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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4

       제국은 수도를 중심으로 북부, 서부, 동부, 남부의 네 구역으로 나뉜다.

       

       이중 서부를 제외한 모든 곳이 황폐화됐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마왕군과의 전쟁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자근자근 밟으며 진격해 온 마왕군으로 인해 서부 살리에르 영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땅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서부만 멀쩡하였느냐?

       

       “고룡님 덕분입니다.”

       

       한때는 방사룡이라고 불렸던 존재.

       

       그러나 지금은 다시 고룡이라는 별칭으로 돌아온 요르문간드 덕분이었다.

       

       “고맙습니다.”

       

       아카샤는 요르문간드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전했다.

       

       “무, 무어냐. 갑자기!”

       

       요르문간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네답지 않구나. 원래대로 하게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마왕군은 진작 해체되지 않았나요?”

       “그렇다고는 해도, 자네가 존대를 하는 건 어울리지 않네.”

       “연배를 따져야죠.”

       

       요르문간드는 넋 놓은 표정으로 아카샤를 바라봤다.

       

       ‘이 흰둥이가 왜 이러지?’

       

       마왕군 시절에는 반말을 찍찍 내뱉고 다니던 아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나 겸손해졌다.

       

       “저, 그대에게 묻겠네. 뭐 잘못 먹었나?”

       “아뇨.”

       “다시 말하지만 존대는 필요없네. 우리는 동료이지 않은가?”

       

       아카샤는 고개를 내저었다.

       

       “은인에게 반말을 할 정도로 저는 무지하지 않습니다.”

       “…….”

       “고룡님께서 이곳 서쪽을 잘 보살펴 주신 덕분에 우리가 편히 정착할 수 있었으니까요.”

       

       요르문간드는 인족과 수인족의 연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수인들을 돌보았고, 전쟁범죄를 일으키지 않았으며, 인간에게도 관대하게 대해 주었다.

       

       구제국령의 대부분이 메마르고 갈라진 땅이 된 와중에, 이곳 서부 지역만이 유일하게 풍요를 잃지 않은 이유였다.

       

       요르문간드 덕분에 수인족이 더는 약탈을 해 오지 않는다.

       

       적어도 아카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네.”

       

       요르문간드의 생각은 그녀와 달랐다.

       

       “인족과 수인족의 관계를 원만하게 만든 건 여가 아니라 자네의 쌍둥이 언니지.”

       “에테르… 말인가요?”

       “그렇네.”

       

       한숨을 쉬는 요르문간드.

       

       그녀의 눈빛이 애잔함으로 젖어들었다.

       

       “예전에 있었던 일이네.”

       

       지금으로부터 대략 2년 전.

       

       홍수에 쓸려갈 뻔한 요호족을 구해준 소녀가 있었다.

       

       수인족이 배고픔에 못 견뎌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식량을 기약해준 소녀가 있었다.

       

       수인족과 제국인의 앙금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 준 업적을 세워낸, 금빛 눈동자의 소녀가 있었다.

       

       “그게 상천이네.”

       

       에테르.

       

       당시 에테르는 자신의 동급생을 도와주기 위해 살리에르령에서 공문서를 작성하고 전달했다.

       

       살리에르 백작을 통한 수인족의 지원을 약속했기에, 수인들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굶지 않을 수 있었다.

       

       “어떤 종족이든 똑같네. 배고프면 성이 나고, 배부르면 덕이 나지.”

       

       수인족 또한 마찬가지다.

       

       야만족이니 뭐니 해도, 결국엔 다 같은 지적 생명체인 것이다.

       

       “수인도 은원을 아네. 그러니 최소한 건드리지는 않는 것이야.”

       

       과거에 인간은 수인을 박해했다.

       

       냄새 난다는 이유만으로, 또 인간의 몸에 동물의 꼬리와 귀를 달고 있다고 하여 배척했다.

       

       종교의 권세가 인륜을 타작하던 시절에는 수많은 수인이 성전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금안족의 수만큼 희생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 요르문간드의 기억에도 찐득한 잔상으로 남아있는 과거였다.

