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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8

       어쩌면 내 걱정은 아주 쓸모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원래 이런 소설에서 예쁘고 어린애들은 보통 엄청나게 강하니까.

        

       윤기 흐르는 검은 단발머리에 하얀 피부.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다소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그래도 이 아이를 보고 예쁘다는데 이견을 표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여기까지 오는 와중에도 이미 전투를 겪었는지, 아이들의 옷은 여기저기 더럽혀지고 찢겨있었다. 심지어 피가 묻은 듯 붉게 물든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다친 애는 없었다.

        

       하긴, 저 중에는 누가 봐도 마법 지팡이로 보이는 것을 쥐고 있는 애도 있었으니까. 둔기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것 치고는 들고 있는 애의 몸이 너무 여리여리했다. 뭔가 휘두를 것 같은 외모도 아니었고.

        

       하긴, 그리폰이 있는 세상이고, 그 그리폰을 움직일 마법이 있는 세상이니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마법도 당연히 존재하겠지. 흉터 하나 안 남기고 완전히 없앨 수 있는 마법이라.

        

       음, 기왕이면 나한테도 걸어줬으면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일은 없겠지.

        

       아, 진짜 싫다.

        

       누가 봐도 이쪽이 악당이잖아.

        

       안 그래도 저 위에서 추기경이 대놓고 악당 같은 대사를 날리고 있었다. 추기경의 말을 들은 보라색 머리 여자애는 위축된 것 같아 보였고, 제일 앞에 서 있는 검은 머리 여자애는 아주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와, 무섭다. 손에 총까지 들고, 누가 봐도 강화복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입고 있는 애가 그런 표정을 지으니 내 머리에 총도 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

        

       의외로 나쁘지 않을지도.

        

       내가 얼마나 이 꼴이었는지는 몰라도, 이미 한참 동안 고통받았다.

        

       차라리 이쯤에서 끝낼 수 있다면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종교 같은 것을 가지지 않았던 시절에는 삶의 끝이 정말로 끝이라는 생각에 죽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지금이야 뭐, 죽은 다음에도 이렇게 영혼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리폰 몸으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미아!”

        

       검은 머리의 여자애가 그렇게 힘차게 외치며, 앞으로 달린다.

        

       “스피터스 글래시아!”

        

       지팡이를 들고 있던 여자애가 그 말에 맞춰서 지팡이를 앞으로 휘두르며 정체불명의 단어를 외쳤다.

        

       지팡이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내 앞쪽에 얼음을 만들었다.

        

       봐, 마법사잖아.

        

       직후에 느껴질 고통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내 앞에 펼쳐진 것은 얼음 창이나 얼음 칼날이 아니라, 계단이었다.

        

       저 위쪽, 2층으로 그대로 뻗어 올라가는.

        

       검은 머리 여자애는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얼음 계단을 있는 힘껏 밟고 올라갔다.

        

       “미아!”

        

       “알고 있어요!”

        

       멋진 팀워크였다.

        

       혹시 이 내부 구조를 알고 있던 애라도 있는 걸까? 바로 이곳에 있는 기사 무리의 우두머리를 치러 올라가는 것이 아주 현명해 보였다.

        

       좋아, 잘하고 있어.

        

       그 들고 있는 총의 총알을 그 미친 노인네 머리에 박아주라고.

        

       기왕이면 등에 있는 커다란 총으로 날 패던 기사 팔다리 중 하나만 날려주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내 고개가 다시 앞을 향했다.

        

       내 앞에 있는, 저 여자애의 동료로 보이는 애들을 내려다본다.

        

       내 의지는 아니었다.

        

       “……겁먹을 것 없어요.”

        

       은발의 여자애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가느다란 세검. 검술에 그만큼 실력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여자애의 손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상처투성이에, 약화했다고는 하지만 그리폰은 그리폰. 자기보다 한참 커다란 괴물을 앞에 두고 떨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앞으로 나온 여자애도 검을 들고 있었다. 이 아이는 금발이었다.

        

       은발과 금발이라.

        

       아주 기품있는 것이 어딘가의 귀족가 딸이 아닌가 싶다. 이 세계에 귀족이니 왕족이니 하는 것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황제가 어쩌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으니 있기야 하겠지.

        

       “언니를 보내놓고 우리가 겁먹으면 안되잖아.”

        

       그렇게 말한 아이는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애. 아주 활기차 보이는 표정이었다. 여기 있는 아이 중에서 가장 떨지 않는 애가 있다면 이 아이가 아닐까.

        

       아까 뛰어 올라간 애가 이 애의 언니라는 걸까? 그렇겠지 닮지는 않은 것 같은데.

        

       위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목소리였고, 다소 겁에 질려있었다.

        

       어린아이인데, 이미 유명한 모양이다.

        

       꼴 좋다.

        

       뭐, 좋아. 나도 최선을 다해야지.

        

       물론, 이 애들을 죽이는 데 최선을 다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아이들이 한 걸음씩 나선다.

