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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6

   내 어깨에 기댄 채 울음을 터트리던 페이비는 어느샌가 잠에 들었다.

   

   아침에도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그 지친 몸으로 많은 일을 마주했으니 지쳐 쓰러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나는 그녀를 허벅지 위에 눕히고 신성을 퍼트려 따스함 속에서 편히 쉴 수 있게 했다.

   

   딱히 급할 것도 없으니까. 좀 기다려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 때 안아서 돌아가지 뭐.

   

   그리 생각을 하며 페이비의 안에 새겨진 신성을 살폈다.

   

   신성의 격이 올라감에 따라 신성을 다루는 데에 능숙해진 나다.

   

   다른 이의 신성을 감지하는 능력 또한 이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런 내가 보기에 페이비의 안에 깃든 신성은 분명 내가 품고 있는 주신의 신성과 한없이 비슷해 보였다.

   

   아르마디가 페이비의 고결함을 인정한 건가.

   

   하. 그래. 이게 맞지.

   

   페이비는 허접페도변태주신한테 한없이 아까운 사람인 걸.

   

   오히려 여태까지 인정해주지 않고 튕겼다는 부분이 건방지다고 생각해.

   

   지가 뭔데 페이비를 인정하네 마네 하는 거람?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할 무능주신주제에.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잠결에 옹알이를 하는 페이비를 보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아버지.’

   <왜 부르느냐.>

   ‘알고 계시잖아요?’

   

   평소에 그리 눈치가 빠르시던 분이 이제 와서 모르는 체 하시면 곤란해요. 설마 영웅이라 불렸던 분이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러시진 않겠죠?

   

   <그래. 네 말이 옳았다. 이 아이는 성녀의 이름을 지닐 자격을 지닌 아이였다.>

   ‘그쵸? 할아버지가 잘못했죠?’

   

   다른 사람은 그렇다 쳐도 할배가 내 말을 의심한 건 너무했다고 생각해요.

   

   여태까지 제가 할배한테 얼마나 많은 걸 보여줬는데 굳이 페이비를 시험하자 그러다니.

   

   ‘고결한 성기사라는 분이 사람을 이렇게 못 믿어서 어떡해요?’

   <…할 말이 없군. 미안하구나. 이는 분명 본인의 안 좋은 버릇이야.>

   ‘어쨌든 이제 할아버지는 의심의 대가를 치르셔야겠어요.’

   <대가라 함은?>

   ‘할아버지의 불신 때문에 제가 상처를 받은 만큼 할아버지도 고통을 받으셔야죠.’

   

   이미 할배에게 어떤 고통을 주어야 할지는 정해져 있다.

   

   안 그래도 이번 방학 때 할배의 인형이 있는 곳에 들를 예정이었거든.

   

   인형의 행동 하나 대사 하나에 무슨 의미가 깃들어있는 지 다 설명해달라고 해야지.

   

   흐흐흫. 그 곳에서 마주하게 될 흑역사를 하나하나 설명해야 할 할배의 모습을 상상하니까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네.

   

   <이번 일에 본인의 과오가 있는 만큼 처벌을 피하려 하진 않으마.>

   ‘오. 진짜요?’

   

   의외네. 할배라면 분명 날 위해서 한 거였다거나 뭐라거나 하면서 변명을 할 줄 알았는데.

   

   <허나 이번 일에서 본인만 잘못한 것은 아니지 않나!>

   

   …의외라는 말 취소.

   

   차라리 변명을 하는 편이 나았어.

   

   설마 다른 사람을 끌어내려 책임을 나누려 할 줄이야.

   

   이딴 게 진짜 전설적인 성기사?

   

   뭔가 이야기에 와전이 있었던 거 아냐?

   

   무어라무어라 소리치는 할배의 말을 흘려듣고 있으려니 페이비의 눈가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어라? 영애님?”

   

   ‘일어나셨어요?’

   “벌써 일어났어? 아쉽네~ 아기처럼 웅얼거리는 게 참 귀여웠는데 말야.”

   

   페이비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서는 내 시선을 피하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영애님께 폐를.”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쓰지 마. 내 교복을 더럽힐 정도로 펑펑 운 데다가, 그러다 내 무릎을 베개 삼아 잠들었고, 그 위에서 옹알이까지 했지만 뭐 어때?”

   

   “죄송합니다아앗!”

   

   귀까지 벌겋게 물들어 버린 페이비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가며 자신의 무례를 사과했다.

   

   별로 폐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귀여워서 오히려 좋았다고 생각을 하지만.

   

   이 말을 바깥으로 내면 이상하게 번역이 돼서 페이비를 터트려버릴 것이 분명했기에 난 가만 페이비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저라는 사람이 감정이 격양되는 걸 제어하지 못 하다니.”