       

       하지만 이젠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인족을 구원한 건 상천일세. 눈이 먼 여는 별다른 걸 해 주지 못했어 그래….”

       

       요르문간드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것은 떠나간 이를 추모하고자 하는 고소였으며, 또한 살아가려는 이들을 축하하고자 하는 미소이기도 했다.

       

       요르문간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무튼, 여 앞에서 낯뜨거운 소리를 할 것이라면 그 아이나 잘 돌봐 주게나.”

       “…로테, 말입니까?”

       “그래. 자신이 살게 된 대가로 친우가 죽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 그것이라면 안 봐도 뻔한 일이지.”

       

       아카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요르문간드의 말이 맞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제 언니가 없는 지금, 자신이라도 나서서 그녀를 위로해야 하니까.

       

       에테르도 분명히 그걸 바랄 것이다.

       

       한담을 마친 두 금안족은 피치블렌드 산 중턱에서 갈라졌다.

       

       

       **

       

       

       살리에르 저택은 외관부터 내부까지 옹골지게 남아있었다.

       

       비록 몇 달 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 거미줄과 먼지가 생겼었지만, 사람이 못 살 정도로 커다란 흠결은 아니었다.

       

       적당히 관리보수를 하고 나니 저택은 옛 모습을 금세 되찾았다.

       

       귀족의 집이라 그런지 남는 공간도 많았다. 저택의 주인인 크롬웰 살리에르 백작은 숙박비를 받지 않고 이곳에 가능한 많은 사람을 살도록 해주었다.

       

       때문에 저택 내부는 아침나절부터 활기찼다. 귀족과 노예, 인간과 수인이 엉켜사는 중심가로 탈바꿈한 셈이다. 

       

       신분이나 종족의 차이로 인해 가끔 싸움이 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백작이 나타나기만 하면 소란 따위 금방 잦아들곤 했다.

       

       아카샤도 이 저택의 객이었다. 갈 곳이 없는 금안족 소녀를, 백작은 딸내미 친구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주었다.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야.’

       

       한때 적이었는데.

       

       마수였는데.

       

       이렇게나 따듯하게 맞아주다니.

       

       그동안 무얼 위해 싸웠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왁자지껄한 메인 홀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야, 안녕?”

       

       쫑긋거리는 귀를 지닌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너는, 그때 그 꼬맹이…….”

       “꼬맹이 아닌데?”

       “…언니 친구구나.”

       

       보랏빛 머리카락을 지닌 요호족 소녀. 프레이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해왔다.

       

       ‘프레이 폰 파스트렌드.’

       

       에테르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테르의 친구는 곧 나의 친구.’

       

       전계마도의 대정령인 앨리스가 이르길, 아카샤 자신은 에테르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존재라고 했다.

       

       로테 살리에르와 마찬가지로 따듯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

       

       “지금까지 제대로 대화해 본 적 없었지? 반가워!”

       “어, 응….”

       

       어쩌다 보니 프레이의 손을 잡고 흔들게 된 아카샤.

       

       제 언니를 닮아서 그런 걸까? 서먹서먹한 이와 친해질 목적으로 대화를 나누자니 머쓱한 감정부터 들었다.

       

       “너도 로테가 있는 방으로 가려는 거야?”

       “그럴 예정인데.”

       “그러면 나도 끼워주라!”

       

       끼워달라니.

       

       이런 게 부탁할 만할 일인가?

       

       “마음대로 해.”

       “좋아! 우리 둘이 가면 로테도 분명히 좋아할 거야. 오랜만에 세 명이 모이는…!”

       

       거기까지 말한 프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세, 세 명….”

       

       아.

       

       아카샤도 말을 잇지 못했다.

       

       시끌벅적한 메인 홀에서, 둘만의 세계가 조용히 정지했다.

       

       지구에서 여러 인간군상을 겪으며 단련된 기존의 에테르와는 달리, 아카샤는 순도 100%짜리 너드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를 전혀 몰랐다.

