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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0

     [제국력 100년 1월 8일 새벽, 지브롤터 협곡 제2관문.]

     “수치스럽군.”

     “후작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2관문의 위에 펼쳐놓은 막사의 안, 크림슨 후작은 상의를 벗은 채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천으로 억눌렀다.

     “한 방 먹었군.”

     “그들이 비겁했던 겁니다! 여덟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지만 않았어도…!”

     “전쟁일세. 로버트 경. 자네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야.”

     침통한 표정을 짓는 로버트 경, 그리고 옆에 심각한 얼굴로 선 멘테 경을 향해 크림슨 지브롤터는 오히려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자네들이 남북을 각각 틀어막지 않았다면, 저쪽의 소드 마스터들이 롤랜드와 세빌리야, 그리고 세이레네를 다시 쑥대밭으로 만들었겠지.”

     “그건….”

     “자네들이 그곳에 있었기에 저들은 다른 판단을 내렸던 것이야. 자네들의, 그레이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제국의 소드 마스터들은 한두 명씩 짝을 지어 노스트럼을 넘어왔다.

     비행선을 타고 눈보라를 뚫고 롤랜드 후작령에 상륙하기도 했고, 오염지대의 비행마수들을 머스킷으로 쏴대며 세빌리야에 들이닥쳤고, 기어이 해협을 넘어 다시 세이레네를 점거하려고 했다.

     그 시도는 저지되었다.

     불과 한나절 정도 전, 그 인근에 있던 로버트와 멘테 두 사람이 자신들의 위치에서 바로 마스터들이 나타났다고 하는 구역으로 달려가 그들을 격퇴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죽였어야 했는데.”

     “상처를 입고 도망쳤다고 했지. 자네 덕분에 여유가 있었어. 구멍이었으니.”

     “…….”

     “전쟁일세. 경. 비겁하지만, 결국 이기면 모두 아무래도 상관없는 법이야. 그건 저들이 더 잘 알고 있고.”

     크림슨 지브롤터가 몸을 일으키며 외투를 걸쳤다.

     “영악한 자로군. 기껏 바토리 소장이 준비한 대 블러드 엘프 전용 병기들을 소용없게 만들다니.”

     “그들은…지브롤터의 황금에 약하니까요.”

     관문에 선 병사들 중 일부는 강철이 아닌 황금으로 된 무기를 든 이들도 있었다.

     

     제국의 흡혈귀들이 달려들었다면 손쉽게 베어넘길 수 있었겠지만, 협곡을 습격하여 기어이 제1 관문을 점거해버린 제국군 최정예 병사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로버트 경. 자네가 보기에 저기, 흡혈귀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아니요.”

     “저들이야말로 제국의 최정예 병사들이야. 숫자로 따져보면 대략 1만 정도 되어보이기는 하지만, 황제가 직접 통솔하고 있다는 것이 제일 크지.”

     “소드 마스터 일곱도 같이 합류했고요.”

     “그래. 무엇보다 제일 큰 문제는….”

     크림슨 지브롤터가 고개를 들었다.

     “비행선을 이용해 관문을 넘어오려고 한다는 것.”

     관문 성벽의 높이는 50m.

     비행선에 ‘비행’이라는 단어가 붙는 만큼, 그들은 최소한 100m를 훌쩍 뛰어넘는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다.

     “큰일이군. 참격으로 비행선을 하늘에서 격추시킬 수는 있어도, 그 배에서 뛰어내리는 소드 마스터들이 또 관문을 점거하려고 들면 그게 난감한데.”

     “후작님, 저희가 목숨을 걸고….”

     “아니.”

     크림슨 지브롤터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대들이 괜히 버틸 필요는 없다. 목숨을 걸고.”

     “…….”

     후방.

     지브롤터가 자랑하는 기사들 중 일부가 붕대를 칭칭 휘감고 있다.

     

     몸에 구멍이 뚫린 이도 있고, 팔 아래 부분이 사라진 이도 있고, 한 발로 걸을 수도 없어서 성벽 아래로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고 내려가 후방으로 이송된 이도 있었다.

     “괜찮다. 2관문까지 뚫렸던 적도 분명히 있었어. 그때보다 지금 더 적의 전력이 강하지만, 지브롤터는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이 성벽을 두드리러 올 때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로버트 경은 하늘을 가리켰다.

     “적이 아무런 체력과 마력 손실도 없이 하늘을 넘어오는 건 경우가 다릅니다.”