   

   ‘그건 이제 됐어요. 페이비.’

   “페이비. 괜찮다는 데 자꾸 물고 늘어지면 폐가 된다는 생각은 못 해? 울 때 지능까지 같이 흘려버린 거야?”

   

   “그으런 건 아니지만.”

   

   ‘그보다…’

   “그것보다 허접 주신의 신성을 품은 감상은 어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르마디를 믿어왔던 페이비는 주신의 목소리를 듣고 주신의 축복을 받는 것을 일생의 소원으로 생각했다.

   

   그 꿈이 이루어졌으니만큼 기뻐해야 할 터인데 자신의 신성을 바라보는 페이비의 표정은 미묘했다.

   

   ‘안 기뻐요?’

   “뭐야. 안 기뻐? 이걸로는 부족하단 거야? 청렴한 척 하더니 사실 욕심쟁이였구나?”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주신께서 저를 바라봐 주신 것은 분명 기쁜 일이죠.”

   

   자신이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왔는지 열성적으로 설명하던 페이비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가 몇 초가 지나서야 다만. 이라는 말과 함께 이야기를 이었다.

   

   “허나 그 기쁨을 순수히 즐기기에는 이 세상에 도사린 것들이 너무도 많으니까요.”

   

   주신의 뜻을 짊어지게 된 자신은 아이처럼 들뜰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난 페이비에게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춰 달라고 이야기했다.

   

   상황에 맞지 않은 영문 모를 부탁이었음에도 페이비는 순수히 내 말을 따랐다.

   

   그렇게 페이비의 시선이 내 시선과 마주하게 된 그 순간 나는 페이비의 새하얀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히약?!”

   

   내가 이럴 줄은 몰랐던 걸까? 두 손으로 이마를 가린 페이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가만 나를 살폈다.

   

   “바보 페이비♡ 네 말대로라면 기쁨을 훤히 드러내는 나는 되먹지 못한 꼬맹이라 그거네?♡”

   “…네?! 그럴리가요! 전 그런 의미로 말을 한 게!”

   “흐응~♡ 평소에 페이비가 날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완전 실망이야♡”

   “진짜 아니에요! 영애님!”

   

   팔을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지리멸렬한 변명을 내뱉는 모습에 난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 정말. 아직 학교도 졸업 못 했으면서 구원자 흉내나 내다니.

   

   …아니지. 오히려 학교를 졸업 못 했으니까 구원자 흉내를 내는 건가?

   

   지금 페이비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중2병이 오더라도 이상한 시기는 아니니까.

   

   “대체 왜 그런 미묘한 시선으로 보시는 건가요!”

   

   억울함을 주장하는 페이비의 이마에 다시 한 번 딱밤을 날린 나는 이젠 아예 울상을 짓고 있는 그녀를 가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막 신성을 받아들인 허접이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걸♡ 한심해 보이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그…건.”

   “푸흐흫♡ 나중에 얼빵이한테 다 이야기해줘야지♡ 자아도취에 빠진 페이비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말야♡”

   

   일부러 과장되게 페이비를 따라해 보았더니 그녀의 입에서 새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영애니이이임!”

   

   난 말야.

   

   게임 속의 고결한 성녀인 페이비를 좋아하긴 했지만 내 곁에 있을 친구 페이비가 그렇게까지 되길 바라진 않아.

   

   존경받는 위인은 멀리서 보면 대단해 보이지만 옆에서 보면 마음이 아프니까.

   

   페이비.

   

   게임 속 네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걸 짊어지지 않아도 모든 일이 잘 해결 될 테니까.

   

   너는 그냥 지금처럼 있어줬으면 좋겠어.

   

   메스가키 스킬이 만들어낸 웃음 속에 복잡한 마음을 숨긴 나는 제발 조이한테만은 이야기하지 말아달라 비는 페이비를 데리고 지하실에서 빠져나왔다.

   

   *

   

   페이비가 주신의 신성을 얻게 된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그 동안에 있었던 일 중 몇 가지를 이야기 해주자면.

   

   음. 그래. 일단 이것부터 말을 해야겠네.

   

   고아원에서 빠져 나온 나는 바로 돌아가자는 카리아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었다.

   

   카리아에게 날 의심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서.

   

   내가 그런 식으로 나올 것을 미리 짐작한 듯 카리아는 뭐든 마음대로 하라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마음대로 해줬지.

   

   ‘바보 아버님께서 해주신 이야기인데. 예전에 아줌마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외톨이였대.’

   ‘스승님께서 말입니까?’

   ‘사람은 믿을 수 없는 동물이라…’

   ‘흐아아악! 멈춰! 그만 둬! 고용주님! 내가 잘못했어!’

