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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4

    은은하게 깔린 안개.

    그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금속 벽.

    둘레가 짐작되지도 않는 강철탑의 밑동에는 은은한 안개가 깔려있었다.

    강철탑이 솟아오른 공터에는 경건함마저 느끼게 하는 고요함이 가득했다.

    흐릿한 안개, 시야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탑, 거기에 성스러움마저 느껴지는 고요함.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강철탑의 공터를 현실과 동떨어진 장소처럼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건물과 비교하기 힘든, 산이랑 비교해야 할 것 같은 스케일의 거대한 오브젝트.

    강철탑.

    몇 번을 봐도, 몇 번을 봐도 답이 안 나오는 스케일을 가진 탑이었다.

    거대한 탑만큼이나 널찍한 공터는 고요함만이 가득했는데, 강철탑 근처에는 이상하게 오브젝트들이 접근하려 하질 않아서 굉장히 조용했다.

    강철탑에 접근해서 거대한 벽처럼 보이는 탑의 표면에 손을 올려놓았다.

    서늘한 감촉.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탑의 표면에는 뭔가 울렁거리는 듯한 힘의 율동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강철탑의 파괴 조건은 다시 봐도 예전에 확인했던 그대로였다.

    [Nostalgia]

    ‘노스텔지어’ 라고 읽는 거 맞지?

    갑자기 뭔 영어야.

    내가 파괴 조건을 확인해 본 오브젝트 중 영어로 된 파괴 조건을 가진 오브젝트는 강철탑뿐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영어조차 아니었다.

    러시아어? 아니면 내가 모르는 황당하고 생소한 문자로 쓰여 있던 걸로 기억한다.

    다만 강철탑 주변에서 머물 때 매일 같이 조건을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글로는 변하지는 않았다.

    왜 영어야?

    저런 조건문이면 한글이든 영어든 러시아어든 외계어든 별 쓸모없다는 점은 똑같지만 말이다.

    [Nostalgia].

    향수. 고향을 향한 그리움.

    또는 지난 시절을 향한 그리움.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조건이었다.

    강철탑을 그립게 만들면 클리어인가?

    아니면 강철탑에게 고향이 있는데, 거기에 데려다 줘야하나?

    서울숲에서 살 때도 전혀 알 수가 없는 조건이었는데, 역시 지금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보면 문구가 바뀌어있거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길 기대했는데 말이다.

    아귀처럼 대놓고 추측이 어려운 것보다 기분 나쁜 조건이었다.

    사실 풀 수 있는 문제인데, 내가 멍청해서 못 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단 말이지.

    ***

    미끈한 강철탑의 벽면을 타고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경사라서 물리적으로 올라가기 불가능했지만, 유령화를 사용하면 벽을 타고 걷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1년 전에 내가 해치운 유령화의 주인이었던 집채만 한 대왕 두더지는 하늘을 날아다녔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벽을 뚫을 수 있는 시점에서 바닥을 딛고 설 수 있으면 공기도 딛고 설 수 있어야 정상 아닌가? 

    누가 이런 미묘한 오브젝트 능력에 대해서 강의 좀 해주면 좋겠다. 

    지금 서울이 개박살이 나고 있는 상황에서 여유롭게 강철탑을 오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1년 전부터 기묘하다고 생각하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척 보기에도 괴이해서, 강철탑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를 만한 현상이 있었다. 

    강철탑에 올라가본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나만이 아는 비밀이 아닐까?

    인간은 여기까지 오기가 힘들고, 오브젝트는 이상하게 강철탑에 접근하지 않는다.

    내가 발견한 기묘한 점은 강철탑을 타고 높이 올라가면 보이는 풍경이 예상하던 것과 다르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높아서 신기해요! 이런 게 아니라 아예 보이는 풍경이 지구가 아니게 되어버린다.

    ***

    강철탑 중간에 불쑥 솟아오른 부분을 딛고 서자, 정면에서 불어오는 강풍에 머리칼이 휘날렸다.

    주변을 둘러보자 확실히 색다른 풍경이 반겨줬다.

    강철탑 위에서 보는 풍경은 확실히 한국이 아니었다.

    저 멀리서 보여야 할 해안선도, 폐허가 된 북한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지구조차 아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7개의 달이었다.

    무지개처럼 7가지 색을 가진 달들이 자기주장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달들과는 달리 대지는 병든 것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다.

    ‘으음.’

    하지만 그 풍경은 1년 전에 내가 봤던 풍경과 그리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맥동 같은 격렬한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면 이 풍경도 좀 더 격렬한 변화를 보여줘야 정상일 텐데 말이다.

    하늘에 뜬 커다란 달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아마 여기서는 절대로 닿을 수 없겠지.

    하늘에 떠있는 천체와의 실질적인 거리 이야기가 아니었다.

    물리적인 거리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느껴졌다.

    강철탑과 풍경 사이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닿지 않는걸 알아도, 저렇게 커다란 달을 보면 점프를 참을 수는 없었다.

