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33

        

         별명 짓기의 세계는 깊고도 심오하다.

         

         닉네임은 당신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같은 뻔하고 낡은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 주장을 간결하게 정리한 어구, 표어)의 얘기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그걸 진짜 이름처럼 내밀고 교류하거나 익명 계약까지 해가며 일하는 경우가 꽤나 잦으니까.

         

         본인이 가장 많이 보고, 또 보여주기 위해 빳빳하게 관리하는 명함 같은 물건이라 할 수 있을지도.

         

         …당연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세상에서 제일 성의 없는 깡계를 만든 주제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 말에 담긴 진의를 의심할 수 있다.

         

         지당하다. 음, 뭐.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나도 사실 원래 이랬던 게 아니지 않나?

         

         당장 나부터가 지구 상에서 가장 드물게 닉네임이 진짜로 본명이 되어버린 초 희귀 케이스.

         시민증은 물론 뇌리에도 선명하게 찍힌 아나스타샤라는 단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심사숙고해서 지은 그럴싸하고 어울리는 닉네임을 훨씬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럼 그 정체불명의 잘 모루겠소요~ idk 시리즈는 어떻게 된 것이냐 간략하게 해명을 하자면….

         

         어… 음, 너무 고심해서 지으면 패턴 같은 게 드러날까 봐 그냥 그때 떠오르는 대로 지은 건데, 막상 두 번만에 뜻밖의 스토커에게 잘못 걸려서 들키고 나니 정말 뭐라 할 말이 없네. 시발.

         

         심지어 적당히 물에 물 탄 듯 지내며 자료나 얻으려던 계정이, 시험 삼아 글 몇 개 썼다고 반영구 박제 된 걸로도 모자라 친구들에게 이렇게 놀림까지 당하고… 존나 이게 맞아?

         

         ‘어허허, 이 빚은 언젠가 반드시 돌려주겠다 이 가혹한 세상아~’

         

         어울리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 잡은 채 속으로 되도 않는 주접을 떤다 한들 할 일이 바뀔 턱이 없다는 것도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하여간 전엔 온갖 이상한 메시지들의 발신자 명단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대강 그 놈이 그 놈인가보다~ 하고 넘어갔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각 잡고 하나하나 읽어 비속어 사이에 감춰진 진의를 들여다볼 차례.

         

         그나마 마리나와 로잘린 모두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닉네임과 매칭시킬 실제 신원, 그리고 주의할 점을 메모처럼 적어둔 리스트를 공유해줘서 메시지 하나 볼 때마다 일일이 송신원 추적을 하지는 않아도 될 예정인 게 다행이 아닐까?

         

         삐릭…!

         

         빌린 마리나의 부계정 접속은 어디까지나 잘 유지한 채로, 중앙 연산 장치의 내부 파티션을 나눠 작동한 가상 시스템에도 딥 웹을 열고 내 계정 정보를 넣어 구시렁거리며 로그인했다.

         

         …아, 진짜 싫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을뿐더러 어디 써먹을 일도 절대 없다 생각해서 망친 시험의 성적표를 뒤늦게 들춰보는 기분이라 도저히 의욕이 안 난다. 응? 의욕이!

         

         [ 유휴 시간, 1일 9시간 23분 17초만의 재접속을 환영합니다 해킹잘모름 님! 현재 총 72,892개의 읽지 않은 메시지가…. ]

         

         “어허!! 이게 새 파티션에서 좀 열었다고 그새 또 설정 초기화를.”

         

         지어서는 안 될 죄를 품은 것 마냥, 속이 얹히고도 남을 엄청 부담되는 숫자를 망설임없이 주절주절 늘어놓으려던 시스템 음성을 다급하게 꺼버렸다.

         

         나지막하게 내 머릿속에서만 울리는 사이버웨어 안내를 누가 엿듣는 건 아니지만, 그간의 미묘한 무신경함을 반복 지적되는 것 같아서 별로 막 듣고 싶은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하지만 내게도 그런 태도를 취한 변명거리 정도는 확실하게 있다.

