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33

       여신을 옴팡지게 욕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화나진 않았다.

       

       아니, 화낼 수가 있을까?

       

       종족은 다르더라도 신분은 같을 수 있는 법.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는 존재에게 어찌 쌍욕을 퍼부을 수 있을까.

       

       …했었나?

       

       아무튼.

       

       여신에겐 분노보다는 아련하다는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내 몸은 왜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해명을 들을 필요가 있는데.

       

       “동생은 정령이 된 거예요. 여신님께서 기회를 내려 주신 것이지요.”

       

       그렇단다.

       

       정령이 되었단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마왕군 최고 간부였던 내가 정령이란다.

       

       참 가관이군.

       

       하지만 더욱더 점입가경인 점은 이 육신에 있었다.

       

       “엉니.”

       

       나는 앨리스의 소맷자락을 꾹꾹 붙잡았다.

       

       그러자 앨리스가 나를 번쩍 들어올리며 눈을 맞추었다.

       

       “왜요, 동생?”

       “나 왜 이로케 된 거야?”

       

       지금의 나는 아기였다.

       

       그냥 응애도 아니고, 응에테르가 된 셈이다.

       

       정령이면 성체인 그대로 코딩해서 넣어 줘도 됐었잖아. 왜 굳이 어린애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냐고.

       

       그런 와중에 정신연령은 또 성인이어서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인상을 찡그리고 있자 앨리스가 후후 웃으며 비행기를 태웠다.

       

       “어차피 정령의 영아기는 금방 지나가요. 곧 정상적으로 말하고 걸을 수 있게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구래?”

       “네. 보세요. 아직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을 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그렇네.

       

       아마 여신이 얘기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가 이것이겠지. 사람으로는 환생 못 하되, 정령으로는 가능하게.

       

       기억이 온전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다.

       

       아마 이대로 며칠 지나면 성령(成靈)이 되겠지.

       

       하루라도 빨리 로테와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

       

       아, 기대된다.

       

       그래, 기대된다.

       

       아주 기대가….

       

       기대하면 배신을 당한다고 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 모습 그대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내 희망은 작전주 떡락하듯 박살이 나고 말았다.

       

       “언니.”

       “왜 그래요, 동생?”

       “내 몸 왜 이래.”

       “뭐가요?”

       

       나는 앨리스에게 10분 단위로 측정한 내 신장 도표를 보여주며 따지듯이 물었다.

       

       “왜 사흘 전부터 내 신장 변화율이 지수적으로 감소하는 건지 설명 좀 해줄 수 있어?”

       

       정령은 성장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걸 알고는 걸음마를 뗀 시기부터 시작해서 내 키를 지속적으로 쟀다.

       

       그렇게 얻어진 촘촘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회귀분석을 진행. 이런저런 파라미터까지 넣어 오차율을 최대한 줄인 결과, 현재 내 키가 147cm에 이르러야 한다는 예측을 얻어냈다.

       

       하지만 결과는 상당히 다르게 나왔다.

       

       지금 내 키는 102cm.

       

       인간으로 치면 5살 정도에 해당하는 신장이다. 예측한 것과 40cm 차이가 난다. 원래 키까지 가려면 60cm는 더 커야 했고.

       

       처음에는 쭉쭉 자라서 괜찮을 줄 알았다. 당장 환생한 게 일주일 전인데, 벌써 다섯 살 수준까지 컸으니까.

       

       문제는, 사흘 전부터 신장 증가율이 비트코인 떡락하듯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 그걸 얘기 안 했네요.”

       “뭘?”

       “정령에겐 성장에 멈춤이 오는 시기가 몇 차례 있어요. 그때를 정체기라고 하는데, 동생은 지금 딱 그 시기인 거예요. 앞으로 2년 동안은 그 모습 그대로일 거랍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뭐라고 말해야 하지?

       

       인간들은 할 말이 없으면 뭐라고 말하더라?

       

       “지, 지랄.”

       “쓰읍, 동생!”

       

       앨리스가 내 입을 찰싹 때린다.

       

       손끝에서 파직, 하고 정전기가 일었다. 아프기보단 엿같았다.

