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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6

       

       

       

       

       

       336화. 흑염룡의 무게 ( 1 )

       

       

       

       

       

       이스칼이 수수께끼의 약물의 힘을 빌려 가정의 평화를 이룩한 뒤로도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초원의 서리를 깨고 푸릇한 새싹이 올라와 풋내음을 한가득 풍겨오는 봄이 되어간다.

       

       차가운 바람이 저 멀리 물러남에 따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한층 더 풋내를 풍겨오는 계절이 되었다.

       

       “……”

       

       봄의 여유를 즐기는 수많은 인파 사이로 커다란 로브를 뒤집어쓴 한 인영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쉴 새 없이 눈을 힐끔거리며 사방을 살피고, 행여나 따라오는 자가 없는지 계속해서 뒤를 확인하는 것이 봄의 풋내 대신 수상한 자의 향기를 풀풀 풍겼다.

       

       “!”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인영이 돌연 몸을 날려 골목길의 그림자에 숨었다. 그러자 곧장 그 옆으로 우락부락한 덩치의 전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오는 것 아닌가.

       

       “젠장. 찾았어?”

       “아니. 놓쳤어.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칫. 얼마 못 갔을 거야. 어차피 이 근처는 우리 애들이 쫙 퍼졌어. 당장 흩어져서 샅샅이 뒤져! 오늘은 절대 놓칠 수 없다!”

       “너, 너랑 너! 나를 따라와! 나머지는 다시 이 주변을 뒤진다!”

       

       살벌하고 흉흉한 대화가 오간 뒤 전사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그 모습을 골목길의 그림자에서 숨죽이고 바라보던 수상한 인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란 말인가.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건지…’

       

       한숨을 푹 내쉰 인영이 다시 조심스럽게 길을 재촉했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

       

       결코 늦을 수 없었다.

       

       행여나 큰길을 통하면 방금 전의 전사들을 만날 것이니 골목길을 통해 갈 계획이었다. 조금은 돌아가는 길이지만 안전하게 가는 수밖에.

       

       스윽.

       

       “어?”

       

       골목길 안쪽을 향해 곧장 발을 돌리고,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은 덜컥 몸을 멈췄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처럼 한참이나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서 사방을 살피다가, 뒷통수를 슥슥 긁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기분 탓인가?”

       

       로브 안에서 들려오는 것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흔들리는 로브 자락 사이로 사내의 오른손이 힐끗 보였고, 신기한 문자가 가득 새겨진 하얀 붕대로 칭칭 감싼 것 또한 볼 수 있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고, 바람이 흔들고 가며 사라진 순식간의 모습.

       

       허나ㅡ

       그 짧은 시간도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충분한 시간이었다.

       

       “저 인간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지상에 남은 마지막 엘프, 에스텔이 우연히 발견한 한스를 보며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대낮부터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있어 잠시 따라왔는데, 설마 한스였을 줄이야.

       

       “저 인간이 아마 이번에 새겨진 별의 주인이었지?”

       

       그간 성도를 떠나 홀로 방랑하며 정신없이 악마를 죽이고 다닌 까닭에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지만.

       바람에 실려 오는 이야기로 어느 정도의 흐름은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이번에 전사들 사이에서 신위를 떨치며 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고 하던가? 깊은 산골에서 악마를 죽이느라 큰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자신이라면 틀림없이 신의 마음에 들 수 있었을 것인데.

       

       과연 소문이 허투루 난 것은 아닌지.

       기척을 잔뜩 죽인 자신의 시선을 대충이라도 눈치챈 것은 감탄할 일이었다.

       

       “흠…”

       

       에스텔의 녹색 눈동자가 호기심을 머금으며 반짝였다. 저 인간이 그렇게나 강할까? 신께서 마음에 들어 친히 별을 만들어줄 정도로?

       

       ‘신께서 마음에 들어한 전사라… 그렇다면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한 녀석이겠네.’

       

       에스텔의 손에 힘이 뿌득 들어갔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화흔처럼 남은 쓰라린 기억이 있었다.

       

       폐를 채우는 알싸한 공기.

       갈라지고 부서지는 거대한 나무의 파편.

       불티를 흩날리며 떨어지는 커다란 잎사귀.

       

       불타버린 황금 나무의 잔재. 

       황금 나무를 불태운 빌어먹을 악마.

       

       비록 그 원흉은 신께서 직접 처벌하여 탄탈로스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악마에 대해 끝없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

       

       ‘황금 나무를 위하여… 내 기필코 모든 악마를 죽이는 그날까지 내 단검은 멈추지 않으리.’

       

       지상과 심연에서 모든 악마를 뿌리 뽑는 날이 와서야, 비로소 성지의 문을 넘어 형제자매의 품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누구도 아닌, 에스텔 스스로 약조한 맹세였다.

       

       하지만 그 맹세를 지키기에 그녀는 너무 약했다.

       신께서 주신 대궁을 직접 쓰지도 못할 정도로.