         …사실 변명처럼 가볍게 말할 사안이 아니기는 한데 뭐 어쨌든지간에.

         

         전에 장황하게 떠들었던 것처럼 꼭 현실이 너무 재밌고, 초능력 같은 능력이 생겨서 눈 돌릴 겨를이 없다는 것만이 아니라.

         

         내심 이런 장난과 가벼운 인터넷 상의 교류를 한껏 즐기면서도, 동시에 묘하게 기피하려는 더럽게 모순된 태도를 취한 이유가 분명 있다는 소리다.

         

         “……후으.”

         

         고개를 스윽 돌려. 이제는 숫제 막 손짓 발짓에 섞어 참고용 시각 자료까지 허공에 띄워가며 못 알아먹을 소프트웨어 지식을 교류하느라 바쁜 내 일행 남장 여자 두 사람을 비롯해, 로비에서 신나게 떠들고 있는 ‘사회적 불량아’ 유저들을 쭉 훑어봤다.

         

         나처럼 존재 자체가 세계의 착오(Bug)나 다름없는 유별난 인간이 작정하고 시스템의 허점을 비집어 뜯지 않는 이상 벗겨지지 않는, 한 때 세계 최고의 천재들이 모여 만들어낸 커뮤니티 시스템이 보장하는 견고한 익명성의 가면.

         

         아무리 관심이 쏠렸다 한들 당사자가 일부러 들여다보기로 마음먹지 않았다면 그냥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이 무채색 여흥에 세상 바뀌는 줄 모르고 취하기란… 정말 쉬운 법이거든.

         

         무작정 아늑한 집 한 귀퉁이에 틀어박혀, 끊임없이 재밌는 소식을 전해주는 화면을 라디오 삼아 놀고 있으면 모든 고민이 멀어지는 것 같다.

         

         골치 아픈 폭력 사태도 없고, 아찔한 총성도 안 들리는 건 물론, 피와 화약의 아린 냄새에 콧등을 찌푸릴 필요조차 없다. 문자 그대로 외부의 위협이 소멸한 상태에서 편히 우리 제로의 보살핌이나 받으며 틀어박히는 셈이지.

         

         목적도 기력도 서서히 상실해가는 대신 귀찮은 노동과 금전적 어려움 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아무런 근심 걱정없이 계속 침대에서 뒹굴뒹굴.

         

         그리운 21세기 한국을 추억하며 막연하게 겹쳐보는 걸 넘어 모든 현대인의 꿈이나 다름없는 궁극의 평화를 이룩할 수 있음에도 그 유혹을 거절하는 건… 참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말해두겠다.

         

         아니, 농담 없이 진짜로.

         

         다가올 고난과 역경의 시나리오나, 어떤 루트를 선택할지 모를 주인공 같은 존재를 대비해 리얼 라이프 쪽에 남부러울 것 없는 준비를 해둔 나조차 흔들리는데 다른 이들은 오죽하겠나.

         

         어차피 여기서 일하는 걸로도 통장에 크레딧 따박따박 꽂히는 해커들, 아니면 극단적으로 그런 생계 수단이 없는 이들조차 빠지는 걸 보면 말 다했지.

         

         괜히 넷 정키가 큰 이슈라거나 장기간 가상 현실 이용은 마약이나 다름없을 수준의 신경 물질 분비와 호르몬 교란을 일으킨다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다.

         

         그러니, 잊지 말고 명심해라. 아나스타샤, 나.

         

         너에게 있어 잃어버린 현실은 여기도 아니고 그냥 접속을 끊은 바깥도 아니며 훨씬 머나먼….

         

         “……씨발.”

         

         그렇게 부정해 버리자니 내가 맺어온 모든 관계, 다져온 인연을 거짓이라 매도하는 것처럼 느껴져 속이 한없이 매스꺼워졌기에 머리를 거칠게 흔들어 잡념을 털어냈다.

         

         자, 그만 정신차리고 일하자 일.

