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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0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하얀 방에 있었다.

       

       “여긴…….”

       

       어디인지 모르겠다.

       

       땅바닥에 껌딱지처럼 누운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있는 것이라고는 소파 하나와 책상 하나. 의자 하나에, 책장은 둘.

       

       마지막으로 백발 백안의 소녀까지.

       

       잠깐만.

       

       소녀?

       

       “이제야 정신이 드셨군요.”

       

       하얀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나를 내려다보며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었다. 눈살을 찌푸린 내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소녀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다리를 번갈아 꼬았다.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 생소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디버그 룸에 온 걸 환영해요.”

       

       디버그 룸? 디버그 룸이라니?

       

       그러고 보니 앨리스에게 그런 개념이 있다고 들었다. 세계를 관리하기 위해 여신이 따로 파 놓은 공간.

       

       아렌스 대륙의 상위 차원에 존재한다고 했었지, 분명.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이것이 주마등이라고 생각했다. 죽기 전 뇌가 보내는 신호 말이다. 하지만 디버그 룸이라는 단어를 듣고 나니 일말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잠깐. 그러면 당신이…….”

       

       나는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며 가자미눈을 떴다. 소녀는 쿡쿡 웃으며 손을 휘적거렸다.

       

       “맞아요. 제가 그 여신이랍니다. 여신 르퀴네스.”

       

       내 시선이 더욱더 가늘어졌다.

       

       절대자. 창조주.

       

       그런 거물과 만난 셈이다.

       

       그런데도 내 심상은 잔물결 하나 없이 평안하기만 했다. 동시에, 이전까지 생각했던 신에 대한 관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딱히 무신론자라서 그런 건 아니다.

       

       “이딴 게, 신…?”

       

       눈앞의 소녀가 ‘여신’이라는 명사로 불리기엔 지나치게 초췌한 탓이다.

       

       소녀의 눈가엔 다크서클이 짙었다. 겉옷으로는 허름한 걸 두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랩코트였다. 또한 머리는 며칠 동안 감지 않은 것처럼 산발이었다.

       

       무엇보다 눈동자가 우유 섞인 물처럼 탁하게 풀려있었다.

       

       그, 뭐냐. 

       

       내가 생각하는 여신의 이미지는 이런 게 아니었다. 

       

       천사 날개와 아름다운 순백의 드레스. 머리카락은 금빛이나 검은 빛에, 눈을 감고 자애로운 기도를 내리는 천사. 그런 이미지를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이건 마치…….

       

       “그냥 랩실 노예 같은데.”

       

       여신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그러나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 기억을 읽기라도 한 건지, 여신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 잠깐, 저건 기도하는 게 아니라 포권이잖아.

       

       “우선 당신이 여기 온 이유부터 말씀드리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지난 일들을 설명하는 르퀴네스.

       

       그 말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모른다고?”

       “정확히는, 아직 확인 중에 있어요.”

       

       얼탱이가 없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였어요. 아무튼, 이렇게 피조물과 대화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렇고….”

       “잠깐만요.”

       

       여신의 설명을 듣다 말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생각해 보니 화나네?”

       “예?”

       “내가 이런 꼬맹이한테 놀아났다고?”

       

       여신은 나보다 한 뼘 정도 작았다. 얼굴도 동글동글한 것이 앳되다. 

       

       애새끼다.

       

       나는 애새끼한테 5년을 놀아난 것이다.

       

       아니, 에테르로 산 삶까지 합치면 1천 년 이상을 놀아난 셈이다.

       

       “자, 잠깐만요. 뭐 하시려는 거예요? 아직 설명 안 끝났어요!”

       

       당황한 여신이 손을 휘휘 저었다. 발도 곧게 내뻗었다.

       

       기다란 가운 사이로 매끈한 다리가 드러났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신의 다리를 잡아챘다.

       

       “꺄악!”

       

       미끄러지듯 의자에서 내려오는 여신. 

       

       “뭐야.”

       

       그녀가 내지른 비명에, 나 또한 당황하고 말았다.

       

       앞뒤 생각 안 하고 한 번 대들었는데 생각보다 우세해서 놀랐다. 

       

       나는 잠깐 생각한 뒤 저지르기로 결심했다.

       

       무얼 저지르느냐.

