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31

        

         이게 참,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자세히 설명하긴 정말 뭐하지만. 문득 사소한 궁금증 하나가 생겼다.

         

         이 사이버 세상에서 개인의 반응과 거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뭐에 가장 영향을 크게 받을까?

         

         좋은 게이머이자 인터넷 망령의 자질 중 하나로 꼽히는 준비된 반응 속도?

         혹은 자세하게 파고들면 한도 끝도 없이 마리나처럼 커스텀 할 수 있는 단축키 설정을 통한 대응?

         

         둘 다 첫번째로 손 꼽히기엔 부족하다면, 남은 건 역시 신경 물질 전달 속도처럼 근본적으로 타고난 조건이려나.

         

         아니지…? 그것도 뇌를 비롯한 중추 신경계 쪽에 특별한 임플란트를 박으면 해결되긴 할 테니 온전히 재능의 영역이라 치부하기도, 꼭 최초부터 승패가 정해진 싸움이라 잘라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겠네. 흠.

         

         뭐, 얘가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려고 뜸을 들이나~ 부디 너무 이상하게 여기진 말아 주길 바란다.

         

         그도 그럴 게 나도 현실 도피를 하느라 유념이 없는 와중이라 좀 바빴거든.

         

         왜냐고? 그야… 잠깐만 내 입장에서 생각해주실 수 있을까요? 예??

         

         웬 오지랖 넓고 뻔뻔하기 짝이 없는 해커 녀석이 남의 닉네임을 방패 삼아 장난질을 치는 것 같길래, 괘씸한 낯짝이나 한 번 구경하려고 기껏 가면을 벗겨냈더니만 예상도 못한 아는 얼굴이 튀어나왔다니까?

         

         심지어 그냥 랜덤 인카운터로 만날 만한 흔한 인물도 아니고 반군, 그것도 우두머리 격인 파이브 아이즈 특수 작전 부대 소속이라 진행에 따라서는 게임 끝날 때까지 아예 조우조차 하지 못하는 일도 생기는 로잘린이 반쯤 헐벗은 채로!

         

         여러모로 앳되어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성인이라는 걸 강조하듯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가 형성된 여자 특유의 유려한 곡선, 외출이 잦지 않은 탓인지 뽀얀 빛깔을 자랑하는 속살을 좀 보라.

         

         그녀가 혼자 있을 때는 편하게 입는 걸 선호했던가…?

         

         다 큰 처녀가 감히 쳐다보기도 부끄럽게 어쩌다 저런 상태로 가상 현실에 접속하고 있었는지, 무슨 사연인지를 모르겠….

         

         …….

         

         ‘…어, 내가 대상의 진짜 신체 아바타를 억지로 불러오는 과정에 의복 데이터를 어떻게 할지도 세세하게 정해서 침투 코드를 짰었나?’

         

         아는 사람에게 쓸 거라 생각하고 만든 녀석이 아니기에, 어쩌면 약간 사회적 측면에서 배려가 사아아앙당히 부족했을지도… 혹은 아예 결여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지만.

         

         다행히 나보단 이 공간에 훨씬 익숙하고, 여러 속도 관련 개조도 꼼꼼하게 했을 로잘린의 필사적이고 해커다운 대처가 한 걸음 더 빨랐다.

         

         원인과 원흉을 인지하고, 이치와 과정을 추론하고, 거울 같은 보조 물품의 도움 없이도 자신이 객관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순식간에 파악.

         

         하지만 그게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 기어코 구체적으로 물어보겠다면, 뇌정지로 인해 얼어붙어 있던 내 시선이 무심코 그녀의 쇄골 밑부분으로 내려가기 직전에.

         

         렌더링이 강제적으로 취소된 기존 옷가지가 빛무리가 되어 공중에 녹아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가까스로 새로운 복장을 불러내서 전신을 뒤집어쓰는데 성공했다고.

         

         “읏, 꺄아아흡—!?!%^%^!??!%^$&&*#^%^(#*!!”

         

         “으잉? 엥??”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아니, 고의는 맞지만… 진짜 그런 고의는 아니었어! 미안해!!”

         

         물론 그렇다고 그 과정을 침착하게 수행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네.

         

         양측 모두를 멈추게 만든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한 침묵과 경직도 잠시, 찬란하고 윤기나는 머리색깔 만큼이나 로잘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리며 얼굴을 찡그리고는 펑!

         

         비명을 내지르려다, 그래도 현 위치를 자각하고 숫제 언어가 되지 못한 욕지거리를 마구 압축해서 중얼거리는 로잘린.

