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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5

        

         종말론. 영어로는 보통 잘 들어볼 기회도 없을 해괴한 단어인 Eschatology.

         

         고리타분한 사전적 정의로서는 인류의 마지막 역사이자 발자취로 남겨질 사건, 또는 최후에 우리가 어떤 운명을 더듬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신학적 견해…일진대.

         

         사실 그것에 대한 복잡한 해석이니 인간이 현재에 더 충실할 이유를 만들어주기 위한 논리이니를 제쳐두고서라도, 가진 게 없고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이들에게 구체적 예언과 실체가 있는 약속을 가진 종말만큼 매력적인 게 또 있을까?

         

         기적적인 행운이 닥쳐오지 않는 이상, 더는 노력으로 바뀔 수 있는 게 없다고 여기는 순간 모든 걸 평등하게 날려버린다는 선택지가 최선이 된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절대 병역판정, 그러니까 여타 한국인 남자처럼 신체검사 받으라는 병무청 통지서가 날아왔을 때 저어어어기 북쪽에서 김모씨가 사는 곳에 미사일 유폭 사고라도 발생해서 하루 아침에 통일되기를 간절히 바랬던 경험을 바탕으로 공감한 건 아니고.

         

         뭐, 어쨌든 옆길로 샌 이야기를 바로잡아. 최근 여기저기서 허황되지만 묘한 불안감을 조성하는 망할 놈의 운석으로 주제를 되돌리자.

         

         네오 헤이븐이 왜 인류의 피난처인지 다시 한 번 광범위한 대중에게 실감시켜주는 계기. 그리고 기업의 강함을 과시함과 동시에 플레이어 캐릭터가 왜 이 거대한 흐름의 주인공이 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이벤트.

         

         하지만 온갖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이상 현상이라는 게 늘 그렇듯, 일어난 다음에는 참 쉽게 말할 수 있어도 그 전에 몇 가지 징조들만 보고 판단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당장 떠들기 시작하면. 그것도 아주 확신을 가지고 운석 충돌을 주장하기엔, 시기적으로 딱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는 아르카디아 새끼들과 한 세트로 묶여서 미친년 취급당하기 좋진 않을까 걱정도 되고 약간 조심스러웠지만.

         

         별다른 근거나 필연성이 가득한 이론을 제시하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 모두 허튼 소리로 치부하지 않고 썩 진지하게 믿어주는 걸 보면 다행히 내가 그간 주변인들에게 쌓아온 신뢰 점수가 괜찮았던 모양이다.

         

         “정말.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아, 이 새끼도 요즘 유행이라는 신흥 종교에 빠졌구나~’ 하고 말았을 텐데. 예쁜이가 진지하게 말하는데 뭐 어떡해? …그리고 아무리 봐도 뭔가 즐거운 걸 생각하는 것 같은데 한 번 들어는 봐야지!”

         

         “…비교적 거부감 드는 주제이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기는 해도, 아나스타샤 언니니까요. 어디 파묻혀 있던 기밀 정보 같은 걸 대담한 데이터 크래킹으로 빼낸 거라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얘기가 아니기도 하고요.”

         

         혹은, 수상하리만치 유능해서 신뢰를 따지기 이전에 직접 운석을 만들어서라도 떨어트리고도 남을 위인이란 낙인에 찍혀 있던가.

         

         “어… 로잘린? 특급 기밀로 분류되는 정보까지는 얼추 맞아도 이건 어디서 캐낸 게 아니라 내 직관에 가까운데. 그리고 마리나! 너한텐 뭘 더 부탁하거나 요구할 생각 없거든? 이미 네가 흥미 위주로 쿡쿡 찌르는 걸 즐긴다는 걸 잘 알았으니까.”

         

         “칫. 쩨쩨하게.”

         

         어디까지나 그냥 의견을 좀 들어보려던 거지, 자리잡고 구경하거나 재밌는 역할을 노릴 생각은 말라는 의미로 경고하자. 담긴 뜻을 대강 알아들었는지 그녀는 혀를 차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수상자가 기웃거릴 때 나 대신 나설만큼 신경 써주는 건 여러모로 고맙지만, 오늘은 더 장난칠 여지 자체를 주지 않겠다 이 악마야.

         

         “…아무튼지간에. 둘 다 순수하고 관대하게 ‘내’가 한 말이니까 믿어준다는 거지, 따로 떼어놓고 들으면 코웃음 치거나 저 아르카디아 종자 중 하나라 치부한다는 거네. 음, 역시 단기간에 쌓인 어그로와 악명가지곤 아무래도 부족하니 확실한 당근을 좀 더 얹어야 하려나.”

         

         비대한 자존감이나 스스로를 삼인칭으로 부르는 둥 묘한 성격을 가져본 경우가 없어서 차마 내 입으로 떠들기엔 어색하기 그지없긴 해도 짤막하게 나열해보자면.

