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34

     #19-12-22.

     누구나 결혼을 할 때 사랑은 영원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사랑을 이용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용하여, 매국노 그레이가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여인들을 홀렸구나. 잘 했다, 그레이. 내가 누아르를 단련시키는 동안, 너는 그곳에서 더 많은 영애들을 홀려 우리 편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라.

     나는 아버지가 내게 명령을 내렸던 것 이상으로 더 많은 목적을 달성했다.

     난봉꾼 그레이.

     처음에는 ‘어떻게 나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닐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나를 비난하던 여인들도, 차츰 내가 그런 말에 아랑곳않고 마구 만나고 다니니 다들 그러려니 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좋은데? 그 정도 남자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런 자부심을 가질만 하지.

     

     나중에는 그런 나의 난봉꾼 행위에 대하여, 오히려 나쁜 쓰레기같지만 얼굴을 보고 용서해줄 수 있다고 하는 이들도 있더라.

     남자들에게서는 그다지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 그레이 지브롤터 때문에 우리가 나중에 결혼할 여자들이 전부 이미 남자에게 길들여진 여자가 되어서 올 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그 덕분에 나는 여러 남자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했다.

     음해였다.

     지브롤터의 맹약 아닌 맹약 때문에 나는 20살까지 일선을 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검정에 서 있는 자들은 그 검정에 발을 들이고 있는 나를 자신들과 같은 검정이라고 생각했던 모양.

     나는 그렇게 선을 넘지 않았음에도 여러 여자들을 기어이 건드리고 만 쓰레기 난봉꾼이 되었고-

     -그래요! 저는 그레이 경과 하룻밤을 함께 보냈답니다!

     

     내가 정보를 캐내기 위해 유혹했던 영애들이 오히려 그 소문을 이용하여 내게 ‘책임감’을 강요하게 만들며, 나는 사실상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 쓰레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지브롤터의 수호자가 그럴 리가 없소! 나 팰우드 롤랜드는 그레이 지브롤터가 그 누구보다도 올곧은 수호자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바!

     나를 옹호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정보를 캐내기 위해 친해지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나의 이유있는 접근을 ‘친구’로서 받아들이면서 나를 위해 목소리를 내어준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나를 ‘지브롤터 가문의 후계자’정도로 여겼다.

     나중이 되어서야 그가 왜 그런 시각에서 발언했는지 이해했지만, 당시에는 그저 롤랜드 가문의 후계자라는 자 또한 나를 그저 노스트럼의 수호자로서 생각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

     하지만 그건 서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잃고 난 뒤의 일.

     하여튼.

     그렇게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거짓된 사랑을 속삭이고 우정을 나누고, 교우를 다지고 사교 활동을 하며 정보를 모았다.

     그 과정에서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다. 

     하나.

     “그레이 경. 당신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까? 그런 당신을 저는…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나리아 공주와의 사이는 나빠졌다.

     아버지는 내게 나리아 공주를 유혹하여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의 위치나 왕궁의 병력 구성, 혹은 나중에 왕가에 침투할 수 있는 ‘왕족들만 아는 비밀통로’ 같은 걸 알아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나리아는 나를 철저하게 거부했다.

     난봉꾼이라는 것도 혐오했고, 그런 주제에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도 싫어했다.

     나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이성적인 관심을 보인다는 것 자체를 꺼리는 모습도 보였다.

     이제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순수히 17살 어린 남자의 자존심을 심하게 긁는 상황이었다.

     

     순진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날 이렇게 만든 건 내가 처음이야’라고 하면서 사교계에 연기를 펼쳤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철혈과도 같은 공주가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어떤 모습인지 한 번 보고 싶은데.

     지브롤터 협곡 만큼의 철벽을 치는 나리아 공주가 사랑에 빠졌을 때의 모습이 지켜보고 싶었다.

     이런 여자가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어쩌면 그 때의 나리아는 그런 나의 저열한 의도를 눈치챘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속삭이는 사랑이 진실된 사랑이 아닌 ‘나리아를 사랑하게 만든 그레이 지브롤터’라는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었다는 걸.