    폴짝폴짝.

    강철탑에 오르고 나면 내려가기 전에 꼭 한 번쯤은 하게 되는 점프였다.

    ***

    까마득하게 높은 강철탑에서 훌쩍 뛰어내려 공터에 도착하자, 공터의 분위기가 일변해있었다.

    뭐가 변한 거지? 하고 생각해보니, 경건함마저 느끼게 하는 고요함이 사라져있었다.

    끼긱끼긱.

    고요했던 공터에는 쇠와 쇠가 불협화음을 내는 소리가 작게 울리고 있었다.

    안개 너머로 끊임없이.

    끼긱끼긱.

    흐릿한 안개 너머로 인간의 형상이 어렴풋이 비쳐보였다.

    쇳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며 걷는 인간이었다.

    안개의 장벽에서 인간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파랗게 뒤틀린 기괴한 손, 그 손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안개 너머의 실루엣은 분명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기는 했다.

    군데군데 기계가 틀어박혀 있는 인간이었다.

    그 기계들은 강철탑의 영향을 받는지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지만, 그와 비슷한 속도로 빠르게 재생하고 있었다.

    오브젝트? 기계?

    눈으로 들여다보니, 저 인간은 확실히 오브젝트였다.

    파괴 조건은 [본체의 파괴].

    아마 본체가 파괴되기 전까진 무한히 재생하는 타입으로 보였다.

    그 재생력으로 강철탑의 문명 분쇄를 버티고 있었다.

    안개를 뚫고 완전히 드러난 오브젝트 인간의 모습은 멀쩡한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정도의 크기, 인간 같은 실루엣, 인간 같은 움직임을 보였지만 인간이라고 할 순 없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 죽은 지 오래되어 검게 굳은 피. 썩어버린 눈동자.

    시체가 기계장치의 도움으로 걷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꺼림칙한 분위기를 풍기는 기계좀비는 나를 무시하고 지나쳐서 계속 걸어 나갔다.

    강철탑까지 계속.

    강철탑의 코앞까지 도착한 기계좀비는 고통에 찬 표정을 지우고는 일그러진 웃음을 얼굴 가득 띄웠다.

    양팔을 넓게 벌려 강철탑을 껴안자, 맹렬한 진동과 함께 무시무시한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두근.

    두근.

    강철탑의 맥동이었다.

    좀비는 맥동에 휘말려 가루가 되서 사라져버렸지만, 한번 시작한 맥동은 멈추지 않고 수차례 계속 되었다.

    맥동의 원인을 발견했다!

    맥동의 발생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

    주기적으로 맥동이 발생하는 것을 볼 때, 저 좀비들은 어디선가 정기적으로 보내지는 것으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좀비가 왔던 북쪽으로 거슬러 이동하다보니, 또 다른 기계좀비가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 좀비를 강철탑에 도착하지 못하게 한다면 강철탑의 맥동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강철탑의 문명 분쇄에도 버티는 녀석인데, 팔다리를 분질러도 순식간에 재생해버릴 게 뻔했다.

    역시 이대로 좀비들의 이동을 끝까지 추적해서 본체를 박살나야 이 사태가 끝나려나? 하고 생각이 들 때쯤,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사실은 이 좀비를 처음 볼 때부터 느껴졌던 꺼림칙함이었다.

    기계 좀비는 오브젝트라고 보기에는 묘하게 맞물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각각의 부분이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자세히 보니, 저 오브젝트는 전체적으로 볼 때는 하나의 오브젝트로 보였지만, 가까이서보니 부위별로 제각각인 오브젝트였다.

    피부, 심장, 뼈대, 내장. 

    모두 다른 종류의 오브젝트였다.

    가장 핵심으로 보이는 심장을 뽑아내자, 황금으로 만들어진 심장과 혈관이 한꺼번에 뽑혀 나왔다.

    그러자 파괴 조건이었던 [본체파괴]가 사라져 버렸다.

    본체를 파괴하기 전까지는 무한히 재생하는 힘을 잃어버린 기계좀비는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버렸다.

    좀비가 있던 자리에 남겨진 것은 사람의 피와 살, 그리고 뼈, 정체불명의 동물들의 내장.

    황금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심장과 튼튼한 합금으로 된 튼튼한 금속 뼈대는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린 것이다.

    여러 오브젝트를 조합해서 만든 오브젝트인건가? 

    그렇다면 사람이 만든 거야?

    처음 보는 종류의 오브젝트였다.

    아마 따로따로 노는 오브젝트를 황금 심장으로 엮어서 하나로 만든 것 같은데, 이런 기술이 개발됐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조합 오브젝트가 강철탑의 맥동을 유발시키다니? 

    이번 강철탑 맥동 사태는 누군가가 유발 시킨 사태였던 건가.

    더욱더 기계좀비의 본체를 찾아갈 필요가 생겼다.

    다음화 보기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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