     “…그래.”

     “후작님.”

     “아무래도, 결단을 내려야 하는 건가.”

     크림슨 후작은 잠시 눈을 감았다.

     “…로버트 경.”

     “예, 후작님.”

     “그레이가 말했었다네. 지브롤터는 더 이상 협곡에 매몰될 필요가 없다고. 지브롤터가 있는 곳이 곧 지브롤터라고.”

     “그 말씀은….”

     “내가 이제 무슨 말을 할 것 같은가? 맞춰보게.”

     “……후작님.”

     로버트 경이 자세를 바로잡는다.

     “역사에는 감히, 이 아무개 로버트가 제안한 것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크림슨 지브롤터께…감히 협곡을 버리자는 제안을 했다고.”

     로버트의 말에 부상을 입은 기사들이 전부 크림슨 지브롤터를 바라본다.

     “아니.”

     크림슨 지브롤터가 피 묻은 검을 성벽에 꽂는다.

     “이건 크림슨 지브롤터의 선택이다. 역사에도 그렇게 기록되겠지.”

     “후작님…!”

     “나의 대에서 이 악습을 끊어낸다고 한다면 이게 맞아.”

     “크윽….”

     “멘테 경. 로버트 경. 두 사람에게 나의 가족을 부탁하지.”

     “…….”

     “크림슨 지브롤터가 명한다. 지브롤터 후작령에 있는 모든 영지민들은 즉시 생존에 필요한 물품만 챙겨서 왕도 톨레도, 오로솔로 향한다. 기사들은 지금 당장 영지민들을 호위하여 후방으로 향하도록.”

     기사들이 우물쭈물거린다.

     한 번 제국군과 전투를 치르고 제1 관문이 빼앗겼음에도, 그들은 좀처럼 크림슨 후작의 명령을 즉각 따르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기에.

     “가라. 어서. 영지민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이곳에 있도록 하지.”

     고오오오.

     아래로 스며든 지브롤터의 피에 성벽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2관문과 1관문 사이.

     수십 척에 이르는 비행선이 반으로 갈라진 채, 관문 사이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마치 비행선의 무덤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비행선들을 누르고 있었다.

     특이점이 있다면, 그 덩어리들은 자연적인 바위가 아니라 날카롭게 베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

     기사들이 슬쩍 협곡의 좌우를 훑는다.

     그곳에는 누군가가 칼로 마구 헤집어놓은 것처럼, 드래곤이 마구 협곡 내부를 긁은 것처럼 협곡에 선명한 칼자국이 가득했다.

     

     “내가 제국을 막겠다.”

     크림슨 지브롤터의 검이 다시금 붉게 물들었다. 

     “이 검은,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하여.”

     

     * * *

     그 시각, 제1 관문 위.

     “폐하. 파악이 끝났습니다. 현재….”

     “몇 척, 몇 명.”

     

     복부와 어깨, 허벅지에 흰 붕대를 감은 합스베르크 황제의 서슬퍼런 질문에 제복을 입은 기사가 침통한 표정으로 답한다.

     “24척이 격추되었습니다. 그 안에 타고 있던 약 1천 명의 병사들은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낙하의 충격으로 배가 부서지기도 했지만….”

     “위에서 떨어지는 낙석. 저건 협곡에 걸린 마법 같은 게 아닐텐데 말이…콜록!”

     황제가 말을 하다가 기침을 한다.

     소매로 입을 황급히 가렸으나, 그의 소매에는 검붉은 피가 짙게 묻어나왔다.

     “쓰으읍….”

     “폐하.”

     “괴물이야. 정말이지, 괴물이군. 차라리 되살아난 골드드래곤을 사냥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

     “…….”

     “자네들, 검을 들 수 있겠나?”

     황제가 몸을 일으키며 묻는다.

     황제의 앞에 모인 여섯 명의 제각기 다른 이들은 황제보다도 더 심한 부상을 입은 채, 조용히 눈을 감으며 대답하지 못했다.

     한 명, 빈 자리가 있다.

     붉게 빛나는 궤적의 참격이 흉부를 크게 스쳤고, 급히 후방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폐하. 감히, 간언드립니다.”

     “무엇인가?”

     “블러드 엘프의 힘을 사용한다면….”

