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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4

        

         “으그으윽…!”

         

         …가끔 있다. 베풀어진 호의에 역으로 앙심을 품는 인간들이.

         

         무슨 가게가, 어떤 물건이 있는지는 고사하고 도시 생활에 뭐가 필요한지도 모르는 신생아나 다름없는 사람의 손을 거침없이 쥐고 이끌어준 헬레나에게 감사하는 게 맞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심지어 불필요한 지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나를 배려했는지, 거리낌없이 싫은 기색 하나 내지 않고 자기 지갑을 열어줬다면 더욱더.

         

         그래도 세상에는 절차라는 게 있는 법이다.

         누군가를 정신적으로 고문할 거라면 먼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한다든가… 데이트에 불러낼 거라면 영화나 식사를 먼저 권한다든가… 하는 상식적인 절차가!

         

         그러니 이젠 내게도 화낼 권리 정도는 생겼다고 보는게 맞겠지만….

         

         “후…. 이러면 대충 생각나는 물건은 다 산 것 같네? 이제 그만 저녁 먹고 들어갈까…?”

         

         “……저녁은 내가 살게.”

         

         “…건방지네. 동생 주제에.”

         

         …그녀에게 내가 차마 어떻게 화를 내겠나? 얼굴만 봐도 없던 안심감이 솟고, 불안하게 흔들리던 발 밑을 굳혀주는 북극성 같은 나의 별에게.

         

         오와 열을 맞춘 드론(Drone : 자율 항법 장치가 설치된 무인기) 택배 서비스를 통해, 하루 먼저 헬레나의 집으로 날아가는 내 짐을 잠시 구경하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탱크톱과 핫팬츠는 속옷이 아니라는 점원의 잔인한 지적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스포츠 브라, 스포츠 팬티라는 낯부끄러운 명칭 좀 잠깐 까먹었다고 그런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오다니…? 결국 수치를 무릅쓰고 직접 물건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러니…… 누가 제발 내 짐만 격추해줬으면 좋겠다. 안에 함께 들은 수건이나 온갖 소모품들이 아깝긴 해도 헬레나가 고른. 무슨 프릴 달린 속옷만큼은… 다시 직시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덜컹… 덜컹….

         

         “와아…….”

         “? 아샤, 멍하니 있지 말고.”

         

         저녁 식사를 할 만한 가게에도 짐작이 있는듯 막힘없이 선도하는 그녀를 따라가자, 이 거대한 쇼핑 센터 중앙에 있는 기둥에 도달했다.

         

         끝도 안보이는 길이의 에스컬레이터 한 쌍이 이중나선을 이루며 기둥을 휘감고 있었고 거기에는 정말 무수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숫자의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을 위해 들락날락 하고 있었다.

         

         아무리 도시 최대규모의 건물 중 하나라 해도 그 정체는 단순한 쇼핑 센터. 일상의 일부에 불과해야 할 풍경마저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공장 마냥 효율적으로 디자인해 놓은 모습은… 상당히 경이로웠다.

         

         …안전문제? 일단 헬레나를 따라 올라타는데 핏자국 같은 건 딱히 안보였다.

         대책이 마련되어 있는건지, 그저 청소를 잘 하는 건지는… 직접 현장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모르리라.

         

         “그런데 지금 무슨 식당에 가는 거야? 혹시….”

         

         입술 바로 안쪽까지 튀어나온 말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유럽계 은발 미인에게 아는 한식당 좀 있냐고 물어보는 건 내가 생각해도 지나쳤다.

         

         “응? 그야 당연히 푸드 코트지. 아샤가 뭘 좋아하는지도 아직 모르니까, 차차 알아가야지.”

         

         “……푸드 코트?”

         

         센터의 흘러 넘치는 유동인구를 보면 없는 편이 이상한 구획이긴 했다.

         개인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식사는 유달리 소비가 관대해지기 쉬운 분야이기도 하니 나쁘지 않은 선택지다.

         

         하지만 ‘차차 알아간다’고 할 때 눈이 빛난 걸 보면 그녀는 내가 대접하기로 한 저녁보다도 마침내 찾아온 대화의 장에 관심이 더 많아 보였다.

         그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물어볼 의문점이라면 나도 꽤 많았으니까.

         

         덜컹….

         

         목적하던 층에 도착했다는 건 푸드 코트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몰랐는데도, 헬레나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알 수 있었다. 공복을 자극하는 냄새가 아릴 정도로 흘러나왔기에 놓치기가 더 힘들었다.  

         

         한 층을 거진 통째로 쓰는 푸드 코트의 첫인상은 뭐랄까… 급식실에 가까웠다.

         그것도 정작 조리과정은 철저하게 감춘 급식실이라 해야 하나?

