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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4

       ‘아아, 지금 시작하는 거에요?’

       

        치직! 수정구에 빛이 들어오자 테이블에 앉은 여인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의욕없는 표정에 반해 위로 살짝 치켜올라간 눈꼬리는 드센 성격임을 짐작케 했다.

        자색이 감도는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꼬며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이는 프란츠 가문의 적자, 헤르헤 소롯이었다.

       

        ‘궁금한 거 아무거나 물어보세요. 남자친구 있냐고요? 그런 쓸데없는 질문 말고요.’

       

        영상의 내용은 5년 전 생활부에서 주최했던 ‘현재 마탑에서 가장 주목받는 마법사 랭킹!’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1위는 아직도 소문만이 무성한 탑주, 2위는 마법제에서 우승한 신예였으나 둘 다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았다.

        당시 3위로 입상한 헤르헤만이 패널로 참여해 소감과 함께 앵커가 묻는 몇 가지 질문에 대해 답해주었다.

       

        ‘왜 나왔냐고요? 나오면 돈 준다 했잖아요. 그거 알아요? 마탑에서 해주학파를 제외하고 제일 쪼들리는 곳이 우리 소환학파라는 거.’

       

        ‘마법진에서 튀어나오는 소환물, 이거 다 공짜 아니거든요. 무기나 소환수도 다 업체랑 계약 맺어야 하고 파손 우려 때문에 보험료도 장난 아니게 높고…….’

       

        ‘메테오도 함부로 사용 못하는 이유가 있거든요. 남의 산에서 함부로 돌 갖다가 떨궜는데 거기가 하필 선산이어서 조상님 분묘라도 있었다고 생각해봐요?’

       

        ‘그날로 바로 가문끼리 전쟁 들어가는 거지 뭐.’

       

        ‘파도의 소환사아? 부르기야 멋대로지만 사실 공역에 있는 트라팔가 호수가 저희 소유여서 그런 거에요. 남는 게 물뿐인데 그거라도 뿌려야지 않겠어요?’

       

        ‘이러니 소환사들이 죽으려 하지. 서열은 계속 높아지는데 가문은 점점 돈이 없어져, 덕분에 난 이 나이까지 연애도 못해~ 혼담도 안 와~.’

       

        ‘……말하다 보니 열받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데 이딴 건 대체 왜 찍는 거에요?’

       

        시청률이 저조하여 단 1회를 끝으로 조기종영한 프로그램이었지만, 그 기록이 담긴 수정구는 창고 구석에 먼지쌓인 채 남아 있었다.

        창고의 위치는 해주학파가 임시 라운지로 쓰고 있는 계단 바로 옆이었다.

       

        “저희 동생이, 크흥! 애가 좀 까칠하긴 해도 진짜 착했거든여……!”

        “그래그래, 그런 사정이 있었군.”

        “혼자 등반도 잘 하고, 훌쩍, 매번 용돈도 부치고, 그때도 돈 벌려고 잠시 공역에 다녀온다는 말만 믿고 있었는데…….”

        “우리 해주학파에서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있게 도움을 주도록 하겠네. 아, 계약 기간은 우선 30년 정도면 괜찮겠지? 만료되면 서로 협의 하에 있으면 추후 10년씩 연장하는 걸로 하세.”

        “중간에 다치거나 일을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면 어떻게 되나요? 혹시 사망하게 된다거나.”

        “어지간한 고통은 저주, 크흠 해주를 잘 섞어 경감시킬 수 있으니 걱정 말게. 사망 같은 경우에는 어디보자, 여기 계약서가 한장 더 있는데 싸인하면 흑마법사들이 명계에서 마중나와 줄 걸세. 그러면 다시 와서 일하는 걸로…….”

        “…….”

       

        구구절절한 사연과 동생 자랑을 늘어놓던 토비는 눈물을 훔치며 계약서에 사인했다.

        공역에 조사 위원회가 소집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

       

        “저기요. 거기 바닥에 계속 앉아계실 거에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고 들어서요.”

        “누구한테요?”

