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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39

     크림슨 지브롤터가 후퇴를 명령했다.

     500년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가장 끔찍한 상황.

     “지브롤터를 버리고…도망을 치라는 말인가? 어디로?”

     

     협곡이 뚫린다.

     제국군이 몰려온다.

     세이레네에서 도망친 난민들이 한숨을 돌릴 시간도 없이, 지브롤터까지 제국군이 몰려올 것이다.

     “도, 도망쳐야 해! 어서! 여기 있으면 제국군에게, 히이익!”

     “사, 살려주십시오! 지브롤터시잖습니까!”

     혼란에 빠진 난민들은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간신히 살아서 도망쳤는데, 그 죽음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곳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으, 응전하는 거예요! 그래요, 기사와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협곡을 지키는 거예요!”

     세이레네에서 도망쳐온 한 젊은 여인이 소리쳤다.

     피가 튀기는 했어도 제법 고급스러운 제국식 옷을 입은 부유층의 자제처럼 보였다.

     “여기는 지브롤터니까, 후작님께서는 분명 저희를-”

     짜ㅡ악.

     

     여인은 쓰러졌다.

     뺨을 한 번 얻어맞았을 뿐인데, 여인은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듯 엎어졌다.

     “부, 부인!”

     “네가 어디서 감히.”

     샤를로트 후작부인이 뒤로 기사들을 대동한 채 나타났다.

     “후작께서는 지브롤터의 모든 백성들에게 후퇴를 명령하셨다. 영지민들은 지금 짐을 싸고 있는데, 어디서 감히 네가 함부로 지껄이느냐.”

     기사들을 대동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제1 관문이 뚫리면서 크림슨 후작이 상처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런 걸까.

     “그, 그것이….”

     “실랑이를 할 시간은 없다. 방해할 생각이 아니라면 도망쳐라. 지금 당장 움직인다면 병사들이 돕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 지브롤터는 지브롤터의 영지민을 보호하는 이들이니.”

     저벅, 저벅.

     병사들의 호위 하에 영지민들이 전부 집을 비우고 하나둘 거리로 나온다.

     몸이 불편한 이들을 수레에 싣기도 하고, 가진 짐을 최대한 단촐하고 가볍게 준비하여 왕도를 향해 열을 맞춰 걷는다.

     “뭐, 뭐야…! 왜, 왜 이렇게 빨리 도망치려고 하는 건데!”

     난민 중 하나가 외쳤다.

     검은 머리카락의 아래, 어딘가 하얀색 머리카락이 얼핏 스쳐보였다.

     “어째서…!”

     “그대는 지금 지브롤터 후작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건가?”

     “뭐, 뭐라고요…?”

     “영주께서 피난을 명령하셨으니, 영지민들은 그 지시에 따를 뿐. 분란을 조장하고자 하는 걸 보아하니, 난민 사이에 숨어든 제국의 첩자렸다.”

     샤를로트 후작 부인이 앞으로 손을 뻗자, 바로 기사들이 검은머리의 난민을 덮쳤다.

     “큭?!”

     난민은 어떻게 움직일 새도 없이 무릎을 꿇었고, 기사들은 난민의 품에 순식간에 손을 넣었다.

     “어, 어딜 만져! 어딜-”

     “나왔습니다.”

     사라락.

     난민의 몸에서 꺼낸 작은 종이포장지를 기사가 손으로 문지르자, 안에서 하얀 가루가 빠져나와 바람에 흩날렸다.

     “처리하세요.”

     “예, 부인.”

     “잠-”

     푸ㅡ욱.

     난민-으로 위장했던 제국의 그림자는 쓰러졌다.

     붉은 피가 아래로 흘러내렸고, 샤를로트 부인은 눈을 파르르 떨며 질끈 눈을 감았다.

     “…확성기를.”

     “예, 부인.”

     샤를로트 부인은 기사로부터 마도구를 건네받았다.

     “…아, 아아.”

     샤를로트 부인의 목소리가 영지 곳곳에 울려퍼진다.

     제국식 가로등에 설치된 음성증폭 마도구로 흘러들어간 샤를로트 부인의 말이 그대로 메아리처럼 후작성에 퍼져나간다.

     “모두, 동요하지 말고 지브롤터 병사들의 지시에 따르세요.”

     

     이전에는 마법사들을 동원해야만 가능했던 마법.

     그것이 지금 제국의 기술에 의해, 지브롤터의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지브롤터 후작께서 피난을 명령하셨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영지를 벗어나, 왕도에 있는 오로솔을 향해 떠나세요.”

     정작 그 상대가 제국군이라는 건 아이러니하지만.

     “마도자동선은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제국의 공작원들이 설치해둔 폭발마석이 있습니다.”

     영지민들은 걸어가야만 한다.

     일부 수레나 바퀴 달린 물건을 이용해 짐이나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싣고 가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전처럼 마도자동선을 타고 편하게 움직이지는 못한다.

     “우리는….”

     “모두, 주모오오옥ㅡㅡㅡㅡ!!”

     샤를로트 부인의 목소리가 아닌 새로운 목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나는 지브롤터 바르셀로나 총독부, 마도공학 연구소의 소장 바토리 에르제베트!”