       

       “정령은 나쁜 말 하면 안 돼요!”

       “알 건 다 알거든? 나 애새끼 아니라고!”

       “동생!”

       

       입술을 또 맞았다.

       

       개같은 거.

       

       지구에서 잘만 살고 있다가 납치당해서, 금안족 마수를 거쳐 이제는 5살 꼬마 정령으로 2년을 살아야 한다고?

       

       장담컨대 나보다 파란만장하게 사는 이는 없을 것이다.

       

       “동생의 몸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예요. 그전까지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생각해 보자고요.”

       “하계를 조율하는 거?”

       “맞아요.”

       

       정령족은 아렌스 대륙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 종족.

       

       당연히 나에게도 부분적이지만 관리자 권한이 있다.

       

       현재 내게 주어진 임무는 언니를 보조해 인간계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럼 하계로 내려갈 수 있는 거야?”

       “아직 그 몸으로는 무리죠.”

       “젠장.”

       

       찰싹!

       

       “여길 보세요.”

       

       앨리스가 손을 휘적거리자 수경이 나타났다. 은처럼 번쩍거리는 거울 너머로 아렌스 대륙이 비쳐 보인다.

       

       “인간계가 어떤가요?”

       

       어떻냐니.

       

       인간계가….

       

       개판이네.

       

       “엘프는 전후 배상 책임을 카우렐리아에 살던 금안족에게 떠넘겼어요. 마왕군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에서였죠.”

       “저 미친 새끼들.”

       

       앨리스는 내 입을 두어 대 더 때린 다음 말을 이었다.

       

       “한편 구제국 사람들에게는 마왕군 잔당을 전부 처형하라는 공문서를 보냈죠.”

       “정확한 문서 내용이 뭐였는데?”

       “해당 약속만 이행하면 구제국 영토의 적법성을 인정해 주겠다는 내용이었어요.”

       “허어.”

       

       어이가 없는 일이다.

       

       원래 인간이 살던 땅인데, ‘인정해 주겠다’라니.

       

       “엘프들이 뭐라도 돼?”

       “국제정치적으로 틀린 판단은 아니에요. 상도덕이 없어서 그렇지.”

       

       앨리스의 말도 틀리진 않다.

       

       ‘세계에는 경찰이 없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정령족이 경찰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면 언니. 나는 뭘 해야 하는데?”

       “동생은 똑똑하니까 2년 동안은 내부 관리와 이상 징후 관찰에 집중해 주세요.”

       “관찰만 하고 하계로는 못 내려가는 거야?”

       “네. 그 몸으로는 연약해서 무리랍니다.”

       “진짜로?”

       “진짜로.”

       “정말로?”

       “정말로요.”

       

       그 뒤로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매번 똑같은 대답만 들었다.

       

       로테, 프레이, 카샤, 블루베리.

       

       그리운 이들을 만나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듯했다.

       

       

       **

       

       

       로스차일드 경제부장관의 건의가 최종 채택되면서 구제국은 잠깐의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당시 경제부의 제안은 이러했다.

       

       – 정령도, 군대도 지쳤습니다. 경제는 궁핍하고 국민은 피폐합니다. 여기서 인간들과 척을 지면 공멸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예상 세수와 전쟁으로 입은 손실액을 증빙 자료로 제출했다. 통계청의 자료라면 신뢰할 만하다. 그리 판단한 대통령과 각처 장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서가 바로 ‘마샬 독트린’.

       

       앞으로 아렌스 대륙의 외교질서가 어떻게 개편될 것인지에 대한 가늠쇠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국에서는 위와 같은 제안을 드리는 바입니다.”

       

       살리에르 영지. 레너윌 하스펠트의 임시 집무실.

       

       새로운 국가 임시정부의 수반이 된 레너윌은 엘프국의 외교관이 가져온 문서를 천천히 읽어가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카우렐리아 행정부의 뜻이란 말인가?”

       “국민의 뜻이지요.”

       

       외교관과 레너윌.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맞추었다.

       

       이 앞으로는 한 치 앞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눈빛.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냐는 눈빛.

