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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2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은 왕이 되었다.

     

     여왕이 된 건 생각보다 꽤 되었지만, 국가의 유일한 군왕이 된 건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의 죽음.

     그동안 자신을 수도 없이 죽이려고 했던 악몽과도 같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없는 존재는 죽었다.

     

     추하디추한, 벌레만도 못한 모습을 보이며 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 과정에 있어서, 나리아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지시에 따르는 것뿐이었다.

     나리아의 목숨을 걸고 한 도박.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라면 분명 혼자 있는 나리아를 노릴 것이라고 그레이는 믿었고, 나리아는 그런 그레이의 판단을 믿고 자정에 홀로 방에 있었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은 함정에 걸려 죽었다.

     그레이 지브롤터가 마련해주고, 그레이 지브롤터가 도와줄 사람을 불러주고, 그레이 지브롤터가 직접 나서서 자신에게 복수할 기회까지 제공해 줬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레이 지브롤터는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령 자신을 돕는 데 있어 그 어떤 이성적인 호감도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설령 10살 때부터 자신을 이용하려고 하던 모습에서 여러모로 섭섭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리아에게 있어, 그레이 지브롤터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알아서 모든 걸 다 해주는 구원자와도 같았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언제까지고 남의 도움을 받고 살아갈 수는 없어, 나리아.

     거짓말을 했었다.

     그레이에게는 거짓된 황금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다고 했지만, 그곳에서의 그레이를 보고 여러모로 생각이 깊어졌다.

     -설령 내가 없어지더라도, 설령 내가 사라지더라도 너는 너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어야 해. 지브롤터를 떠나서, 한 명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오라버니로서 자신을 지극히 아껴줬다.

     -나는 너를 믿어, 나리아.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그 말을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던 그레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시간이 감기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설령 그 거짓된 황금 속 그레이 지브롤터와 ‘이 그레이 지브롤터’가 다른 시간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레이 지브롤터가 바라는 것은 나리아가 지오 노스트럼이든 지브롤터든, 새장에서 보호받는 황금의 카나리아가 아니라 스스로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

     따라서.

     “여왕 전하. 준비 끝났습니다.”

     나리아는 눈앞에 모인 수백 명의 기사들 앞에 직접 나섰다.

     예비부대에 가까운 이들이었지만, 일부 사이즈도 맞지 않는 투구와 아카데미 제복을 아래에 입은 임시 기사도 있었지만.

     “우리는 지금부터 모르가니아 공작령 구원전에 나설 것이다.”

     

     나리아는 직접 머스킷을 들고 연단에 올랐다.

     머스킷의 끝에 걸린 노스트럼의 깃발이 펄럭이고, 기사들은 하나둘 동요하기 시작했다.

     “모르가니아라고 하심은….”

     “헥스 로마나 자작이 현재 모르가니아를 지키고 있지.”

     “…….”

     “오해하지 마라. 나의 친가이기 때문에 이렇게 모은 게 아니다. 그곳에는 우리의 보급품이 있으며, 그곳을 빼앗기면 우리는 후방에 적이 떡하니 자리 잡게 된다.”

     “…….”

     기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여왕의 선택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나리아를 조금은 얕잡아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여왕 전하.”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여왕 전하께서는 이곳에 계시고, 다른 이를 보내는 것이 어떠십니까?”

     “다른 이, 누구?”

     “그야….”

     기사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입 모양으로 작게 속삭인다.

     “지브롤터 경을 보내시지요.”

     그레이 지브롤터.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은 기사들도 시선으로 동의를 보내고 있었고, 아카데미 학생들도 만장일치라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지브롤터 경이라면-”

     “어리석도다ㅡㅡㅡ!”

     타ㅡ앙.

     나리아가 머스킷을 하늘에 대고 쏘자, 기사들이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언제까지 지브롤터만을 의지할 것인가! 언제까지 위기에 닥쳤을 때, 지브롤터를 부르짖을 것인가!”

     “저, 전하.”

     “지브롤터는 평생 그대들을 지켜주지 않는다! 그대들의 그런 알량한 마음가짐이, 지브롤터가 제국으로 통하는 문을 열게끔 한 것이다!”