       

       “나에게는 힘이 필요해.”

       

       에스텔의 어깨에는 비스듬히 걸린 커다란 대궁이 있었다. 고목으로 만들어 특유의 결이 고급스럽게 살아있는 황금 나무의 대궁이다.

       

       허나, 에스텔은 아직 활시위조차 제대로 당길 수 없었다. 활시위가 강철처럼 억세고 강했으니 억지로 당기면 손가락이 잘리고 말 것이다.

       

       실제로 지난번 용왕과의 전투에서 에스텔은 대궁을 억지로 쏘다가 손가락의 절반을 잃을 뻔했다.

       

       단순한 물리적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부족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신이 인정한 전사… 저 인간을 따라다니고 관찰하다 보면 뭔가 깨달을지도 몰라.’

       

       벌써 제법 많은 수의 추종자를 거느린 인물이다.

       

       “한스 님! 이 시대의 종결자시여! 사왕흑염용살제시여! 어디 계십니까!”

       “끄하아아아악! 한스 님의 힘이 느껴진다! 크크큭…! 그분의 힘이 깃든 내 오른손에 흑염이 끓어오르고 있어!”

       “어이어이. 조심하라고. 내 뒤에 서지 마… 무심코 죽일 뻔했잖냐.”

       

       한스의 추종자들은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한스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그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 했다.

       보기에는 조금 우스꽝스러웠지만 에스텔은 이를 진지하게 관찰했다.

       

       “흑염룡…? 봉인…?”

       

       에스텔이 길고 긴 시간 동안 성도를 떠난 까닭에 성도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들려오는 풍문과 남다른 청력을 활용한 귓동냥으로 얼추 맥락은 파악했으니.

       

       한스의 오른손에 시대의 종결자이며 죽음의 구도자인 흑염룡. 즉 저번에 봤던 용왕이 봉인되어 있다는 것 아닌가.

       

       이를 깨달은 에스텔의 눈에 이채가 빛났다.

       

       용왕의 폭력적인 위엄과 자태는 에스텔도 기억하고 있었다. 생물로서 종과 격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드는 그 거대한 위용과 무력.

       

       그러한 존재를 제 몸에 봉인하고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괄목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저 인간을 관찰하다 보면 답이 보일 거야.’

       

       에스텔이 뚫어져라 한스를 바라봤다. 에스텔과 같은 곳에 서서 한스를 바라보려 한다면 좁쌀만큼 작은 크기로 보일 것이었으나, 타고나길 사냥꾼이었으며 숲에서 나고 자란 그녀에게는 별 대수로운 것도 아니었다.

       

       “…저건 또 뭐야?”

       

       그러한 에스텔의 눈썹이 작게 요동쳤다.

       

       기척을 잔뜩 죽인 작은 그림자가 날렵하게 시야의 사각을 오가며 한스의 뒤를 밟고 있었다.

       미행에 제법 능숙해 보이는 것이 제법 숙련된 자임이 틀림없다.

       

       에스텔이 눈를 찌푸리며 한껏 집중했다.

       

       “꼬맹이잖아?”

       

       머리를 똑단발로 자른, 아주 얌전하게 생긴 여자아이다.

       앳되 보이는 외모에 아직 덜 빠진 젖살을 보니 아직 한창 어린 나이로 보였다.

       

       헌데 순둥하고 조용한 외모와 달리 몸놀림은 조용한 표범과도 같고 기척을 죽이고 움직이는 것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와도 같으니.

       

       도무지 저 나이대의 여자아이가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다. 자신조차 한껏 집중해야 눈치챘을 정도라면, 한스는 당연히 눈치채지 못할 것이고.

       

       ‘무슨 비밀집단의 살인병기 같은 건가…?’

       

       에스텔이 황망하게 이를 바라봤다.

       

       한스라는 인간,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이토록 많은 이들이 찾아다니게 만드는 것일까.

       

       “…나도 오른손에 붕대를 감으면 좀 강해질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최후의 수단이다.

       어쩐지 광대놀음처럼 느껴져 거부감이 들었다.

       

       “모든 것은 황금 나무를 위해.”

       

       작게 읇조리며 각오를 다진 에스텔이 다람쥐처럼 가볍게 몸을 던졌다.

       

       따닥!

       

       경쾌한 나막신 소리가 에스텔의 뒤를 쫓았다.

       

       우선, 저 날다람쥐 같은 녀석을 유심히 살펴볼 셈이다. 

       

       인간의 눈을 피하는 것에 익숙한 녀석이다.

       평범한 인간은 아닐 것이고 그런 녀석이 한스의 뒤를 쫓고 있으면, 자신이 한스를 관찰하는 것에 방해가 된다.

       

       “일단 보다가…”

       

       만약 암살자거나 악의를 품고 접근했다고 판단되면…

       

       스릉.

       

       에스텔의 손에 들린 단검이 싯푸른 예기를 발했다.