       

       양측의 무언(無言)이 오가며 첨예한 번갯불을 만들어낸다. 앞으로 양국 사이의 한랭전선이 다가올 것이라는 암시였다.

       

       레너윌은 문서의 첫째 문단에 위치한 문장을 짚으며 따졌다.

       

       “엘랑카야 이남부터 티림스 강 북부까지가 전부 우리 땅이요. 이런 식으로 카우렐리아의 승인을 받을 필요는 없소.”

       

       마샬 독트린의 첫 번째 내용.

       

       – 구제국의 영토는 카우렐리아에 귀속하도록 한다.

       

       외교관은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가 땅과 자원을 취하는 것은 고대부터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천 년 전, 제국도 타르케닐 상대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당시 우리나라와 타르케닐은 적국이었소. 지금 카우렐리아와 우리 정부는 동맹이고. 같은 승전국인데 승자가 승자의 영토를 취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소?”

       

       외교관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승전국? 이미 멸망해버린 제국이 승전국이라고?

       

       아니, 애초에 마왕이 쓰러지자마자 마왕군 잔당과 화친을 맺은 것들이 동맹 운운할 수는 있나?

       

       이에 관해 묻자 레너윌이 강변했다.

       

       “화친이 아니라 단순 동행이요. 제국은 승전하고, 제국은 패전했소. 그러니 마왕군 잔당을 이래저래할 권리는 우리 제국에게도 있는 거요.”

       

       이때쯤 외교관은 실성했다. 그가 끌끌 웃다 말고 대꾸했다.

       

       “역시, 만만찮은 분이십니다.”

       

       

       나라는 멸망해도 사람은 남아있다.

       

       하스펠트의 핏줄이 썩지 않는 이상, 제국은 다른 형태로라도 그 명맥을 이어나가겠지.

       

       “얼마 전 발표한 교리 일부를 수정하시오. 외교 정책을 펼치는 건 그대들의 자유지만, 구제국령은 우리가 적법하게 가져갈 것이오.”

       “…흐음.”

       

       외교관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계산기를 두들겼다.

       

       동시에, 카우렐리아의 외교관은 마샬 독트린의 두 번째 내용을 떠올렸다.

       

       – 앞으로의 외교 정책에 있어 다종족주의와 다원주의를 보장한다.

       

       거죽은 좋다.

       

       민주주의, 인권. 그런 개념에 딱 부합하는 표현이다.

       

       실상은 다르다.

       

       “공작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저도 돌아가 이 일을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계산을 마친 외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너윌 또한 험악했던 얼굴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생각했소.”

       

       레너윌은 외교관을 손수 마당까지 배웅했다. 외교관의 뒤로 엘프 마도사 몇 명이 따라붙었다.

       

       신식 골렘이 오르기 전. 외교관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 떠나기 전에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오.”

       “새로 세우시고자 하는 나라에는 수인족이나 금안족이 포함되는지요?”

       “…….”

       

       레너윌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정해진 건 없소.”

       “알겠습니다.”

       

       카우렐리아의 외교관은 꾸벅 인사한 뒤 자동차 문을 닫았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가는 길 조심하시오.”

       

       용무를 마친 외교관이 떠났다. 레너윌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집무실로 돌아왔다.

       

       보인다.

       

       속이 뻔히 보이는 대화였다.

       

       ‘우리와 수인족을 이간질하려는 속셈이군.’

       

       마왕군과의 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많이 줄어버린 상황.

       

       제국과 인간이 부흥하려면 수인족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런 마당에 엘프들이 먼저 수인족을 포섭한다?

       

       구제국은 그 명맥마저도 끊기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두지는 않겠다.’

       

       레너윌은 재빨리 계산기를 두들겼다.

       

       다행히도 그는 엘프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엘립소이달 님, 1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엘립소이달 님의 말씀대로 앞으로 세 달 정도만 있으면 영화 ‘오펜하이머’가 나옵니다. 정말 기대됩니다! 비록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는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 완결이 나겠지만요… 독자님 또한 앞으로의 모든 일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라겠습니다. 본편 완결을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