     “하!”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황금에 찔리면 아무것도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릴 저주받은 족속이 되자는 말인가? 어리석은 말은 하지 말게. 지금까지 제국이 노스트럼 협곡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도 전부 흡혈귀의 힘에 의존했기 때문인 것이야. 보게.”

     황제가 좌우로 두 팔을 벌렸다.

     “오직 인간만의 힘으로 이 1관문을 넘어서고 나니, 협곡을 지키는 대단하신 황금룡께서도 특별히 노스트럼을 위한 기적을 행사하지 않으시잖나.”

     “…….”

     “황금룡은 마냥 노스트럼을 수호하는 게 아니야. 만일 다른 국가가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 노스트럼을 이겨낸다면, 그 때는 얼마든지 인정할 존재지. 추측이지만.”

     “폐하….”

     “하지만, 확실히 끌리는군. 갑자기 인간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분명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긴 하겠어.”

     “…폐하?”

     “아아, 안심하게. 흡혈귀가 되겠다는 건 아니야.”

     황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벽에 걸린 장대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지브롤터를, 크림슨을 넘어서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방식이라도 이용해야 할 것 같기는 해.”

     “폐하, 그게 무슨-”

     “황제의 명령일세.”

     황제는 장대 끝에 달린 초승달 모양의 넓은 칼날을 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나를 위해.”

     서걱.

     “그 피를 주시게.”

     푸화아악.

     한 명의 마스터가, 목이 뎅겅 날아갔다.

     “폐하…!”

     “쓰읍, 하아.”

     할짝.

     황제는 자신의 입 근처에 튄 피를 할짝이며 옅게 웃었다.

     “당황하지 말게. 내가 자네들을 거두어주었으니, 내가 다시 거두어가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폐하…!”

     “미안하네. 하지만 다 같이 해도 안 되는데, 이 방법 밖에는 없지 않은가.”

     “이…!”

     “같은 마스터끼리도.”

     푸ㅡ욱.

     “마스터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는 법.”

     “…….”

     저항하던 두 명의 마스터가 그대로 죽었다.

     남은 마스터들은 서로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저마다 각자 무기를 들며 몸을 일으켰다.

     “똑같이 부상을 당했지만, 자네들과 내가 같다고 생각하나?”

     “젠장…! 어째서, 왜?!”

     “시간을 끌면 불리해지는 건 우리라서 말이야. 적어도 이런 모습을…나의 후계자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거든.”

     황제는 키득거리며 앞으로 창을 겨눴다.

     “안심하게. 팔신장은 역사에 황제와 함께 끝까지 싸웠다고 기록될 것이야. 크림슨 지브롤터를 쓰러뜨리는데 함께 싸운 것으로 남겨주지.”

     “…이해할 수 없구만.”

     마스터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한쪽 다리가 잘린 노인이 검으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그렇게 크림슨 지브롤터를 이겨봤자, 그레이 지브롤터 그 자가 폐하를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건 자존심 문제일세, 경.”

     “자존심이라….”

     

     노인은 파르르 몸을 떨더니.

     “부디 이기시어, 뜻을 이루소서. 나의 주인이시여.”

     그대로 스스로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었다.

     “내 경의 희생을 잊지 않겠네.”

     “미, 미쳤어…!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다고…!”

     “아닐세.”

     황제가 씩 웃었다.

     “어떻게 죽느냐. 그것이 가장 중요한 법이거든.”

     “무슨…!”

     “누군가를 위해 가장 가치있게 죽어주시게. 내가 크림슨 지브롤터를 이기기 위해서, 나의 힘이 되어주시게.”

     푹.

     “내, 그대들의 희생을 잊지 않으리.”

     “폐…하….”

     “이 희생은.”

     마스터가, 하나둘 사라진다.

     “나의 승리를 위하여.”

     

     * * *

     고요한 밤.

     

     모든 이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곳.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비석과도 같은 무언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뿌직.

     회색의 비석 안에서, 검은색이 뒤섞인 황금과도 같은 액체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움직임은 사과를 갉아먹고 억지로 안에서 뛰쳐나온 벌레와도 같은, 혹은 숙주의 몸을 깨고 강제로 껍질을 뚫고 살아나오려는 기생충과도 같았다.

     찔컥.

     한 줌에도 이르지 못할 검게 물든 금색의 액체가 비석을 타고 흘러내려, 땅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1권 끄으으읏!!!

    이제 12권, 30편(331~360) 남았습니다.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3월 31일 이내로 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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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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