         

         ‘혜성처럼 나타나 사고를 치는 분탕 종자라 거슬리지만 나름 괜찮은 측면도 있음.’

         ‘사적으로 누군가와 붙어먹거나 과한 친목을 시도하는 것 없이 익명 지향 커뮤니티가 원활하게 작동하는 편을 선호함.’

         ‘무엇보다 은근히 선보이는 코드들이 엄청 유니크 해서 굳이 과거의 위험한 수배자일 수도 있는 인간과 교류하지는 않더라도 두고 보며 연구할 가치가 충분.’ 정도가 아닐런지.

         

         암행 시장 조사? 하여간 돌아다니면서 주워듣고 답변 희망자에 한해 적당히 캐물은 해킹잘모름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내가 무슨 소셜 미디어 전문가도 아니오, 흑색 선전에 능한 참모 출신하고도 거리가 멀지만.

         

         타오를 장작이 한가득 쌓여 있다는 걸 못 알아먹을 수준의 둔한 까막눈도, 또 이런 모임 정치 경험이 아예 전무한 것도 아니었으니 응용의 여지가 있기도 하고.

         

         오랜 기간, 출시한 이래 여러 사람이 한참을 클리어하는데 실패한 네오 헤이븐 같은 게임을 붙들고 있다 보면… 정말 필연적으로 커뮤니티 짬밥이 길어지게 되는 법.

         

         조금 열성적으로 활동하다가 관리자에게 걸려서 시퍼렇고 무시무시한 족쇄도 잠깐 차 본 건 지금 보면 그럭저럭 웃긴 추억이자 경험이다.

         

         아직도 후속 패치로 업적이 안 깨지는 버그조차 안 고쳐주는 게임에 집착하냐며 놀림당했을 때, 사적으로 모욕된 것 마냥 끼니도 거른 채 반나절이 넘어가는 변호 임무를 수행한 건 조금 부끄러울지도.

         

         또 하나둘씩 지지부진한 공략에 지쳐서 떠나가는 유저들의 빈자리를 체감하며 쓸쓸한 기분을 느꼈던 건…. 글쎄, 이제는 나도 거기서 포기했다면 당장 이 자리엔 다른 사람이 있었을까 꽤 궁금하네.

         

         “저기, 괜찮아요 언니?”

         “얘가 왜 갑자기 멍해졌어? ……아하~ 역시 다시 생각해보니까 도움이 필요한 거 아니야? 으응??”

         

         “…제발. 거기까지 생각하는커녕 그렇게 구체적인 계획도 딱히 안 짰어!”

         

         당초 뭔가 액션을 취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나들이를 나왔다 한들, 내 입만 바라보고 있는 일행이랑 같이 있는데 뜬금없이 너무 혼자 골몰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긴 하지.

         

         하, 좋아. 어디 할 일을 후딱 정리하도록 하자.

         

         가상의 인격이자, 현실의 나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한 활동 대리인 ‘해킹잘모름’을 전면에 내세워 우호 세력을 늘리기로 결심했다면 평소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말투와 태도로 이미지를 구축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미 해킹잘모름이란 닉네임을 달고 대놓고 약간 못 말리는 악동처럼 군 전적이 있으니 거기서 크게 벗어나진 않게.

         

         거기에 내가 일대일로 구슬리는 달변은 몰라도 웅변가 타입이 아닌 만큼, 다른 사람의 연설 같은 거에서 단어와 문장을 많이 따와야 할 것 같은데… 적당하면서도 베낄 수 있으리만치 세부적인 내용을 꼼꼼히 기억하는 녀석으로다가.

         

         청중들의 태반이 해커 아니면 사이버 엔지니어들로 편중될 예정인 것까지 감안하면… 어…… 아무리 그래도 요건 선행 조건이 너무 깐깐한가?

         

         …이런 십, 어쩔 수 없지! 거의 유일하게 공통 분모를 충족해주는 원년 데드 링크 멤버의 대사를 무단으로 빌려 쓸 수밖에!

         

         그게 대충 어떤 내용이었더라.

         기업이라는 대세에 속하지 못하거나 않기로 선택한 자들의 자격지심을 막 긁으면서도, 동시에 막 마음을 심장 고동처럼 두근두근 충동질했던 것 같은데.

         

         ….

         …….

         

         뭐, 남의 뇌가 열심히 짜낸 코드마저 저작권 등록이 안 돼서 공공재로 쓰이는 마당에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인간의 출사표를 도용한다고 누가 나한테 유죄를 선고하겠어.

         

         거기에 이제 미안하지만 제로한테 함께 뒤섞을 빅 데이터 좀 정리해서 얼른 훌륭한 초안을 뽑아달라 부탁하기로 하고 하면 땡이다. 땡.

         

         그리고 이걸 여기서 불특정 다수에게 알리기 전에. 내 연락처에 있는 마리나 외 또 하나의 재미 연구가, 긴가민가하고 있을 그 아론에게 미리 운석 충돌이 100% 확정된 미래라는 걸 얼추 흘려두는 편이 좋을지도.