        

       나는 정신을 최대한 집중했다.

        

       부디 나의 발톱에 이 아이들이 죽지 않도록.

        

       내 부리가 이 아이들의 미래를 갉아먹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서 저항하기 위해.

        

       *

        

       내 다리가 풀려 쓰러진 것이 저 아이들 때문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최선을 다했다.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쏘고.

        

       솔직히 말하자면, 마법을 봤을 때는 조금 신기한 기분도 들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마법 말고 일반적인 모습의 마법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리고, 검을 휘두르는데 어떤 파장 같은 것이 나가는 것도. 이쪽 세상의 물리법칙은 내가 살던 세상과는 다르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몸에 상처가 나도 나는 더 아프지 않았다.

        

       이제 와서야 알게 된 건데, 아무래도 나의 몸은 이미 한계였던 모양이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여러 군데 상처가 나고 곪았는데도 그걸 치료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했으니까.

        

       이미 너무나 아파서, 더 아픈 것이 의미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무너진 것은 온전히 나의 몸 때문인 듯 했다.

        

       한때는 아름답게 자라났던 깃털은 이제 너덜너덜했다. 위용 넘치던 날개도 군데군데 맨살을 드러내서 추해 보이기만 할 뿐.

        

       그나마 저들이 건드리지 않은 곳은 부리와 발톱이었기에, 저 아이들은 나의 몸에 의해 이미 상처를 입었다.

        

       마법으로도 치유에는 한계가 있는지, 미안하게도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전투가 끝났다.

        

       그나마 마법으로 몸이 조종당하고 있을 때는 명령 때문에 서 있을 수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힘이 없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전투가 끝나고, 아이들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 것이 들렸지만, 나는 그 내용을 제대로 들을 겨를이 없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

        

       내가 이쪽 세상으로 왜 오게 된 것인지, 왜 이런 꼴을 겪어야 하는 것인지.

        

       서서히 멀어지려는 정신을 붙들어야 할지, 그냥 그대로 놓아야 할지.

        

       발소리가 들렸다.

        

       절그럭거리는 그 발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홱 치켜들고 말았다. 그리브 소리에는 익숙했다. 그리고 그 그리브 소리가 들린 직후 나타난 기사는 언제나 나를 그 그리브로 걷어차곤 했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인 것은 그 기사가 아니었다.

        

       너덜너덜해진 옷을 입고, 아까보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하지만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 가장 앞에 서 있는 아이.

        

       얼음 계단을 밟고 뛰어올라 위로 올라갔던 그 아이였다.

        

       이름은 ‘실비아’라는 모양이다.

        

       그 아이가 입고 있는 그 복잡한 모양의 갑옷도 여기저기가 구부러지고 끊어진 채였지만, 그 아이는 당당하게 두 발로 서 있었다.

        

       그리고, 머리 높이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깨진 보석.

        

       나를 조종하던, 그 고위 성직자가 목에 걸고 있던 그 보석이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나를 더 조종하지 못하게 된 거구나.

        

       “괜찮습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그 아이가 말했다.

        

       “이 물건은 파괴되었습니다. 더 이상 당신을 옭아맬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조금 더 높이 들었다.

        

       저 아이의 말 때문이었을까. 시야가 조금 맑아진 것 같다.

        

       마치 나에게 더 잘 보여주겠다는 듯 그 아이는 손에 들고 있는 보석을 머리 위로 더 높게 들었다.

        

       안도감.

        

       이제 저것이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는, 나를 움직여 사람을 해치게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게다가, 저것은 결국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깨졌다. 지금 내가 이곳에서 한 일이 유일하게 ‘전투’라고 불릴만한 것이었는데, 내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사이에 전투가 끝나버렸으니까.

        

       나와 한동안 눈을 마주치고 있던 그 아이는 보석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한동안 나를 올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왔다.

        

       조금 망설이는듯한 손길이 나에게 와 닿았다.

        

       찌르르, 통증이 일었다. 처음에는 작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끔찍하게 커지는 통증이었다. 나의 몸에 난 상처는 생각보다 훨씬 심한 모양이었다. 저 아이들과 싸우면서 얻은 새로운 상처의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종양 부분을 만지다가, 내 목에서부터 올라온 소리를 들은 그 아이는 다시 나를 올려다보더니,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

        

       그리고 잠깐 망설이다가,

        

       “따라오십시오.”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를 보는 채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이런 상황인데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아이는 내가 자기 말을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할까? 이 세계에서 그리폰이라는 동물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생물인 걸까?

        

       하긴, 생각해보면 나를 가두었던 그 녀석들도 내가 자기네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했지.

        

       그놈들의 말이라면 듣지 않았겠지만, 글쎄.

        

       나를 이렇게 꺼내준 아이 아닌가.

        

       어차피 스러져가는 몸이니, 마지막으로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여기저기가 삐걱거리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개의치 않았다.

        

       실비아라는 아이는 내가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그리고 조금 열려있는, 자신들이 들어온 그 문을 향해 걸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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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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