     나리아는 어려운 적이었다.

     나는 아카데미 3년 동안 나리아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그 3년.

     그 3년의 시간 동안, 나는 어느 한 여인의 어프로치를 지속적으로 받았다.

     “오늘은 이런 도시락을 싸왔답니다!”

     “이미 밥 먹었습니다. 공주님이나 실컷 드십시오.”

     “오늘은 사탕이에요! 여기, 아앙.”

     “거기 두고 가십시오. 단 거 안 좋아합니다.”

     “이번에 시험 나오는 내용 정리한 거 있는데 보실래요?”

     “시험 안 쳐도 A+입니다. 필요 없습니다.”

     “부우우.”

     아스타시아.

     그녀는 나리아가 나를 매몰차게 거부하는 것처럼, 내가 자신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내게 들이댔다.

     결국 아카데미 3년 내내 기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되었느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퍼지게 되었다.

     아스타시아는 제국의 유학생이면서 기어이 내가 학생회에 들어가자 그 뒤를 따라들어와서 함께 있으려고 했다.

     심지어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우수한 학생회장이 되어, 내가 나리아에게 공개적으로 데이트를 권유하는 사교행사도 열고는 했다.

     3년 동안의 열렬한 구애 끝에, 함께 3년을 지낸 동학년 학우들에게도 ‘슬슬 이 정도면 포기할 때가 되지 않았냐’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아스타시아가?

     아니.

     슬슬 나리아를 향해 들이대는 건 포기하고, 등 뒤에서 자꾸 달라붙는 아스타시아를 품어주는 건 어떻느냐.

     그런 이야기.

     제국의 유학생이거나 하는 것과 상관없이 학생들이 할 수 있는 말이기는 했다.

     누군가는 제국과의 관계가 끊어질테니 사실상 소위 ‘먹고 버리라’라는 저열한 의도로 키득거리기도 했다.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난봉꾼 그레이는 여러 여자들의 첫키스 정도는 가져간 다음, 원하는 정보를 얻은 뒤로는 방치하거나 드문드문 만났으니까.

     누군가는 제국과의 관계가 호전된다면, 지브롤터에 제국의 황손녀-당시에는 그랬다-를 지브롤터에 인질로 잡아둘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당연한 말이었다.

     왕국과 제국의 교류는 일절 없었고, 세이레네 해협이 열리지도 않았으며, 공식적으로 보낸 사절은 그저 아카데미 입학에 관한 논의를 위한 외교부 직원과 제국 유학생들 뿐이었으니까.

     아스타시아 황손녀를 이용하라.

     왕국인으로서, 노스트럼의 수호자로서, 남자로서, 수컷으로서.

     많은 이들이 그렇게 나에게 요구를 했지만, 나는 아스타시아 황손녀에게 함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던 여자.

     이미 노스트럼의 많은 영애들이 그러한 눈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아스타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존에 대한 절박함.

     그레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접근하는 치밀함.

     본성을 숨기고 오직 상대가 좋아하는 모습만 보여주고자 하는 내숭.

     그러한 모습에서 나리아에게 접근하는 나를 보는 것 같아, 나는 어쩌면 그녀에게 어처구니없는 동정심을 가졌던 걸지도 모른다.

     혹은 지쳤는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그 사랑의 흔적을 주고받았지만.

     만들어진 사랑이든.

     목적이 있는 사랑이든.

     

     오직.

     아스타시아, 그녀만이 나에게 계속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니까.

     

     * * *

     #19-12-31.

     “좋아합니다, 나리아.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싫습니다.”

     성인이 되기 직전, 나는 나리아에게 고백했다.

     이유?

     아버지가 시켰다.

     어머니가 그렇게 되었는데도 굳이 결혼을 시키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차마 짐작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건이 있음에도 노스트럼의 미래를 생각하는 등신 머저리같은 지브롤터’에 대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걸 노렸겠지.