     “에, 에르제베트 씨…?”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야!”

     바토리 소장이 나타나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제국이 보내준 마도자동선은 위험하지만, 바르셀로나에서 가져온 이 물건들은 안전하거든!”

     “그, 그건…?”

     “대충, 수송차량!!”

     바토리 소장은 지브롤터 후작성 내부로 들어오는 황금빛 무언가를 향해 소리질렀다.

     “이름하야, 황금마차!”

     황금으로 반짝이는 초대형 마차.

     앞뒤로 황금으로 된 바퀴가 네 개 달려있고, 그 바퀴와 축 위에 얹어진 물건은 누가봐도 얇은 나무로 된 창고가 아닐까 싶었으나.

     “샤를로트 후작 부인. 이거면 빠르게 영지민들을 퇴각시킬 수 있는데, 어떻게 할래?”

     

     그 안에는 적어도 한 대에 서른 명 가량 탈 수 있을만큼 공간이 충분했다.

     “이걸…언제…?”

     샤를로트 후작 부인은 확성기에 흐르는 마석을 잠시 비활성화 상태로 만들었다.

     “급하게 창고로 쓰던 것 아래에 바퀴를 달고 가져온 거지. 원래는 식량 수송용이었는데.”

     “…….”

     일종의 초대형 짐수레.

     “식량을 싣고 오로솔로 보내고 남은 걸 가져온 거야. 마음 같아서는 백 대 천 대 가지고 오고 싶었지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

     바토리 소장의 말에 샤를로트 부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습니다. 후작님도, 그레이도 당신은 믿을 수 있다고 했으니.”

     “휴, 다행이네. 혹시 제국 출신이라고 믿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제국 출신인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국 출신이든 왕국 출신이든,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게 문제지.”

     “…그렇네.”

     바토리 소장이 쓰게 웃고, 샤를로트 부인은 마석을 다시 활성화했다.

     “기사들에게. 걷지 못하는 자부터 먼저 황금마차에 싣고 오로솔로 보내겠습니다. 어린 아이, 그 보호자 어머니, 노인 순으로 황금마차에 태우세요. 영지민 여러분, 지브롤터답게…행동하기를 바랍니다.”

     지브롤터답게.

     어느 누군가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 분명 영지민들은 지브롤터가 지금까지 쌓아온 관념과 행동양식을 바탕으로 행동할 것이다.

     “…….”

     샤를로트 후작 부인은 마석을 비활성화했다.

     “바토리 소장. 영주성에 누아르를 비롯한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함께 왕도로 향해주시겠습니까?”

     “……부인은?”

     “누군가는 지브롤터 성을 지켜야 합니다. 후작께서 오실 때까지.”

     “…위험하지 않겠어?”

     “위험하다면, 지브롤터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숨으면 됩니다.”

     샤를로트 후작 부인은 자신의 왼쪽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후작성을 바라봤다.

     후작성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캐롤라인 성이 아닌, 아주 오래 전부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구 백작성의 어느 한 방을.

     “…….”

     “부인?”

     “……아니요, 아무것도.”

     샤를로트 후작 부인은 굳은 얼굴로 후작성을 향했다.

     * * *

     그 시각.

     “…….”

     크림슨 지브롤터는 자신의 아래에 펼쳐진 광경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내려오시게, 후작.”

     합스베르크 황제.

     “오후에 티타임 정도는 가볍게 즐길 수 있지 않겠나.”

     그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진 상태로 2관문 앞에 나타나더니, 부하들을 동원해 티테이블을 깔았다.

     어디에서 가져온 걸까.

     아마도 관문 좌우로 위치한 아이페리아 아웃렛의 카페에서 가져온 게 아닐까 싶었으나, 그걸 저기 저렇게 철로의 위에 당당히 놓아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후작 각하.”

     “여차하면 외쳐서 보고하게.”

     크림슨 지브롤터는 성벽 아래로 밧줄을 던진 뒤, 밧줄을 한 줄로 잡고 그대로 관문을 내려갔다.

     “한 번에 뛰어서 내려오지 않는군. 종군기자가 찍었으면 1면에 실렸을 텐데.”

     “…….”

     “아니면 그런 체력도 온전히 유지하고자 하는 건가? 이거 영광이군. 크림슨 지브롤터에게 그런 경계를 받다니 말이야.”

     “너.”

     크림슨 후작은 티테이블에 이미 앉아있는 황제의 맞은 편에 섰다.

     “그 사이에, 무슨 짓을 한 거지?”

     “안심하게. 인간을 저버리지는 않았어. 아니지, 어떤 이들의 관점에 따라서는 비인간적인 짓을 하기도 한 건가?”

     “……흥.”

     

     싱글벙글 웃는 황제에 크림슨 후작은 코웃음을 치며 의자에 앉았다.

     “영광이군. 이렇게 초대에 응해줘서.”

     “목적을 말하라.”

     “말 그대로, 티타임이라고 하지 않았나.”