         

         날 가지고 놀 생각을 일정, 완전히 접는 대신 다른 흥미로운 정보나 먹잇감을 그 입에 물려주기로 약조했으니까.

         

         헌데 여타 일반적인 기업들도 아직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확률을 점치며 반신반의하고 있을 단계려나? 아니면 벌여 놓은 우주 사업이 있는 메가 코프만 얼추 알고 있는 수준?

         

         살짝 즉흥적으로 실행하는 아이디어라 그런 부분을 정확히 모르겠네. 흐음.

         

         부디, 그럴 가능성은 정말정말 낮겠지만 이미 알고 있는 입 가벼운 인간이 난데없이 끼어들어 초를 치는 것도 방지해야겠고.

         

         아, 듣는 귀나 지켜보는 눈은 물론, 떠들 입도 더럽게 많으니 변수를 차단할 겸 먼저 선뜻 분위기를 휘어잡을 만한 목소리를 내줄 바람잡이 선동꾼… 크흠! 실례, 나에게 이상하게 ‘호감’이 있는 유저 몇 명이 필요하긴 하겠구만.

         

         확실히 그런 면에선 이 가상 현실 방식이 선호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럿인 척하기엔 티가 나서 힘들겠어.

         

         결국 아쉬운 말을 해야 할 운명이었네 이거.

         

         “아으…! 그, 두 사람 다! 난 지금부터 엘리시움이 존나게 싫어할 게 분명한 짓을 저지를 거거든? 아마 더는 점잔 빼며 가만 못 있고 ‘해킹잘모름’으로 의심 가는 인간들을 전부 반강제 소환하려고 들 텐데, 그래도 계속 붙어있을 거야?”

         

         “야호! 그렇지! 기껏 도와달라고 사람을 휴일에 불러냈으면 따돌리는 것 없이 불장난도 무조건 같이 해야지♪”

         

         “별로, 다른 회…사에 장난질 치는 거라면 평소 업무랑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겠네요. 게다가 언니와 잘 지내라는 당부도 들었으니.”

         

         “거 참… 누가 해커들 아니랄까 봐, 기업 엿먹이는 일이라니 눈이 배로 초롱초롱해지네. 알았어! 대신 마리나는 내가 고용하는 셈치고 보수도 챙겨 주기로 하고, 로잘린은… 회사에 운석 관련 정보만 잘 전달해줘도 도움이 될 거고. ……아니, 나중에 너랑도 똑같이 외출해달라는 게 무슨 소리야 대체.”

         

         그렇게 보수를 내 시간으로 받아가도 되냐는 90년대 바람둥이 같은 얼빠진 소리를 수줍게 하는 로잘린에게 쓰디쓴 현상 수배자의 현실적인 단점을 자각시켜 주고, 함께 선동 계획의 골자를 보강한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우리집 동거 인공지능의 일머리가 보통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놀고 있다 보니, 혹시 내가 뭔가를 망치거나 실수하는 걸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소수 관객 층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멋들어지게 완성된 연설문 초안을 내 앞에 대령해왔… 이게 시발 뭐시여.

         

         – 아샤님, 요청하신 대로 문서 파일 ‘지옥을 천국으로, 천국을 현실로.’를 완성하여 송부해드렸습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재차 데이터 정제율을 높여서 버전 업을 하거나, 통계상 일부 극단으로 치우친 참고 목록을 지워 신뢰성을 높이겠습니다. –

         

         “이렇게 순식간에 노력해준 건 진짜 고마운데. 제로야…? 처음부터 인사말로 이런 자극적인 쌍욕을 박는 게 진짜 맞니??”

         

         – …해당 글귀는 꼭 포함해달라 부탁하며 건네주신 네트워크 상에선 발견되지 않은 데드 링크 출신 아이작 가이펙스의 연설문 예시 자료를 비롯, 참고에 사용된 동기 부여 문장 및 적절한 커뮤니티 대화법과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만. 감히 출처를 의심하는 건 아니나 다른 스타일로 한 부 더 제작하길 원하십니까? –

         

         “어….”

         

         아이고야, 얘가 이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딥 러닝하는 걸 금지했더니 내가 쓴 글에다 이것저걸 몽땅 참조해서 버무렸구나.

         

         앞에 건 미래의 특정 시나리오 분기점에서 나온 걸 토대로 재구성한 거라 못 찾는 게 정상이긴 하다만.

         

         말마따나 큰 틀이나 맥락으로 보면 어긋나는 점은 없긴 해도 이럼 첫인상이 좀 과격하게 새겨질 것 같은데. 과연 이래도 괜찮으려…나?

         

         …그래도 만약을 위해 여기 지극히 정상적인 감수성을 가진 이들에게 가벼운 검토 정도는 받아두고 실전에 돌입할까. 응.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야드 파운드 법의 사용으로 혼란을 초래한 죄로… 이하 생략.

    언제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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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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