     자신의 대에서는 비록 사교계에서 흉흉한 소문이 도는 관계가 되었지만, 자식들의 대에서는 그 관계가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런 전형적인 지브롤터, 노스트럼의 수호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줬기에 그 누구도 아버지가 매국하리라고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도 고백은 너무한 게 아니냐.

     오기가 생겼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모든 졸업예정자와 재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고백을 하는데도 거절할 거냐고 상황을 만들었다.

     거절당했다.

     제국력으로 앞자리 수가 바뀌며 성인이 된 소년에게 있어, 그 거절은 너무나도 큰 상처였다.

     수치스럽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부아가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는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나리아가 성인이 되기 바로 직전.

     나리아가 어려서부터 아마도 누군가의 ‘스페어’로서 자라면서, 그 보험이 활성화 되었다는 걸 알리는 시기.

     가장 자기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 정작 나라는 자는 제대로 돕지도 않으면서 그저 자신을 덮치기 위한 사랑을 속삭이기에, 그녀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를 거부했었을 테지.

     다행히 나리아는 죽지 않았다.

     

     당시의 무능왕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냈고, 굳이 시간을 감거나 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혹시나 늙어 죽을 때, 자기가 죽기 싫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면.

     

     하여튼, 나는 그 때 무너졌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아버지가 내린 임무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좌절하고 분노했다.

     “그레이.”

     그런 나에게도, 아스타시아는 다가와줬다.

     홀로 방 안에 틀어박혀 분풀이를 하는 가운데, 그녀는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위로하려고 했다.

     “괜찮아요?”

     “하…!”

     어쩌면-이 아닌, 그건 분명 찌질한 분풀이였다.

     “괜찮냐고요? 괜찮을 리가 없잖습니까!”

     “…….”

     “당신이라면 더 잘 알 거 아닙니까! 거부당하는 마음을!”

     “네, 잘 알죠.”

     자존감이 박살나고 무너져내렸을 때에도.

     “그렇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아스타시아는 나를 일으켜세워주려고 했다.

     

     “하…!”

     그런 나는 분노에 찬 나머지, 아스타시아를 그대로 침대에 밀어뜨렸다.

     “그렇다면.”

     

     아스타시아는 그대로 넘어졌고, 나는 아스타시아의 위에 올라타 강제로 그런 그녀의 외투를 뜯어냈다.

     

     “내가 이런 걸 하더라도, 당신은 상관없다 이겁니까? 예?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해야 하니까!”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분노를 쏟아내는 화풀이 대상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여전히, 당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아스타시아는 나를 위로해주고, 응원해줬다.

     “그리고 그 대상이, 다름아닌 제가 되어줬으면 좋겠고.”

     동시에, 그녀는 나를 바랐다.

     “어째서입니까? 대체 왜?”

     “음, 글쎄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그럴까.”

     아스타시아는 나를 올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그건 아마 수많은 이유 속에,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랑이 어느정도 깃들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더없이 순수한 미소로.

     “…그러면, 한 번 보여보세요.”

     나는 받아들였다.

     그리고 궁금했다.

     “무엇이 사랑인지.”

     누구보다도 사랑을 받고 자랐을 황녀가 가르쳐주는 사랑은 무엇일지.

     “음, 저도 잘은 몰라요.”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눈에서 누군가를 보았다.

     “한 번도 남에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사랑을 속삭이는 이들은 많았지만, 전부 거짓되고 허황된 말이었죠.”

     나 자신.

     “그러니까, 한 번 알아가보시지 않으실래요?”

     아스타시아 황손녀가 제국에 유학을 왔던 목적은 미인계였으며, 그 대상은 그레이 지브롤터였으니.

     “사랑을 한다는 게 뭔지.”

     그 미인계는, 그들이 성인이 되는 날에 성사되었다.

     지브롤터가 노스트럼을 포기하고 테르시안과 입을 맞춘 날.

     그 날.

     그레이 지브롤터는 매국노가 되었다.

     

    다음화 보기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