     “……!!”

     다소 과격한, 사실상 매도에 가까운 나리아의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흠칫 굳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지브롤터가 협곡 문을 열었기에 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도 있을 것이다! 협곡이 열렸기에 해협 또한 더 활짝 열렸고, 그 해협으로 제국군이 들어오면서 전쟁이 격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야!”

     타ㅡ앙.

     “제국은 언제든지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지브롤터는 지금까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으나, 그대들은, 우리는 그들을 매국노라고 삿대질했었지! 당장 나의 아버지부터!”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지브롤터는 지금은 죽은 선왕에 의해, 반역자로 몰렸다는 것만큼은.

     “지브롤터는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런 자들에게 또다시 강요할 생각이더냐? 지켜달라고, 대신 싸워달라고, 우리를 살려달라고!”

     “…….”

     “나는 오늘의 일을 기억할 것이다. 지브롤터가 없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지브롤터가 쌓은 이 아카데미의 성벽과 힘이 없었으면 왕도가 점령당했을지도 몰랐을 오늘을 기억할 것이야! 영원히!!”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지만, 그중에서도 나리아는 더 또렷하게 선택적으로 기억할 수 있다.

     “지브롤터가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가!”

     “…….”

     “대답하라!”

     “아닙니다!”

     아카데미 제복 위에 흉갑을 입은 준기사 한 명이 외쳤다.

     “좋다! 우리는 증명할 것이다! 지브롤터가 없어도 우리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전하, 지브롤터 없이 나서는 건 몹시 위험한….”

     철컥.

     “왕명을 거역할 셈이더냐.”

     하늘을 향하던 총구가, 연로한 기사의 미간을 향했다.

     

     “저, 전하! 어찌 제국의 머스킷 따위를 소신에게…!”

     “선왕의 명령에는 찍소리도 못하던 자가 전쟁 중인데도 군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헛소리를 늘어놓으니, 그 태도가 불경한 것이 제국군보다 못한 반역자와도 같도다.”

     “…….”

     “왕명이다. 따르지 않는 자는 내 손으로 직접 미간에 탄환을 박아 넣어줄 것이다.”

     펄럭.

     “따르라. 그대들의 왕이 지금 이곳에 있다.”

     바람이 불며 머스킷에 걸린 노스트럼의 깃발이 나부끼며, 서서히 어둠이 걷히며 새벽의 햇빛이 왕도에 드리웠다.

     “아, 아아….”

     선두에서 나리아를 향해 뭔가를 말하려던 기사는 눈물을 글썽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왕께서, 직접 전장에 나서시려고 하시다니…. 선왕과는 다른, 이 강대한 기개…!”

     “…….”

     나리아는 등을 돌린 뒤, 다른 기사들이 데리고 온 백마에 단숨에 올라탔다.

     “준비하라. 지금 즉시, 헥스 자작을 구하러 갈 것이다!”

     잠시 뒤.

     햇빛에 재가 되어 타오르는 흡혈귀들의 사이로, 나리아 여왕을 필두로 한 기병들이 일제히 오로솔 아카데미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찬란한 햇살처럼 반짝이는 왕국 기병대를 향하는 사이.

     부ㅡㅡ웅.

     오로솔 아카데미 성벽을 무언가가 마도엔진 소리를 조용히 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두 사람을 태운 채.

     * * *

     오로솔 아카데미에서 지브롤터로 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길은 잘 닦여 있고, 제국의 문화가 들어오면서 교통수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늘어났다.

     10살, 나는 협곡에서 왕도까지 올 때 마차를 타고 왔었다.

     도중에 노숙하기도 했고, 중계 도시에 들러 여관에서 잠을 자기도 했으며, 며칠에 걸친 여행 끝에 왕도에 도착했다.

     

     만일 노스트럼에 그 어떤 발전도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말의 고삐를 잡은 채 말의 배를 발로 차며 흙길을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말이 제발 중간에 지쳐서 퍼지지 않기를 바라며, 하룻밤을 꼬박 지새워 달리다가 말이 쓰러지면 다른 영지에서 말을 바꿔 탈 생각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가 타고 가는 것은 말이 아니다.