       

       뭐긴 뭐야. 기브 엔 테이크지.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아, 아니! 그게…!”

       

       단신으로 내던져져서, 지금까지 죽도록 고생했다. 그 대가를 받아내고 싶었다. 받아내야 한다. 하지만 여신이란 작자가 보상해줄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가장 공정한 방법으로 보상을 청구했다.

       

       물리.

       

       격물치지의 정신으로 여신의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

       

       “응? 말이 돼? 세상 관리를 그따위로 해놓고, 잘 사는 사람을 빙의시킨다는 게!”

       “꺄악! 아파! 머리채 잡지 마! 나, 난 여신이야! 피조물 주제에! 피조물 주제에…!”

       

       조금 전까지 온후하던 여신은 온데간데없다. 현재 눈앞에는 드잡이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꼬맹이 하나가 있을 뿐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이 공간은 마력이 풍부하다. 정령? 그런 커넥션 없이도 즉석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물 흐르듯이 아공간에서 스태프를 소환했다.

       

       스릉. 길이 1.5m가 넘는 거대한 은빛 캘리퍼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신이 악 소리를 내지르며 게거품을 물었다.

       

       그렇게 우리는 즐거운 훈육 타임을 가졌다.

       

       “후우, 속이 다 후련하네.”

       

       잡고 있던 머리를 놓자 여신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제야 나도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젠장, 이 몸으로 너무 오래 살았더니 나도 모르게 저지르고 말았다.

       

       잠깐만.

       

       이 몸으로?

       

       “아, 아.”

       

       여전히 가늘고 높은 목소리. 대략 머리가 멍해졌다.

       

       아직 에테르의 몸이었다. 남자로 회귀한 게 아니라.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만약,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도 계속 이 상태면 어떡하지? 

       

       방금 여신에게 지랄을 했으니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에테르인 상태로 지구 귀환이라니. 벌써 머리가 아프다. 순식간에 신원 미확인자가 되는 거잖아.

       

       그렇게 되면 그동안 쌓아온 업적이 무너진다. 학력, 계좌, 심지어 쓰던 논문까지. 전부 사라지는 셈이다.

       

       “젠장.”

       

       나는 정신을 차리고 여신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 마!”

       

       눈물을 글썽이던 여신이 구석으로 도망갔다.

       

       “이럴 수가. 피조물이면서 어떻게 창조주인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건 말도 안 돼. 버그야. 버그라고!”

       “피조물이 창조주를 때릴 수도 있긴 하구나.”

       

       로봇이 사람을 때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좋아. 그렇다면 일단 강하게 밀고 나가볼까.

       

       “야.”

       “네, 네?”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되는 건지 설명해.”

       “저, 저는 여신이에요. 이런 험악한 꼴을 당했는데 사과를 받기 전까진 설명할 생각이… 꺄아악!”

       

       나는 다시 한번 여신의 발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방 한가운데로 끌려 나온 여신. 동시에 그녀가 입고 있던 기다란 랩코트가 좌르륵 벗겨졌다. 여신은 하얀 면티 하나에 돌핀팬츠 차림이었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얘기할게요! 얘기할 테니까 제발 이것부터…!”

       

       일단 놔줬다. 여신은 허겁지겁 일어나 책상 앞으로 튀어갔다. 

       

       내 눈치를 몇 번 보더니 그대로 타이핑을 시작한다.

       

       책상 앞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놓여있었다. 여신이 일사불란하게 손가락을 움직이자 검은 화면에 알록달록한 코드가 떠올랐다.

       

       “한 시간만 기다려 주세요.”

       “한 시간이나? 뭘 하길래?”

       “있어요, 그런 거.”

       

       여신은 생전 처음 보는 속도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순식간에 수백 수천 줄의 코드가 이어진다.

       

       그동안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 본성은 어디 안 간다고, 대뜸 책장부터 눈에 들어왔다.

       

       책장에는 빼곡하게 책이 꽂혀있다. 자세히 보니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이었다.

       

       [세계관리학]

       [빙의론]

       [자유의지와 독립 피조물의 구성 방법에 대하여]

       [연구학개론]

       [가상물리학]

       

       신이시여.

       

       눈을 깜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일이 안 풀리는 건지, 여신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키보드를 찹찹 두들기기도 했다. 팝콘 튀기는 소리가 났다.