         나도 모르게 사이버 세상의 요사로운 마력에 홀려 감수성 풍부한 상태가 되지 말고!

         

         어디 스팸 메일이나 하소연에 가까운 것들은 좀 넘겨버리고.

         

         [ RillDdox : 해킹잘모름 형씨! 보아하니 개발 짬도 그렇고, 능력 좀 되는 은둔 아키텍쳐인가 본데. 비즈니스적으로 괜찮은 제안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지 않겠어? 댁이 해석한 커뮤니티 코드를 바탕으로 범죄자나 지명수배자를 위한 전용 연락망 및 거래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서 수수료 장사를 해버리면…! ]

         

         우선은 릴 디독스, 긍정파…라기보단 변화에 거스르는 건 바보짓이라 여기는 경향의 중견 프로그래머라고 한다.

         

         계산적인 측면에서 벌인 일이라 해도 후배 양성 경력도 좀 있고, 사업 수완이나 감도 쌩쌩하게 살아있는 편이라 여러 해커들에게 인망이 있는…? 한 무리의 견해를 대표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라 카더라.

         

         내가 못 들어본 걸 보면 원작에선 기업 상대로 납작 엎드린 채 조용조용히 넘어갔던가, 모종의 이유로 쓱싹 당했던가. 어떻게 살짝 기억만 해두는 걸로.

         

         [ 左將軍奉先 : 我们的朋友别无选择。因为你,我受了很多苦。我要补偿 ! ]

         

         엥…? 뭐여 이건. 일단 닉네임을 직역하면 좌장군 봉선? 진짜 무지막지한 별명을 쓰네.

         

         리스트에 있는 사람이라 남겼는데, 정작 내용은 무슨 나 때문에 피해를 입었으니 금전적으로 보상하라는 명령조 하달문을….

         

         ……아, 중국계 해커들한테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럼 이건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데? 책임 덮어씌우기로 일방적으로 굽혀가면서 협상을 할 필요는 없지만 차이나 타운에 갈 일이 생길 예정이긴 하니, ‘서로에게 이득이 될 일이 있을 겁니다.’ 정도만 보내 놓을까.

         

         [ Nyx大好き : 이렇게 절 무시하는 걸 보면 언니 본인일 가능성은 좀 적고, 못해도 언니 밑에서 일하시는 분이 관리하는 계정 같은데. 사적으로 쓸 수 있는 언니의 연락처 하나만 알려준다면 제 명예를 걸고 비밀 계좌에……. ]

         

         아, 요게 그 로잘린이 구태여 읽을 필요가 전혀 없는 만큼 슬쩍 넘겨달라던 쪽지구나.

         

         비록 비대면 만남이기는 해도 오랜만에 다시 인사할 기회가 생겨서… 나름 뭔가 만족했다고 했으니 뭐, 한참 밀린 기록을 굳이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건 낭비지. 할 말이 있으면 얼마든지 직접 하지 않겠어?

         

         따지고 보면 이것도 일종의 편지 같은 건데, 보낸 당사자가 이렇게 빨리 다시 얼굴 보게 될 줄 몰라서 그런 만큼 부끄러움에 물러달라 한 셈이니.

         

         [ Flamekeeper123 : A양?? 설마 진짜, 아예 이런 류 연락망을 방치하시는 건 아니리라 믿을게요…? 저도 그쪽 도깨비 씨와 약조한 걸 지키려고 직접적으로 컨택하는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데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귀하가 체제에 적대할 의지가 없고, 이직 또한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는 둥 상부에 좋은 말만 지어내는데도 정말 한계가 있다고요! ]

         

         “…씁.”

         

         그리고 이제 존나게 거슬리고 께름칙한 메시지가 바로 여기 있었다.

         밀려오는 찝찝함에 자동으로 마른 입술을 적시게 되는 건 우연 따위가 아니리라.

         

         ‘Flamekeeper123’ 마리나 왈,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기업 특유의 싸한 기색이 감도는 유저이며. 거기에 로잘린 피셜, 특이사항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결과적으로 엘리시움의 이득이 되게 여러 사건들을 유도한 기록이 있어 끄나풀일 확률이 높은 인물.