       

       서로가 입만 우물거리던 그때였다.

       

       타탁!

       

       “이 수인족 꼬맹이, 언제 여기로 튀었어?”

       

       프레이보다 조금 더 큰 소녀가 나타났다.

       

       블루베리색 직모를 지닌 그녀는 프레이를 발견하자마자 쏜살처럼 다가왔다.

       

       아카샤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로즈마리.

       

       새로운 다종족 국가 건설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어야 할 그녀가 대뜸 휴식처에 나타난 것이다.

       

       “악!”

       

       순식간에 프레이의 뒷덜미를 잡아 끄는 로즈마리.

       

       인간이 되었기에 힘은 예전만 못했지만 그래도 괴력이었다.

       

       아니…. 그냥 요호족이 가벼운 건가?

       

       “너, 넌 뭐야! 이거 놔!”

       

       프레이가 뒤를 돌아보며 빽 소리를 질렀다. 

       

       “너 또 여기서 술이나 마시고 있었냐?”

       “내가 술마시고 있든 말든 뭔 상관인데!”

       “요호족 대표면서 잘하는 짓이다, 아주.”

       

       로즈마리는 쯧쯧 혀를 차댔다.

       

       “하스펠트 공작이 너와 날 불렀어. 국무회의든 뭐든 열릴 예정인가 봐. 빨리 가야 해.”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거 놓으라고!”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프레이 공주님은 사악한 로즈마리 마왕에게 납치당했다.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본 아카샤는 내심 안도했다.

       

       ‘다행이다.’

       

       무거웠던 분위기가 어찌어찌 환기되긴 했다.

       

       ‘가급적이면 언니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지.’

       

       에테르의 존재 자체를 이야기하는 건 저들의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꼴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카샤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아침, 세수를 위해 거울을 볼 때면 흠칫하곤 하니까.

       

       ‘테르 보고 싶다.’

       

       이젠 만날 수 없는 사람.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털어버려야 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정작 이 몸으로는 영영 털어버릴 수 없는 사람.

       

       “후우.”

       

       슬픔을 떨쳐내기 위해 심호흡을 한다.

       

       ‘침착하자.’

       

       지금의 목표를 잊으면 안 된다.

       

       그 소녀를 위로해야 한다.

       

       에테르가 없는 지금, 쌍둥이 언니의 빈자리를 대신해 줄 사람은 자기밖에 없으니까.

       

       아카샤는 큰 마음을 먹고 계단을 올랐다. 끼익, 끼익. 요란한 소리가 났다.

       

       예전에 2주간 저택에서 체류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로테 살리에르의 방 위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기다.’

       

       똑똑.

       

       “…….”

       

       노크를 하였으나 반응이 없다.

       

       다시 한번.

       

       똑똑.

       

       – 누구세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틀림없다. 아카샤가 아는 로테 살리에르의 음색이었다.

       

       비록 허물뿐이었다고는 하나, 아카샤와 로테 또한 유대를 쌓을 시간이 조금이나마 있었다.

       

       폭우가 들이치던 날. 우연히 염색을 했다고 구라치고 체류하던 날. 언니를 보고 나서, 마왕군으로 복귀하던 날.

       

       단편적인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야.”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알 수 없는 친밀함을 느낀 아카샤는 자연스레 그런 대답을 내놓았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우당탕!

       

       무언가 심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안 가서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그곳에는, 산발을 한 진홍빛 머리카락의 여자아이가 잠옷 차림으로 서 있었다.

       

       “아….”

       “…….”

       

       아주 잠깐, 생기가 돌아왔던 눈빛이 다시 동태처럼 변한다.

       

       이쯤에서 아카샤는 직감하고 말았다.

       

       실수했다.

       

       자신과 에테르의 목소리가, 완전히 똑같다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로테.”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1레벨 에테르나 다름없는 아카샤라도 엉망진창인 사람을 보면 용기내어 말을 걸기 마련이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감정이며, 공감이라는 능력이었다.

       

       “들어가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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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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