         

         도시의 불야성을 즐기면서 식사하라는 건지 통유리로 된 외벽은 상당한 개방감을 주는 반면, 정작 음식이 나오는 가게는 수령하는 창구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가려져 있었다.

         

         안에서 쉭쉭하는 증기음과 기계음이 끝없이 들리는 걸 보니 조리사가 누구인지는 잘 알겠다. 대신 식재료는…… 음… 그냥 모르고 사는 게 나은 정보려나…?

         

         삑…!

         

         우선 헬레나가 또 마음대로 계산해버리기 전에, 내 바코드를 정면에 있는 주문용 패널에 연동시켰다.

         

         품질이나 재현도는 둘째 치더라도 수백 페이지, 수천 종류의 메뉴가 팝업 되어 있어서 결정장애가 올 법도 했지만 다행히도 꽤 친숙한 메뉴가 눈에 들어왔기에 망설임없이 주문할 수 있었다.

         

         [ 모조 가니쉬를 곁들인 합성육 스테이크 정식 ]

         

         “헬레나는 뭘 먹고 싶…?”

         

         질문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어깨너머로 뻗어 나온 손이 원하는 메뉴를 꾹 눌러서 추가했다.

         …합성육 스테이크 정식의 주문수량이 두 개로 늘었다.

         

         ““…….””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만으로도 그녀와 내 눈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피식 웃었다.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 해도 따로 따로나마 공유하는 기억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푸쉬이이익—!

         

         주문… 아니, 결제와 거의 동시에 창구에서 튀어나온 음식을 받아 들고 우리는 최대한 인적이 드문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착석과 함께 시작될 줄 알았던 대화는 생각만큼 급하지 않았다.

         

         “…….”

         

         조심스럽게 자른 고기조각을 우물거리다가 삼킨다.

         그녀가 먼저 도화선을 끊어주지 않으려나… 슬쩍 눈치보고, 내가 궁금한 걸 물어봐도 괜찮으려나… 감각을 총동원해서 분위기를 읽어본다.

         

         안절부절 못한 건 아니다. 초조나 불안의 감정을 안기엔 헬레나 발렌타인의 존재가 너무 컸으니까. 단지 그녀가 베푸는 호의의 근원이 명확하지 않았기에, 내가 실수를 할까 봐 걱정됐을 뿐이지.

         

         “…꼭 고양이 같네.”

         

         “콜록콜록…!! ……뭐가?”

         

         테이블을 향해 다소곳하게 내리깔아져 있던 보석 같은 눈이 이쪽을 바라봤다.

         

         “열심히 하악 거리다가도, 부드러운 손길 몇 번 타고 나면 곧잘 따르는 게 너무 귀여워서.”

         

         “?!”

         

         앞으로 밀어닥칠 심오한 나비효과를 걱정하는 사람 속도 모르고 저런 말을…?

         뒷목이 다 뻐근해지는 것 같다.

         

         “이상한 아이란 말이지… 아샤는. 내가 누군지도 잘 몰랐으면서 덥석 따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묘한 부분에서는 확신에 차 있고.”

         

         “그건…….”

         

         관계는 쌍방통행, …들여다보는 만큼 들여다봐졌다.

         사이를 가로막는 모니터가 없어졌기에, 아무래도 그녀 또한 나를 신중하게 살폈던 것 같다.

         

         “처음엔 그냥 혼자 내버려두기 위험할 정도로 착하고 귀여운 애가 도시에 온다 길래 궁금했는데…… 이제는 나도 관심을 끄기 애매해졌어.”

         

         “뭐… 뭐가, 왜…!”

         

         정정한다. 초조와 불안, 두 가지 감정이 방금 막 속에서 피어났다.

         입술에 묻은 소스를 핥는 그녀의 혀와 요사스럽게 빛나는 붉은 눈에서 시선을 떼기가 힘들다. …아니, 떼지 않는다. 포식자의 모습을 확인하고도 외면하는 피식자는 없으니까.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이라는 소녀는. 과연 어디에서 나와 만났길래, 자꾸 아련하고… 꿀이 떨어지고… 부끄러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는 걸까… 알고 싶어졌어.”

         

         “?!?!?!?!?!!!”

         

         쨍그랑…!

         

         호흡이 꼬이면서 해괴망측한 소리가 빠져나오려 했기에 입을 틀어막고 자리에서 냅다 일어섰다.

         떨어트린 포크와 나이프가 바닥을 뒹굴었지만, 오염을 감지한 청소로봇이 바닥을 휩쓸고 지나갔을 뿐 상황이 달라지는 건 전혀 없었다.

         

         가족 간의 따스함을 강조하기엔 우리는 진짜 자매가 아니었고 헬레나 발렌타인은 이미 자신의 속을 내보였다.