         

         그래도 둘 다 잘도 어림짐작으로 맞췄네. 쩝.

         

         사실 두 사람의 평가를 세세히 참고할 필요도 없이, 내게 보낸 말들을 보면 감출 여유도 없이 직설적으로 이런저런 말들을 막 쏟아낸 상태였다.

         

         대놓고 위장용 계정 중 하나를 까발리면서까지 경고를 보낼 정도로 엘리시움은 이쪽 해커들이 소란 피우는 걸 원치 않아 하는 모양인데… 이것들이 진짜 통제광이지. 그에 비하면 솔직히 내 억지는 귀여운 편이고.

         

         경고에서 협박으로, 그 다음 제안에 회유까지.

         

         오래된 메시지에 전자 쪽이 많았다면 해킹잘모름의 침묵 겸 잠수가 길어진 최근으로 올수록 후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지는 게 웃겼다.

         

         실컷 벽 보고 떠든 걸 몸값 높이기 전략이나 비대한 담력으로 인지한 것 같은데 이것 참 영광이네요~ 예.

         

         살짝 빈정거리는 느낌이 가미되기는 했지만, 이들이 바보 같은 사람들은 절대 아니다.

         

         사교성에는 하자 좀 있어도 외려 지금 사회에 나가 있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이나 회사원들보다 고학력…이라는 개념은 이젠 없으니 고도의 학습력과 지능 지수를 자랑하는 인재들.

         

         탐욕에 불이 지펴질 정도로 얻어먹을 게 있고. 주목해야 한다는 걸 이성적으로, 또는 본능적으로 깨달었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은둔 고수의 의중을 살피려는 거겠지.

         

         헌데 그렇다면 말이다.

         

         그들이 멋대로 덧씌운 선구자니 선각자니 하는 허황된 이미지에 백 퍼센트 부응하는 건 있을 수도 없을뿐더러 불가능한 일이지만.

         

         적어도 사이비 점쟁이 흉내를 내서 ‘날 따르면 그만한 이득은 볼 수 있다’는 믿음을 심는 걸로 이들의 힘을 유도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나?

         

         내 능력이 너무 특징적이라 공공연하게 자주 꺼내기 껄끄럽다? 그럼 여차할 때 은근히 궂은 일을 대신 좀 미룰 수 있는 하청을 잔뜩 만들어버리면…?

         

         “…조금 시끄럽고, 스케일이 커져서 불똥이 여기저기 튈 수는 있겠지만. 재미 볼 여지가 꽤.”

         

         마침 타이밍도 딱 큰 이벤트를 앞둔 시점.

         

         단지 저기 엘리시움 코퍼레이션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할 테니 그에 대한 밑준비나 후속 조치만 확실하게 한다면 과감한 결단 한 번으로 두고두고 써먹을 선택지를 개방하게 될지도 모른다.

         

         “……저기, 있잖아. 마리나? 로잘린??”

         

         “어엉?”

         “네, 언니?”

         

         과연 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나지막한 부름에서 묘한 흥미로움을 감지한듯, 둘 모두 곧장 토론을 중단하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수습을 도와달라고 부른 게 무색하도록. 더 큰 소란과 이슈로 기존의 말썽을 덮는다는 아이디어를 보고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할지, 약간 눈치 보이고 신경 쓰이긴 하네.

         

         “요즘 시끌시끌한 저기 아르카디아 미친놈들이 주장하는 거랑 비슷하게. 네오 헤이븐에 진짜 운석이 떨어질 테니 나를 따라서 투자하라고 한다면, 너희는 어떻게 할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전지전능한 마녀가 나타났다.

    …연재일이 무려 하루가 늦었습니다.
    오늘 쉬는 걸로 컨디션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양질의 연재분을 보여드리기 위하여 병가를 낸다 생각하고 제대로 휴재 공지를 적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도 널뛰기 하는 날씨에 휘말리지 않도록 부디 건강 챙기고 조심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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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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