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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0

   프레이는 철과 나무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란을 눈에 담았다.

   

   신성을 품은 백색의 방패가 목검에 밀려나는 광경을 말이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한 루시의 방패를 무너트려 보지 못했다.

   

   저 방패를 무너트리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필사적으로 노력했음에도 말이다.

   

   이건 다른 사람들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레이가 나름대로 인정하고 있는 3왕자도 루시의 방패 앞에선 무력했고.

   

   검의 재능은 그렇다 치고 무력만 따지자면 프레이를 압도하는 2왕자도 루시의 방패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다른 이들이라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루시의 방패는 동세대의 사람들에게 있어 결코 무너지지 않는 성벽과도 같은 존재였다.

   

   허나 그 성벽은 어디까지나 아카데미 내부에서만 성벽이었을 뿐.

   

   켄트 백작의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방패에 불과했다.

   

   “버티는 것도 버거워 보이네요. 처음의 기세는 어디로 간 거죠?”

   “딱보면 몰라요?♡ 놀아주는 거잖아요♡ 이런 것도 눈치 못 채다니♡ 허~접해♡”

   “호. 그렇습니까? 그럼 속도를 좀 더 올리죠.”

   

   조금 바꾸어서 말을 하자면 루시의 방패는 아카데미 바깥은 물론이고 켄트 백작의 앞에서도 스스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단 소리였다.

   

   왕국을 넘어 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치는 검사인 그가 루시의 방패를 뚫기 위해 고민하는 것을 보라.

   

   허수를 쌓아서 방패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방패로 지킬 수 없는 부분에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 신경을 비틀고.

   

   때로는 방패 자체에 타격을 가해 루시의 움직임을 주춤거리게 하는 켄트 백작은 단순히 딸의 친구와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루시를 응대해주고 있었다.

   

   루시의 방패가 이미 아이의 세상을 넘어 어른의 세상에 발을 들여 놓았기에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검에 진중함을 담은 것이다.

   

   프레이는 루시를 이 곳에 데려올 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다.

   

   자신의 아빠가 루시를 진지하게 대해 줄 것을 알았기에 그녀를 데려왔다.

   

   프레이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무인 중 하나인 켄트 백작이 루시의 방패를 넘어설 방법을 알려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입술이 떨리고 계십니다만. 더 하시겠습니까?”

   “하?♡ 이건 엉성백작님이 너무 허접해서 웃음을 참느라 떨리는 거거든요?♡ 난 완~전 여유로운데요?♡”

   “알겠습니다. 계속 가죠.”

   

   프레이의 판단은 옳았다.

   

   켄트 백작은 다양한 방법으로 루시의 방어를 붕괴시키는 것을 보여줬으니까.

   

   아카데미에선 언제나 고고히 서 있던 루시가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보면서 프레이는 차곡차곡 정보를 쌓아나갔다.

   

   루시를 상대로 승리하기 위한 정보를 말이다.

   

   이게 치사한 행위라는 것을 프레이도 알고 있었다.

   

   당장 얼마 전의 프레이라면 왜 재미없게 그런 짓을 해야 하냐 반문했을 테니 자신이 지금 하는 행동이 어떤 건지 프레이가 알지 못 할 리가 있나.

   

   그럼에도 프레이는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루시의 모습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자신의 같잖은 자존심을 지키는 것보다 루시에게서 승리하는 것이. 그럼으로써 계속 루시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 프레이에게 중요했으니까.

   

   “아직도 더 하실 겁니까?”

   “벌써 지쳤나보네요?♡ 푸핳♡ 이래서 퇴물 할배는 곤란하다니까♡”

   “예. 알겠습니다. 계속하죠.”

   

   프레이에게 있어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은 기적이었다.

   

   무채색으로 물들어 있던 자신의 세상에 색을 찾아 준 사람.

   

   수많은 감정의 처음이 되어 준 사람.

   

   스스로에게 검사로서의 자존심이 있음을 알게 해 준 사람.

   

   그리고 언제나 외톨이였던 프레이의 주변에 활기를 더해준 사람.

   

   아카데미에 입학해 루시를 만나기 전 프레이가 보던 세계와 지금 프레이가 보던 세계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자신이 느꼈던 것이 공포라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위험을 찾아 헤매던 시절과 여러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이 바라는 감정을 찾아 헤매는 지금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힘을 아껴두고 있었습니까? 놀랍네요.”

   “풉♡ 그냥 노땅백작님이 지친 거겠죠♡ 힘들면 힘들다고 그러셔도 괜찮아요♡ 나이를 먹은 게 죄는 아니잖아요?♡”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한 가지 색이 더해질 때마다 무채색의 풍경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기에.

   

   다시 그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느낄 공포를 이해하기에.

   

   프레이는 루시가 항상 곁에 머물기를 바랐다.