         문제라면 내가 가졌던 의문은 기껏해야 ‘왜 경찰 노릇을 하고 있냐?’ 였던 반면 그녀는 대답이 어마어마하게 곤란한 곳까지 깊게 파고들었다는 게 요점이다.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

         

         부정의 주체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일단 입밖으로 나오는 대로 주워섬겼다.

         오해다. 잘못 본거다. 그런 게 아니다, 아무튼지 간에 아니다. 착각이다.

         

         필사적인 변명의 쇄도를 조용히 경청하던 헬레나는 우아하게 식사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으면… 한 번 시험해볼까? 아샤가 원하는 대로 호텔로 돌아가서…?”

         

         “……아?”

         

         부드럽게, 그렇지만 거절할 수 없는 의지가 담긴 팔짱이 껴졌다.

         손을 잡거나 안아 들던 것과는 명백히 다른 의사가 느껴졌다. 보살펴야 할 대상을 향하는 게 아닌 동등한 사람을 에스코트하는 자세.

         

         

         긴 에스컬레이터를 빠져나와 어느새 센터 앞까지 원격 자율주행을 통해 대기시킨 오토바이를 탄다. 쇼핑 센터에서 상층부 호텔까지, 로비에서 내 방까지.

         

         이번엔 지나친 속도감에 무서워할 겨를도 없었다. 오토바이 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폭주기관차는 그 시간동안 나와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간절한 말에 대답도 해주지 않았으니까.

         

         “읏?!”

         

         삐릭!

         

         카드키가 인식되고 701호실 문이 천천히 열린다.

         온신경이 헬레나에게 쏠려 있던 터라 자그마한 전자음에도 새된 소리를 내버렸다.

         

         자연스럽게 찰싹 달라 붙어있던 그녀도 움찔거림과 당혹성을 전달받았고….

         

         “…풉! 아하하핫! 아샤도 참… 언니가 농담 좀 했다고 놀라서 움츠러들기는!”

         “……잠깐, 뭐라고?!”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턱이 빠진 것 같다. 입이 안 다물어진다. 필시 그녀로부터 보면 내 표정은 웃기겠지.

         호탕하게 웃던 헬레나가 먼저 방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상층부 건물은 경치가 다르다는 둥, 에어 클리너가 아니라 진짜 물이 나오는 샤워기도 있냐는 둥… 가벼운 잡담이 이어졌다.

         

         …그럼 정신이 혼미한 나는요?!

         

         “아샤…?”

         

         “!!”

         

         쾅!!

         

         은근한 목소리를 무시하고 화장실 문을 닫은 채 안에 틀어박혔다.

         강렬한 자괴감이 얼굴을 쿡쿡 찌른다. 어떻게 이런 장난에 속아넘어갔는지 모르겠다.

         

         도저히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기색을 내보인 그녀도 그녀지만, 당초에 그렇고 그런 쪽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 내 뇌의 잘못도 크다.

         

         거울을 노려보자 새빨개진 소녀가 똑같이 나를 노려본다. …멍청이.

         

         …그래, 내용물이 어떻던 간에 이 몸은 한 명의 여성이다. 헬레나도 매혹적인 여성이고.

         그러니 그런 생산성 없는 일을…… 할 리가……? 어라…?

         

         “……잠깐만.”

         

         …네오 헤이븐에서 주인공 캐릭터의 성별이 여자라고 헬레나와 이어지는 게 불가능했던가? 당장 나만 해도 ‘아나스타샤’로서 가능한 경우의 수를 다 클리어하지 않았나?

         

         그리고 헬레나 발렌타인이 시답잖은 농담 같은 걸 한다고? 오히려 말 속에 뼈-진심-을 숨겨뒀다면 모를까…!

         

         왜 이런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떠올린 거지? 왜냐니… 그야 나는 더이상 주인공이 아니니까…?

         

         “윽…!”

         

         그녀가 퍼부었던 말들을 떠올리니 뇌가 화끈해졌다. 게다가 방이 지나치게 조용하다.

         분명… 그녀는 이 문 밖에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다만 내가 어쩔 줄을 몰라 하니까 뒤늦게라도 얼버무렸을 뿐이지.

         

         매끄러운 욕실 타일을 집고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킨다.

         

         …여자 측에서 이만큼이나 배려하게 만들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진심에는 진심으로,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어야 남자일 것이다.

         

         결심을 마친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의 곁으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자의 최후.

    지나가는레콘 님의 10코인 후원! 여기… 다음편이 있습니다…!

    Q. 아니;; 작가님 왜 탈의실 씬을 안 써줘요;;
    A. 아하하하하하하(핵폭탄 제조중)

    제가 글에 자신감은 없을지언정, 저희 식당에서는 구상했던 에피소드만 제공해드린다는 점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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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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