       

       “여, 여신님.”

       “집중하고 있으니까 말 시키지 마세요!”

       

       어디서 꺼낸 것인지 벌써 캔커피도 따고 있다. 인스턴트 커피를 호로록 마셔버린 여신이 빠득 이를 갈았다. 그러더니 내 눈치를 보고는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그제야 나는 책상 안쪽에 쓰레기통이 놓여있다는 걸 알아챘다. 슬쩍 고개를 틀어 쓰레기통 내부를 확인했다. 안에 캔커피가 수십 개는 들어차 있었다.

       

       나는 또 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세 시간을 기다렸다.

       

       내가 이리로 날아온 이유에 대해서 여신이 파악하고, 관련 조치를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이 세 시간이란 말이다.

       

       “일단 당신이 여기로 날아온 건… 에너지 밀도 과다 때문에 차원이 붕괴해서 그런 거예요.”

       

       원래 흑주를 한 번만 쏴도 마왕은 죽는단다. 그런데 내가 돌아버린 나머지 30개 분량을 동시에 터뜨렸고, 그 탓에 정령계를 지탱하는 모든 서버가 국민연금 예산 증발하듯 날아갔다고 한다.

       

       참 어이없는 일이다. 그렇게 쉬이 알 수 있는 일을, 신이라는 작자가 세 시간이나 걸려서 알아내다니.

       

       하지만 내가 독촉하거나 화내는 일은 없었다. 당장 여기서 화를 내기엔, 이 소녀가 너무나 불쌍해 보였던 까닭이다.

       

       “받으, 세요.”

       

       여신은 눈가를 꾹꾹 문지르며 책을 한 권 내밀었다. 

       

       양장본이었다. 방금 인쇄한 것인지 무척이나 따듯했다.

       

       제목도 적혀있었다.

       

       [마법과 정령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

       

       익숙하지만, 어딘가 낯선 제목이었다.

       

       “이게 뭐야.”

       “그 논문을 잘 가지고 있으세요.”

       

       순간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과거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누구세요?

       – 너요.

       

       그래, 분명히 흑발금안의 소녀와 그런 짤막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한 번 펼쳐보세요.”

       

       여신의 말에 따라 논문을 훑었다. 내용은, 대충 봐도 뻔한 것뿐이었다.

       

       “어떤가요?”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되는 건지 설명해 달랬더니.”

       

       이런 괴작을 만들어서 주다니.

       

       “알잖아요?”

       

       능글맞은 표정을 짓는 여신. 내가 눈초리를 주자 몸을 움찔 떨며 뒤로 물러났다.

       

       “우, 우선 버그를 대신 고쳐준 건 감사하게 생각해요. 이 점을 참작해서 절 때린 죄는 묻지 않겠어요. 대신에 그 책을 줄 테니까 앞으로의 일을 잘 생각하라고요.”

       

       나는 다시 한번 제목을 확인했다.

       

       책 제목은 내가 처음에 받았던 것과 미묘하게 다르다.

       

       마법과 물리학의 상관관계가 아니라, 마법과 정령의 상관관계라.

       

       정령? 갑자기 웬 정령이란 말인가?

       

       혹시 내가 아렌스 대륙에서 출판했던 정령-마소 대칭성 정리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남은 답은 당신이 찾으세요. 원래 세계로 돌아가도 좋고, 새로운 경험을 해 봐도 좋아요. 하지만 이건 알아두세요. 정령의 샘을 통해 치른 대가는, 다시는 복구할 수 없다는 거.”

       “대가?”

       

       대가라면 이미 치렀다. 남은 목숨으로.

       

       “네, 그러니까 당신은 이젠 인간으론 살아갈 수 없어요. 이 점을 명심하시고 결정을 내리길 바랄게요.”

       

       여신이 딱, 하고 손을 튕겼다. 그러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검푸른 빛으로 뒤바뀌었다.

       

       어느덧 여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대신 익숙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여긴…….”

       

       투박한 철근 콘크리트 건물. 리모델링이랍시고 개떡 같이 칠해놓은 아이보리색 페인트.

       

       이과대학 특유의 텁텁하고 씁쓸한 공기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환풍기 소리까지.

       

       틀림없다.

       

       내 연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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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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