       

       악마의 씨를 말리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 * * * *

       

       

       

       에스텔이 비밀집단의 암살 병기라고 생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겠지만 암살자는 아니었다.

       

       샤샤샥.

       샤샤샤샥.

       

       우에서 좌로. 위에서 대각선으로.

       

       시선의 사각을 옮겨가며 날렵하게 몸을 던지며 한스의 뒤를 쫓는 이는 바로 데이지였다.

       

       “……”

       

       데이지의 밤색 눈동자는 거무튀튀한 색을 발하며 저 멀리 걸어가는 한스의 등을 빤히 바라봤다.

       

       거짓말쟁이.

       한스는 거짓말쟁이다.

       

       경쾌한 한스의 걸음을 보며 데이지는 정확히 13시간 26분 전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한스 님. 혹시 내일 바쁘신가요?”

       

       – “어, 으응? 아, 아! 내일은 이스칼이랑 같이 약속이 좀 있어서.”

       

       – “……”

       

       거짓말이다.

       

       데이지는 이미 저 시점에서 이스칼과 약속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오늘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도 알고 있다.

       

       까득.

       

       “또… 용사님을 만나러…”

       

       용사 케니스.

       

       케니스가 커다랗고 흉악하며 남자를 홀리는 살덩이를 흔들어 한스를 유혹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다.)

       

       “후… 후우… 아니야. 진정해…”

       

       까득까득 이빨을 갈던 데이지가 깊게 숨을 내쉬며 격정을 다스렸다. 그녀의 안에는 언제부턴가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근원도, 연유도 알 수 없이 심장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오크들에게만 있는 불꽃이었다. 그것이 과연 어떠한 이유로 데이지에게 깃들었는지… 그건 신만이 알 것이지만.

       

       그럼에도 데이지는 제 심장에 깃든 이 작은 불꽃을 그럭저럭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타다다닥!

       

       들려오는 무수한 발걸음에 데이지가 땅을 박차고 담벼락을 한걸음에 훌쩍 뛰어올랐다.

       

       휘익!

       

       더 높이 뛰고, 더 빠르게 달린다. 주먹에 힘이 실리고 발차기는 능히 벽에 금을 낸다. 이것이 데이지의 심장에 깃든 불꽃의 힘.

       

       그간 훈련에 힘쓴 것에 불꽃의 힘이 더해지면서 데이지의 타고난 은신술은 그야말로 가공할 수준에 이르고 만 것이다.

       

       “아아아악! 저 하늘에서 흑염룡의 별이 나를 보고 있구나! 보이느냐! 너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죽음의 흑염룡 별이!”

       “가라! 심연을 불태우는 사왕흑염용살제의 흑염살!”

       

       덩치가 우락부락한 전사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갔다. 앞서가던 한스가 몸을 움찔하며 으슥한 그늘에 숨었고, 데이지도 눈을 찌푸리며 한층 더 기척을 죽였다.

       

       한스 님을 추종하는 이상한 아저씨들.

       시끄럽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다. 한스 님을 귀찮게 하는 건 조금 괘씸했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거짓말쟁이 한스 님과 용사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

       

       그리고ㅡ

       

       “……꼬리가… 붙었네…”

       

       스산하게 중얼거린 데이지가 으슥한 그림자 속으로 슥 모습을 감췄다. 멀리서 얌체처럼 훔쳐보는 존재가 있다. 자신을 보는 것이라면 가만히 두려고 했는데, 감히 한스를 뒤쫓고 있었다니.

       

       우선 뒤에 붙은 꼬리부터 정리해야겠다.

       

       데이지의 기척이 사라진 자리에 이윽고 한 무리의 전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으으으윽! 여기, 이곳에!! 내 오른손의 흑염룡이 말하고 있어! 이곳에 아주 사특한 것이 있었다고!”

       “호오 과연… 너도 ‘들리는’ 건가? 광란과 파괴의 속삭임이?”

       “…이쪽! 이쪽이다! 흑염룡이 나에게 파멸과 죽음을 속삭인다!”

       

       붕대를 감은 한 전사가 다른 무리를 이끌며 어딘가로 향했다.

       

       우연의 일치인치, 기묘한 운명의 장난인지.

       

       대궁을 멘 엘프와 똑단발의 소녀, 오른손에 붕대를 감은 전사들까지.

       

       이 셋은 점차 하나의 점을 향해 모이고 있었다.

       

       두리번 두리번.

       

       “아무도 없지…?”

       

       자신이 이들의 중심점이 되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스는 열심히 사방을 살피며 길을 나아갈 뿐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예로부터 무언가를 멸종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정력에 좋다고 말하거나, 아이의 머리를 맑게하여 공부에 좋다고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그리한다면 아이의 공부에 진심인 어머니와 정력에 진심인 아버지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단숨에 숫자를 줄이겠지요…!! 상상만하여도 너무 두렵군요…!! 히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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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Install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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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형 무기 만들기 게
Status: Ongoing Author:
Out of boredom, I download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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