   

   그녀의 세상에 색을 가져다 준 루시가 사라져버리면 다시금 그녀의 세상이 잿빛으로 변해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게 또 통할 거라고 생각해요?♡ 전 프레이 언니 같은 바보멍청이가 아닌데요?♡”

   “머리는 잘 돌아가는 듯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군요! 뒤에 숨겨진 걸 눈치 채지 못하다니!”

   

   허나 루시는 한 자리에 가만 서 있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저만치 앞으로 나아가버렸다.

   

   자만하지 않고. 게으름부리지도 않고. 강함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내달렸다.

   

   루시의 옆에서 그녀가 내달리는 걸 보던 프레이는 루시의 손목을 붙잡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루시와 함께 내달리는 것을 택했다.

   

   그녀가 어디까지 훌쩍 가버리더라도 그 걸음을 따라갈 수 있다면 항상 루시의 곁에 머물 수 있을 테니까.

   

   “…이게 욕심이라는 거구나.”

   

   생각의 끝에 언젠가 사전에서 보았던 단어를 떠올린 프레이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또 새로운 색을 찾아냈어.

   

   루시 덕분이야.

   

   이 기쁨을 어떻게 하면 루시에게 되돌려줄 수 있을까.

   

   골몰히 생각을 거듭하던 프레이는 자신의 피부를 스치는 온기에 고개를 들었다.

   

   그 온기의 중심에는 자그마한 태양처럼 빛나는 루시의 메이스가 있었다.

   

   “이 정도는 당연히 받아내실 수 있겠죠?!♡”

   “쯧! 하여간 알른 가문의 핏줄은 하나 같이 괴물들 뿐이군요!”

   

   어느새 대련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전력을 쏟아내는 바람에 일어날 기력마저도 잃어버린 나는 쓸데없이 맑은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완패였다.

   

   켄트 백작과 나 사이의 격차가 너무도 커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완패.

   

   꽤나 긴 시간 백작을 상대로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어디까지나 백작이 나를 배려해주었기 때문이야.

   

   만약 백작이 진즉부터 날 박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난 그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널부러져야 했을 걸.

   

   내가 이렇게 발린 게 얼마만이지?

   

   비교를 하려면 이 세상에 발을 막 디뎠을 무렵 칼에게 박살났을 때를 꺼내 와야 할 것 같은데.

   

   아. 생각하면 할수록 미치겠네.

   

   이게 게임이었을 무렵에는 켄트 백작 맨 손으로 쓰러트리기 같은 챌린지도 하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백작에게 닿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니.

   

   하아아.

   

   나름대로 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말야.

   

   아니었나봐.

   

   난 아직 약해.

   

   이대로는 소울 아카데미의 결말을 보기는커녕 아카데미 졸업할 때까지 목숨이 붙어있을 지를 고민해야 할 수준이잖아.

   

   나크라드라는 적 하나가 쓰러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 이 세상에는 멸망을 바라는 쓰레기들이 차고 넘친다.

   

   내가 주신의 사도인 이상. 그리고 주신의 뜻에 따라 악신과 대치하고 있는 이상. 그들은 반드시 내 목을 노리러 올 터.

   

   당장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만 한다.

   

   푸핳. 이 대련을 제안해 준 프레이에게 감사하게 되네.

   

   이렇게 켄트 백작과 맞붙지 못했더라면 나는 서서히 자만하게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한 가지 감사해야 할 부분은 또 있어.

   

   바로 켄트 백작과 다투면서 찾아 낸 나의 여러 단점들.

   

   가르침을 주듯 켄트 백작이 여러 부족한 부분을 집요하게 노려준 덕분에 내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깨닫게 됐거든.

   

   ‘우선은 신체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부터겠죠.’

   

   스스로 지닌 모자람이 한 둘은 아니지만 우선은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게 먼저다.

   

   내 신체능력이 동세대 중 압도적인 편이라고 하지만 내가 상대해야 하는 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과거 할배가 상대해야 했던 거악들이니까.

   

   최소한 켄트 백작을 상대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은 되야 해.

   

   <네 생각이 옳기는 하다만. 지금 이상으로 가혹한 수련을 해봐야 악영향을 끼칠 뿐이다. 여아야.>

   ‘걱정 마세요. 그런 방법이 아니거든요.’

   

   지금 내가 하는 것들보다 더 가혹한 수련을 한다한들 내가 바라는 수준으로 급격하게 강해질 수는 없다.

   

   수련을 통해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치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럼 어떻게 신체의 능력을 끌어올릴 거냐고?

   

   소울 아카데미의 썩은물이 할 행동이라면 하나뿐이잖아?

   

   노가다를 해야지.

   

   다른 일들이 자꾸 생기는 바람에 레벨업을 뒷전으로 미뤄버렸으니 그걸 방학 때 보충하는 거야.

   

   아아. 이번 방학은 진짜 던전에 틀어박혀서 보내야겠네.

   

   자그마한 휴식도 없이.

   

   수많은 던전을 돌아다니면서.

   

   폐인처럼 살아야 할 거라고.

   

   …흐흫.