         도와달라고 야단을 피우긴 했어도 이런 기발한 방식으로 참견해준 것에 흠칫하다가, 양아치 껍데기 안에서 세상 무해해 보이는 소녀가 나타나자 당황한 마리나.

         여기에 마지막으로 여태 신사다운 마음가짐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 자부했거늘, 단 한 번의 실수로 치한보다 더한 무언가가 되어버린 불우한 나까지.

         

         피차 정체를 몰랐다고는 하나, 안 그래도 하필 이런 쪽으로 안 좋은 짓을 당할 뻔했던 전적이 있는 애한테 몹쓸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다급하게 어깨 뒤로 팔을 둘러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일단 세 명 모두 시선을 끌어서 좋을 게 손톱만큼도 없는 장소라는 점은 이해한 상태, 별다른 합의 과정 없이도 상호 동의한 채 목소리도 낮추고 행동거지 또한 작게 작게 하며 수습에 진력하는 모습은 참 보기 좋았다. 호흡이 아주 잘 맞는 달까.

         

         그러니 제발, 무서운 혼잣말은 그만하고 진정 좀 해주지 않을래…?

         

         저 극동의 반도 국가에서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 댔는데 내 귓전에 대고 그런 소리만 반복하면 진짜 심장 근처가 찌릿찌릿하거든.

         

         내 입으로 하기엔 양심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스스로 이런 논리를 주워섬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누가 극소 범위 데이터 변조를 관측하기도 전에 수습된 사고니까, 여자끼리 어떻게 모여 있다가 발생한 운 나쁜 해프닝인 셈치고. 응??

         

         “…찾아낸다. 진짜 잡아서 복수할 거야. 절대로 용서 안 해. 무슨 얼토당토않은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난 물론이고 언니의 백신마저 우롱해? 반드시 그 수작질의 비밀을 밝혀낼…!”

         

         “아이고, 로잘린. 내가 죽도록 미안하대도! 서로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했던 거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근데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라서 방금 그게 너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못 떠올렸네.”

         

         애매하게 의심받는 적성 세력에서 그럭저럭 지켜볼 만한 이웃으로.

         

         제로도 좀 망가지고 서로의 이벤트 또한 방해하며 시작은 나빴지만, 결과적으로 임시 동맹 선에서 정착했던 만남을 되새기며 진정하라는 뜻을 담아 등판을 쓸어내렸다.

         

         겸사겸사 전성기가 한참 지난 ‘데드 링크’라는 단어도 함부로 하길 꺼려하는 해커 중심지에서 차마 반란, 혁명과 동의어나 다름없는 파이브 아이즈의 이름을 꺼낼 순 없어서 최대한 두리뭉술하게 호의적인 관계를 강조했고.

         

         근방에 엘리시움의 앞잡이가 콕콕 박혀 있다는 게 너무 당연하고 뚜렷한 사실이라 그것만 신경 쓰고 있었는데, 설마 대척점이 되는 조직에서도 일찌감치 알 박기 하듯 심어놓은 멤버가 있을 줄은.

         

         하기야 게임에서 그런 정확한 묘사가 없었다고 그걸 그대로 삼키는 건 이미 여러 번 저지른 실수이긴 하지.

         

         사실 저들이 해커 커뮤니티를 방임하는 편이 외려 더 이상한 판단이기도 하다.

         

         엘리시움은 간부 라인에 전향한 잔당이 있다면, 파이브 아이즈는 머리통인 총사령관 놈부터 데드 링크 성골 출신인데 뭐. 어으… 수상한 해커 냄새.

         

         “……?”

         “좋아, 좀 진정됐어?”

         

         유례없는 나락을 직감하고 싹싹 용서를 빈 진심이 얼마나 잘 전달되었을지는 몰라도. 부드러운 토닥임과 말로 어르고 달램의 적절한 황금비와 콤보에 드디어 평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 로잘린이, 고개를 제대로 돌려 사슴 같은 눈망울 멀뚱히 깜빡였다.

         

         분노 반에 의구심 반, 그리고 프로 특유의 직관과 분석력. 때를 가리지 않는 피드백이 한 스푼 추가된 상태로 야금야금.

         

         “신호 로그가 깨져 있어. 커뮤니티 채널 포트로 들어온 게 아니라 난데없이 직통으로 들어온 기록이 손상될 이유가 없는데. 게다가 설령 이 공유 계정에 보안 결함이 있었다 쳐도, 언니가 만든 백신이 단번에 뚫릴만한 틈이 있다? 만약 있다면 그걸 사용할 줄 아는 건….”

         

         거기까지. 쉴 새 없이 골몰하며 중얼거린 그녀는 직전에 내보인 히스테리가 거짓말처럼, 방향성이 반대인 기대와 환희로 두근거리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은 채 조심조심 인사를 건네 왔으니.