     날카로운 후작의 태도에도 황제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계속 검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겠지만, 이렇게 직접 말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지 않은가. 내가 이렇게 그대를 배려하여, 왕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노스트럼을 전부 없애고자 하는 자가 노스트럼어로 말하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적어도 마지막 남은 노스트럼까지 죽이기 전까지는 그 자를 위해 말해줘야지. 본 황제가 노스트럼어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이 땅에 노스트럼이 더 이상 한 명도 없을 때다.”

     “그렇다면, 평생 노스트럼어를 사용해야겠어.”

     “시시콜콜한 기싸움이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닌데, 한 마디를 지지 않는군.”

     황제가 빈 잔에 직접 차를 따랐다.

     “잔을 드시게. 안심해도 좋아. 독이라거나 이상한 건 하나도 안 넣은 순수한 솜누스 차니까.”

     “…….”

     “겁 먹었나? 아니면 두려운가? 쯧. 재미 없기는.”

     앞으로 건네진 찻잔에도 후작이 미동도 없자, 황제는 뚱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그레이였다면 바로 피식 웃으면서 잔을 들었을 것을.”

     “……갑자기 그레이의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지?”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뭐라?”

     

     황제가 가볍게 차를 홀짝인다.

     그 모습에서 후작은 누군가가 순간적으로 겹쳐보였으나,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방금, 누구를 생각했지?”

     황제가 씩 미소를 지었다.

     한쪽 다리를 꼬며,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한 손을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대답하지 않아도 알겠군.”

     “남의 아들을 흉내내지 마라.”

     “흉내? 아니야. 이건 반대지.”

     황제가 웃는다.

     “이런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마저 영향을 받을 정도로, 그레이 지브롤터는 나를 닮았어.”

     “…….”

     “한 가지 묻지. 그대는…그레이 지브롤터가 정말로 ‘수호자 그레이’라고 생각하나?”

     “하. 황제께서 거짓된 황금이 보여주는 환상을 믿을 줄은 몰랐는데?”

     “이곳에서 이야기하는 건 그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아. 그레이 지브롤터를 걸고 맹세하지.”

     “내 아들이다.”

     후작이 탁자에 주먹을 올리며 으르렁거렸다.

     “남의 자식을 가지고 함부로 맹세 따위를 하지 마라.”

     “그대의 자식인가. 정말로?”

     “죽고 싶나?”

     “정말로, 그레이 지브롤터가 그대의 자식일까? 그래, 지브롤터의 피는 이어받았으니 당연히 ‘친자’는 분명하지. 하지만….”

     황제가 손깍지를 끼며 앞으로 상체를 숙인다.

     “낳았다고 해서 다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 하는데, 그레이가 가장 닮은 남자는 누구일까?”

     움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나? 아들이 갑자기 달라졌다는 걸. 10살 즈음, 그래. 후작께서 변경백이셨을 때 가문 내의 흑장미들을 전부 꺾어버렸을 때, 그 때부터 그레이 지브롤터는 다른 모습을 보였지. 마치 어른이 갑자기 10살 아이가 된 것처럼.”

     “그레이는 그레이다. 나의 아들이야.”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나? 아버지를 향한 시선이 어딘가 다르다는 걸.”

     “…….”

     “그레이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야. 나는 그걸 일부러 들춰내지는 않았지만, 예상은 할 수 있지. 그레이 지브롤터가 10살 때부터 보였던 모습을 종합해보면….”

     황제가 이겼다는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회귀 전, 그레이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닥쳐라.”

     “누구에게서 남자를 배우고, 누구에게서 어른을 배웠는지. 그것은 크림슨의 방식인가, 아니면 합스베르크의 방식인가?”

     “닥치라고 했을텐데.”

     “으하하하하하하!!”

     황제가 폭소를 터뜨리며 탁자를 손으로 두드렸다.

     “그레이는 그대와 같은 자의 아들로 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자야. 그러니….”

     “네 종자가 망가진 게 아니고?”

     황제의 미소가 굳었다.

     “수천 명에 이르는 여인들에게 사생아를 낳게 하고도, 우리 그레이 한 명 만큼의 남자는 낳지 못했지.”

     “…….”

     “그나마 여자아이들은 예쁘게 잘 자랐지만, 키우는 꼴이 그래서야 원.”

     “하….”

     후작과 황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세계가 뒤엎어졌든 말든, 그레이는 말했다. 내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

     “네놈은 평생 듣지 못할 말이지.”

     “아무래도.”

     황제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빼앗아야겠어. 지브롤터를.”

     “마음껏 해봐라. 지브롤터를 지키는 건 나다.”

     쨍그랑.

     “티타임은 끝이다.”

     두 사람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에 자신의 색으로 빛나는 오러의 검을 일으켜 움켜쥐었다.

     “유언은 없나, 황제?”

     “유언? 전혀. 이건 선전포고지.”

     황제의 눈동자가 순간, 탁한 회색빛으로 반짝였다.

     “누가 그레이의 아버지인지,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서걱.

     “누가, 아들을 위해 죽어줄 수 있는지.”

     “…….!!”

     탁자가 반으로 갈라짐과 함께, 두 오러가 부딪쳤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썬토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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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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