   

   너무 재밌겠다.

   

   머릿속으로 방학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던 중 내 시야에 프레이의 얼굴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얘 눈이 초롱초롱한 게 좀 불안한데.

   

   설마 지금 대련해달라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건 좀 곤란해.

   

   나 지금 쓸 수 있는 거 없는 거 다 끌어서 백작한테 덤빈 거란 말야.

   

   완벽하게 탈진 상태라고.

   

   아무리 내가 체력이 좋다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단 말야.

   

   “루시.”

   

   ‘뭔데요?’

   “왜? 프레이 언니.”

   

   “저택으로 가자. 내가 친구 데려온 기념으로 저택에서 파티할 거래.”

   

   …취소.

   

   취소!

   

   프레이! 그냥 우리 같이 대련을 하지 않을래?!

   

   내가 탈진해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몸을 움직일 테니까 대련을 하자!

   

   응?!

   

   나 지금 상태로 켄트 저택 사람들의 무한긍정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단 말야!

   

   제발!

   

   *

   

   안타깝게도 프레이는 켄트 저택에서 발언권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반강제로 저택에 끌려간 나는 그 곳의 사람들에게 재차 감사인사를 들었고.

   

   뼈밖에 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위가 가득 찰 때까지 음식을 대접 받은데다가.

   

   저택의 사람들만큼이나 시끄러운 켄트 가문의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했고.

   

   프레이와 파르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대련을 하게 되었으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저택의 한 방에서 잠을 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여기에서 자고 갈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명성 높은 백작 가문치고는 소박한 방의 침대에 누워 정신없던 하루를 돌이키고 있으려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루시. 들어가도 돼?”

   

   ‘네. 괜찮아요.’

   “맘대로 해. 프레이 언니.”

   

   모험가나 입을 법한 가죽 옷을 잠옷이랍시고 입은 프레이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졸래졸래 내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요?’

   “뭐 하러 온 거야? 프레이 언니? 설마 밤에 외로워서 같이 자달라는 건 아니지?”

   

   “으응.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생각해보면 오늘 프레이가 내게 한 부탁이라고는 언니라고 불러달란 거랑 백작이랑 대련해달라는 것밖에 없었네.

   

   그 후엔 켄트 모녀에게 휘둘리느라 둘이서 뭔가를 할 틈이 없었으니까.

   

   좋아. 결정했어.

   

   프레이 네 덕분에 얻은 것이 많으니까.

   

   어지간한 건 다 최선을 다해 들어주도록 할게.

   

   ‘말해주세요.’

   “말해봐. 프레이 언니가 어떤 허접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거든.”

   

   내 물음을 들은 프레이는 그녀답지 않게 말을 망설이다가 내게 머리를 들이 밀었다.

   

   “쓰다듬어줘.”

   

   ‘…네?’

   “…뭐?”

   

   “어려운 던전 공략해서 대단하다고 해줘.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걸 칭찬해줘.”

   

   무슨 부탁을 하나 했더니.

   

   램프의 흐린 불빛 아래에서도 보일만큼 붉어진 프레이의 귀를 살피던 나는 피식하는 웃음과 함께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말이 헛나오지 않을까하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분명.

   

   내 진심을 그녀에게 전할 수 있을 테니까.

   

   “벌써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프레이 언니는 진짜 천재야.”

   “응. 맞아. 나 천재.”

   “던전 보스 상대로 달려드는 것도 엄청났어. 나 완전 감탄했다니까?”

   “응. 그리고?”

   “던전 공략할 때 프레이 언니가 협조하는 거 보고도 좀 놀랐었어. 항상 제멋대로인 프레이 언니가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를 줄이야!”

   “…그거 칭찬 맞아?”

   “당연히 칭찬이지. 짐승이 말을 들을 수 있게 된 거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칭찬 아닌 거 같아.”

   “푸하하핳. 들켰어? 바보 프레이 언니답지 않게 눈치가 빠르네.”

   “루시이이이…”

   

   투덜거리는 프레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폭소를 터트린 나는 그 후에도 칭찬이라는 핑계 속에서 프레이에게 못 다한 말을 전했다.

   

   저기요.

   

   아르마디님.

   

   당신께서 만약 이걸 예상하고 모든 걸 안배해둔 거라면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리도록 할게요.

   

   친구에게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단 게 정말 기쁘거든요.

   

   아니지. 생각해보면 내가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건 아르마디 이 변태가 내린 축복 때문이잖아.

   

   결국 빼앗아갔던 걸 잠시 돌려줬을 뿐인데 이걸 기뻐해야 하나?

   

   우와아. 이게 가스라이팅이라는 거구나.

   

   역시 허접 변태 주신. 완전 음흉해.

   

   …

   

   뭐. 그래도.

   

   기쁜 건 기쁜 거니까.

   

   감사는 똑바로 전할게요. 아르마디님.

   

   이렇게 안 하면 나중에 삐져서 이상한 걸로 억까 할 게 뻔하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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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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