         

         “아나스타샤… 언니??”

         

         ‘어, 음.’

         

         내가 먼저 스스럼없이 그녀의 이름도 불렀겠다. 한정된 선택지 내에서 재빨리 정체를 밝혀내는 건 그리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중간에 엄청난 비약이 있는데 다짜고짜 정답만 맞춘 경우엔 답지를 훔쳐봤다는 지당한 의혹을 제기해도 무죄가 아닐런지.

         

         “…그, 진짜 전문가인 네게 참견하는 건 주제넘을지도 모르겠지만. 가설을 검증하는 방식의 신뢰성이 좀 걱정되는데. 혹시 개인적으로 나 뒷조사하고 다녔다던가, 아니지? 정말 아니라면 좋겠는.”

         

         “언니!!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한참 전부터 개발자 주소로 열심히 메일도 보내고, 이쪽 커뮤니티 닉네임으로 쪽지도 잔뜩 썼는데 답장도 안 해주시고! 그렇다고 접속을 자주 하시는 것도 아니고 너무해요…!”

         

         “느아아악!?”

         

         소녀이되 미녀, 외형은 무구하나 실상은 특급 지명수배범 해커.

         마음에 안 드는 이에겐 한없이 독살스러울 지라도 한 번 인정받은 후에는 헤실헤실.

         

         본인의 이중적인 매력을 한껏 뽐내는 건 나로서도 눈이 즐거우니 좋았으나, 자신의 본분을 완전히 잊지는 않은 듯 다시 시커먼 남정네 아바타로 겉모습을 훌쩍 뒤바꾼 로잘린이 역으로 나를 끌어안으려 하길래 냅다 접촉을 차단하고 뒤로 물러났다.

         

         와중에도 정작 말투는 건달 연기를 그만둔 발랄한 그녀 그대로여서 흡사 간드러지는 게이에게 희롱 당하는 느낌이… 쓰읍!!

         

         사물의 진정한 본질과는 별개로, 알맞은 형태를 갖춘 시각 정보가 주는 안심과 신뢰감은 무시할 게 못 된다고!

         

         “하아….”

         “~♪”

         

         콧노래를 부를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게 지나치게 깜찍하지만… 뭐 어쩌겠나.

         

         아바타를 갈갈이 찢어 먹히고 액세스 거부로 밀쳐 내지고도 웬 잡놈이 아니라 아는 사람의 소행이라는 걸 깨달은 시점에서 다 용서한 걸로도 모자라 왠지 기뻐 보이는 로잘린을 힐끔거리며 이번엔 이쪽이 한숨을 쉬며 들뜬 열기를 가라앉혔다.

         

         박아 넣는 침투형 코드에 의류 데이터를 새롭게 로드하는 절차를 까먹은 게 약간의 실수이자 무의식 중에 참고한 진실의 거울 같은 이미지였다면, 다시 원래 아바타로 자유롭게 갈아 끼우는 걸 방지하는 제한 기능은 확실하게 넣은 부분.

         

         초 단위로 승부가 갈리는 치명적인 정보전이라면 크게 개의치 않아도 괜찮겠지만.

         

         불과 몇 분 만에 걸린 제약을 풀고 본인의 가짜 아바타로 재차 복귀한 실력의 편린이나 여러가지를 고려한다면, 역시 이 업계 인간들을 상대할 때는 마냥 방심할 수 없다는 감상이 새삼 들었다.

         

         아오, 피곤해라.

         

         그래도 로잘린이 알고 있는 게 어마어마하게 많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만큼, 또 그런 걸 떠나서 오랜만의 재회인만큼 그녀의 하이 텐션이 맞추지는 못할지언정 너무 소극적인 기색을 안 내보이려고 예의를 차리고 있었는데.

         

         …톡톡.

         

         “응?”

         

         짧은 시간, 신나게 치고 박던 주역임에도 불구하고 헌신짝처럼 버려진 걸로도 모자라 대화에서 완전히 소외되기까지 한 마리나가 옆에서 세상 억울한 얼굴로 어깨를 간절히 두들겨 내 관심을 요구해왔다.

         

         잠깐만 귀 좀 대보라고? 왜 굳이??

         

         “언제는, 절대 친구 같은 거일 리가 없다더니. 없다더니!!”

         “아.”

         

         

         거, 미안하게 됐수다. 크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 진짜 몰랐다고. 억까야~

    언제나 재밌게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남겨주시는 댓글, 추천 모두 하나하나 눈물 흘리며 곱씹어 먹고 있습니다!
    흑흑, 맛있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