

       “안녕하세요, 사제님. 저희 신성치료 좀 해주십쇼.”

       “어디를 다치셨습니까.”

       

       의무소에 들어가니 마야 사제가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다.

       

       “다친 건 아니고요. 둘 다 밤을 꼴딱 새서 피로회복을 좀 할 수 있을까 해서요.”

       

       디안의 말에 이스메라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디안은 자정 조금 넘겨서 집에 갔고 꼬박 밤을 지새운 건 이스메라 혼자니까.

       

       “여기에 누우십시오. 몸에 신성력을 불어 넣어 드리겠습니다.”

       

       디안과 이스메라가 진료실의 침상을 하나씩 잡고 눕자 마야 사제가 차례로 신성력을 발현했다.

       

       황금빛의 신성력은 특유의 따뜻함으로 온몸을 감쌌고 그러자 디안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몰려왔다.

       

       마야 사제가 내게 등을 돌리고 반대쪽의 이스메라에게 신성력을 쓰는 동안 디안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디안. 디안!”

       

       누군가 흔들어 깨우기에 눈을 떠보니 시커먼 게 디안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교장님?”

       “한참 찾았잖아. 여기서 뭐하고 있어?”

       “신성치료를 받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저를 왜 찾아요?”

       “케이크 먹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제서야 디안은 아까 농담으로 키르린에게 계획을 잘 만들었으니 케이크를 쏘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얼른 일어나. 케이크 사줄게.”

       “교장님께서 드시고 싶으신 거죠?”

       “일어나라고!”

       

       키르린은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디안의 팔을 마구 잡아 끌었다. 사실인가 보다.

       

       “아, 저기 이스메라 교수는… 같이 갈래?”

       “저는 우유가 들어간 케이크는 먹지 않습니다.”

       “미안.”

       

       평소와 다른 날카로운 반응에 키르린이 민망해 하면서 디안을 돌아봤다.

       

       “이스메라 교수는 채식주의예요. 우리끼리 갑시다.”

       “그래….”

       

       키르린과 디안이 의무소를 나간 후.

       

       혼자 남은 이스메라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침상을 마구 내리쳤다.

       

       젠장할, 젠장할, 젠장할!!

       

       “의무소에서는 정숙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사제님….”

       

       실습중에 찰과상을 입은 학생을 치료한 마야 사제는 스르륵 책상으로 돌아가 환자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전투수석 디안 교수가 이론수석인 엘프 이스메라 교수와 함께 의무소를 방문].

       

       [두 사람 모두 밤을 지새워 굉장히 피로한 탓에 신성치료를 받으러 왔다고 함].

       

       [치료를 받던 도중 다크엘프 키르린 교장이 찾아와 디안 교수에게 케이크를 사주겠다며 디저트 카페로 데려감].

       

       [그 모습을 본 이스메라 교수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하며 침상을 수 회에 걸쳐 내리치는 격한 행동을 함].

       

       

       # # # # #

       

       

       의무소를 나온 우리는 곧바로 디저트 카페로 갔다.

       

       “교장님. 오셨습니까! 오늘도 한 판 맞으시죠?”

       “네. 맞아요.”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주인이 키르린을 알아보고 살갑게 맞이했다.

       

       “교장님. 또 누가 오기로 한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둘만 먹는 건데?”

       “그런데 왜 한 판이나 시켜요? 남은 거 싸가시려고요?”

       

       그러자 키르린이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귀를 팔랑거렸다.

       

       “우리 둘이 먹으려면 한 판은 있어야 하지 않아?”

       “그런가요…? 하긴 뭐, 저희 다 점심을 안 먹었으니 한 판 먹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아까 카페 주인이 ‘늘 드시던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던데….

       

       “잘 먹겠습니다!”

       

       테이블에 케이크 한 판을 올리자 키르린이 포크를 집어 들었다.

       

       “으음! 정말 너무 맛있어!”

       

       케이크를 크게 한입 먹은 키르린의 두 귀가 토끼처럼 쫑긋 섰다. 귀엽다.