   

   아무리 눈치가 좋은 카리아라도 내가 자신의 흑역사를, 그것도 자신의 제자 앞에서 늘어놓을 줄은 몰랐던 듯 카리아는 필사적으로 내 입을 가로 막으려 했다.

   

   물론 과거의 무력 대부분을 잃어버린 카리아가 힘으로 날 이길 수는 없었고.

   

   ‘그리고 또…’

   ‘그마아아아안!’

   

   난 카리아의 비명을 뒤로 한 채 다음 일화에 대한 이야길 시작했지.

   

   게임 속에 카리아가 등장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전 왕국의 그림자’에 대한 중2병 넘치는 일화는 차고 넘쳤으니.

   

   내 머릿속엔 카리아가 비명을 지르게 만들 101가지 이야기가 존재했다.

   

   안타깝게도 그 모든 이야기를 풀 순 없었다.

   

   일화 두 개가 끝났을 즈음에 카리아의 표정이 표독스러워졌거든.

   

   이 이상 하면 날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는 듯한 그 눈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입을 못 놀리겠더라.

   

   <…카리아의 벌이 이것이라면. 설마 내 벌은.>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자신의 암울한 미래를 깨닫기도 했지만 이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대충 넘기고.

   

   아. 이것도 이야기 해야지.

   

   고아원에서 주신의 신성을 받은 그 날 기숙사로 돌아갈 때까지 죽어라 페이비를 놀린 것이 효과를 발휘한 걸까?

   

   다음 날 아침에 만난 페이비는 자신의 사명이니 짐이니 하는 이야기를 조금도 꺼내지 않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얼굴을 붉힌 채 감정이 격양되어 있어서 헛소리를 한 것 같다고 인정하기까지 했으니 메스가키식 중2병 치료법은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할 수 있겠지.

   

   허나 나는 그것으로 안심하지 않았다.

   

   과거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절을 보냈던 나는 중2병의 씨앗이 얼마나 질긴 생명력을 지녔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치료가 된 것을 확인한 후 페이비의 병증을 예방하기 위한 시술을 감행했다.

   

   무슨 헛소리냐고?

   

   ‘그 기쁨을 즐기기엔…’

   ‘큽. 크흡.’

   ‘영애님! 하지 말아달라고 제가 그렇게 부탁을 드렸잖아요!’

   ‘흐즈믈르그 그릈즎으~’

   ‘푸하핳! 페이비! 나중에 설교할 때 저걸 말 하는 게 어때요?!’

   ‘흐아아앙!’

   

   페이비의 부탁을 무시하고 조이한테 다 이야기를 해줬지.

   

   그도 그럴 게 내가 부탁을 들어주는 건 그 날 하루뿐이었는걸?

   

   그 하루가 지나면 누구도 이 메스가키를 억제할 수 없다고!

   

   아 물론 조이한테는 심각한 부분을 다 빼고 이야기를 해줬다.

   

   그 날 있었던 일의 뒷사정까지 모두 설명하면 도저히 놀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게 되니까.

   

   어쨌든 나와 조이의 합동치료를 통해 페이비의 중2병은 토양 속에서 생명을 잃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페이비가 진짜로 삐져버린다는 부작용이 생기긴 했지만.

   

   중2병이 완전히 피어났을 때의 피해에 비하면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지. 응.

   

   이외에도 학지에 실린 내 던전이 고평가를 받았다거나.

   

   며칠 만에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낸 프레이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도주했다거나.

   

   내가 직접 작성한 던전 기믹 책을 받은 아서가 방학 전까지 모두 다 외우라는 내 명령에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거나 하는 일이 있긴 했다만.

   

   요 이틀 간의 일상은 실로 평화롭고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

   

   그게 폭풍 전의 평화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조이. 이 옷은 어떤가요? 인형 같으신 영애님이니 완전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괜찮기는 한데. 음. 일단 착용하신 걸 보고 생각을 해보죠. 아직 남은 시간이 많으니까요.”

   

   ‘저기. 조이…’

   “조이? 혹시 눈이 안 좋아? 지금 얘 손에 들려 있는 옷더미 안 보여?”

   

   “그것도 입어보고 이것도 입어보자는 거죠. 영애.”

   

   내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린 조이는 짐꾼으로 따라 온 칼에게 옷 하나를 더 건넸다.

   

   우와. 칼의 팔 위에 쌓여있는 옷이 가슴팍을 넘어서 어깨에 닿으려고 하네.

   

   저거 다 입어보려면 대체 몇 시간이 필요한 거지?

   

   “페이비. 이건 어떤가요?”

   “예전의 영애님께는 어울리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영애님이라면 무척 매력적일 거에요.”

   “그쵸?”

   

   …얘네 날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옷 갈아입히기 인형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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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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