     부ㅡㅡㅡ웅!

     시트 아래, 마도엔진이 시끄럽게 울린다.

     배기 파이프를 통해 뿜어져 나가는 바람과 함께, 마나의 잔여물이 뚝뚝 떨어진다.

     “꽉 잡아요!”

     내 앞.

     “더 빨리 달릴 거니까!”

     아스타시아가 손잡이를 붙잡고 페달을 꾹 누른다. 

     마도엔진이 태우는 마석의 양이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바퀴는 잘 포장된 도로를 맹렬한 속도로 굴러가며 앞으로 달린다.

     “…….”

     마도바이크.

     나는 아스타시아의 뒤에 탄 뒤, 그녀의 허리를 안고 달라붙어 있다.

     

     본래라면,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제국의 문화를 그대로 보인다고 한다면, 내가 바이크를 몰고 아스타시아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

     다른 이들에게 보인다면 ‘남자가 무슨 뒤에 타느냐’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레이! 눈 좀 붙여둬요!”

     나는 불과 수 시간 전, 클레이돌 후작을 비롯한 제국 흡혈귀를 다수 죽였다.

     “도착하고 나서도 전투가 펼쳐질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수 시간 뒤 협곡에 도착하는 즉시, 전투에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적은 황제.

     최선의 컨디션인 상태로도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장담을 하지 못하는 적을 상대로, 나는 최대한 체력과 정신력을 아껴둬야 했다.

     “미안합니다, 아스타시아.”

     “괜찮아요! 오히려….”

     “그건 안 됩니다.”

     나는 아스타시아가 말하려고 하던 걸 바로 차단했다.

     “아스타시아를 싸우게 할 수는 없어요.”

     “그레이…!”

     “아스타시아, 당신은 자신을 지키는 데 집중해 주세요. 적은 제가 쓰러뜨릴 테니까.”

     설령 아스타시아가 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녀를 싸우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자존심이나 고집 문제이기 이전에, 나라는 인간의 생존과 존재가 걸린 일이니까.

     “당신을,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설령 내가 죽을 만큼 힘이 든다고 하더라도, 아스타시아가 손에 피를 묻히며 평생을 괴로워하게 만들 수 없다.

     “당신이 저를 지금 이렇게 태워주는 것만으로도…당신은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고 있는 거니까.”

     “……네.”

     아스타시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 잠시 푹 자요. 저에게 모든 걸 맡기고.”

     전방.

     철도를 따라 달리는 길 앞, 마도자동선 한 대가 남쪽에서 우리가 달리는 왕도 방향으로 올라오고 있다.

     “하.”

     아스타시아가 짧게 혀를 찬다.

     동시에 페달을 짧게 몇 번 빠르게 밟으며, 손잡이를 앞뒤로 비틀고 상체를 숙인다.

     “역시나…!”

     “…….”

     따로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마도자동선이 아닌, 아스타시아를 위해 마련된 마도바이크를 타고 지브롤터로 향하는 이유가 있다면.

     “숙여요…!!”

     잠시 무언가 반짝인다 싶은 순간.

     콰ㅡㅡㅡㅡ앙!!!

     강력한 폭발이, 마도자동선에서 일어났다.

     “…….”

     “역시나.”

     “그레이. 알고…있었죠?”

     “예.”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배는 폭발해도, 철도는 남아있을 테니까.”

     “…….”

     “아스타시아도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저…마석으로 연락이 오면, 즉시 말씀해 주십시오.”

     바이크 계기판에는 붉은색 마석이 하나 놓여있다.

     마도바이크 자체 부품이 아닌, 내가 아버지와 급히 이야기를 나눌 때 사용하던 비상 연락용 수정구가.

     “그 어떤 소식이라도, 반드시.”

     그 수정구는 현재 빛 한 점 반짝이지 않았지만, 나는 아스타시아를, 그리고 아버지를 믿고 눈을 감았다.

     설령.

     임종이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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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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