       

       “아까 보니까 이스메라 교수, 화가 많이 난 것 같던데.”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휴지로 닦으며 키르린이 입을 열었다.

       

       “내가 속도 없이 케이크를 먹자고 해서 그런 걸까? 샐러드를 먹으러 가자고 했으면 안 그랬을 텐데.”

       

       잘못 짚어도 제대로 잘못 짚은 키르린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거 때문은 아니고요. 교장님이 제가 만든 계획을 채택해서 그러는 겁니다.”

       “아, 그런 거였을까? 하긴… 이스메라 교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했겠지.”

       “속으로 저와 전투학과를 얕잡아 봤는데 막상 까보니까 그게 아니었던 거죠.”

       “맞아. 이스메라 교수는 순혈엘프에 고등석사니까. 아마 이스메라 눈에는 나도 형편없는 교장일 거야.”

       “아마 그럴 겁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키르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스메라 교수는 교장을 하고 싶어 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정치적인 면에서요.”

       “그렇지….”

       

       지금까지 2황녀가 키르린을 해임시키지 못한 것은 황제 때문.

       

       그래서 비장의 카드로 라이너스를 꺼냈고 그게 안 되자 차선책으로 나를 내세웠다.

       

       그런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자 결국 어쩔 수 없이 나를 교수로 집어 넣은 것.

       

       지금 키르린은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철밥그릇이 된 상황이고 이스메라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2황녀는 굳이 용사나 은둔한 나 대신 가까이에 있는 이스메라를 곧바로 추천했겠지.

       

       이스메라의 스펙은 황제의 고집을 꺾기에는 너무나 미미하다.

       

       “이스메라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워…. 만약 이스메라가 아니었다면 나는 버티지 못했을 거야.”

       “그건 인정합니다.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이스메라 교수는 정말 열심히 하고 있지요.”

       

       키르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나는 어쩌다 이렇게 어중간하게 되어 버린 걸까….”

       “이럴 때에는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 봐….”

       

       의기소침해진 키르린은 귀를 축 늘어뜨린 채 케이크를 와구와구 먹었다.

       

       

       # # # # #

       

       

       아카데미의 최종계획이 만들어지며 특기생 선발 준비에 속도가 붙었다.

       

       기숙사 한 개 동을 빼서 지원자들이 선발기간 동안 지낼 숙소로 만들고 식당부터 목욕탕 등의 편의시설까지 준비했다.

       

       교수부에서는 시험장과 배점표를 최종 점검했고 키르린은 여기저기 영지와 도시들에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내용인즉, ‘아카데미에서 능력 있는 인재들을 선발중이니 영주님과 시장님들께서는 귀 지방과 도시에 그러한 인물이 있다면 적극 추천해주시기 바랍니다’.

       

       선발계획을 동봉한 서신이 오렌디의 마법으로 방방곳곳으로 뿌려졌다.

       

       이 와중에 나이틀리가 한번 찾아 왔었는데 너무 바빠서 미안하지만 선발이 끝나고 다시 보자고 양해를 구했다.

       

       굉장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이틀리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해하며 물러났다.

       

       그리고 라이너스에게서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아기가 태어났다며 한 달 정도 지난 후에 집에 초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현생에서도 갓난아기는 면역력이 약해 얼마간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지.

       

       편지와 함께 온 상자를 뜯어 보니 영롱한 빛을 내는 술병이 지푸라기에 싸여 있었다.

       

       “하하, 이 자식.”

       

       아르망드 브리냑. 어마어마하게 비싼 술로 저번에 브룬스웰에 찾아올 때 선물로 들고왔던 것이다.

       

       이런 것을 두 병이나 아무렇지 않게 선물하다니, 제국에서 도대체 이 녀석한테 월급을 얼마나 많이 주는 거야?

       

       이건 아껴 놨다가 나중에 교수들이랑 같이 나눠 마셔야지.

       

       그렇게 일주일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드디어 특기생 선발 당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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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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