        “니플헤이르의 비나 네타니아 님인데, 혹시 용건이 있으신가요?”

        “칫…….”

       

        돌바닥 근처를 맴돌다 혀를 차고 가 버린 마법사는 어제 대화를 나눴던 유저였다.

        본인 딴에는 내 덕에 목숨을 건진 줄은 추호도 모를 것이다.

       

        어제와 다르게 거대한 문 너머로도 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로 회의실은 시끄러웠다.

        회수된 명계의 문의 파편을 놓고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나는 지난 밤 보물방에서 주운 검을 다시 꺼내보았다.

        햇빛에 반사되어 은은히 빛나는 검은 지금도 끊임없이 내 계정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중이었다.

        처음엔 뭔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손잡이 부분에 찢어진 위치노트의 조각이 묶여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에 적힌 내용은 그녀의 아이디와 몸이 굳기 전 마지막으로 휘갈겨 쓴 글.

        그 이상의 글자를 적을 수 없었던 고닉은 지금껏 같은 글만을 반복해서 게시해왔던 것이었다.

       

        ====

        44층에갇혀있어요살 : 살아

        44층에갇혀있어요살 : 있어요!

        44층에갇혀있어요살 : ㄹㅏㄴ츠 ㅎㅔ르ㅎㅔ 소로ㅅ

        44층에갇혀있어요살 : ㅅㅗ호ㅏㄴ한 ㄱㅓㅁ에

        44층에갇혀있어요살 : ㅇㅕㅇㅎㅗㄴ 오ㄹㅁ겨

        ====

       

        그녀는 쓸 수 있는 글자를 최대한 조합하여 자신이 누구이며 어쩌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듣자하니 자신이 소환한 검에 영혼을 옮겨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듯 했다.

       

        다 좋은데, 관리자 계정의 주인이 나라는 사실을 알아낸 부분이 꺼림칙했다.

        위치 추적 기능은 다른 파딱들도 쓸 수 없도록 잠궈 놨는데.

        짐작컨대 차원 계통의 마법인 소환술사의 영혼과 찢어진 노트의 조각이 만나서 생긴 오류인 모양이었다.

       

        은장검에 갇힌 헤르헤 소롯이라는 고닉, 가칭 ‘살살이’는 5년만에 만난 사람이 그리웠는지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

        44층에갇혀있어요살 : 겔러리

        44층에갇혀있어요살 : 보안 ㅎㅕㅇ편 업

        44층에갇혀있어요살 : 주ㄷ닥

        44층에갇혀있어요살 : 나 도와주 어요

        ====

       

        “부러뜨리긴 미안하니 어디 더 깊은 데다 던져버릴까.”

       

        ====

        44층에갇혀있어요살 : 주ㄷ닥!!!!

        44층에갇혀있어요살 : 살살! 살!

        ====

       

        그치만 너 검이잖아, 창보다 쓸모없고.

       

        나는 유려한 곡선의 검날을 허공에 대고 휘둘러 보았다.

        손목만 뻐근할 뿐 기감이 전혀 실리지 않았다.

        가지고 있으면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그녀를 아는 사람들에게 돌려주자니 내 정체를 누설하면 곤란해진다.

        그렇다면 최대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묻어버리는 게 제일 깔끔했다.

       

        — 나 주ㄷ닥 도와!!

        “응? 그럴 필요 없어. 몸도 차가운데 그냥 장롱에서 쉬고 있어. 아니면 호수 밑바닥 같은 곳은 어때?”

        — 아녀! 아녀!!

        “싫어? 그럼 파딱이나 달아줄 테니까 게시판 관리 할래? 넌 잠도 안 자고 갤질할 수 있어서 좋겠다 야. 화창한 날에는 가끔 대장간에 맡겨서 날 갈아줄게.”

       

        내 귀찮은 감정을 느꼈는지 살살이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어필했다.

        검신이 바르르 떨리더니 칼끝이 돌 의자 위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냈다.

        일그러진 소환진 안에서 삐죽 모습을 드러낸 것은 속이 반쯤 비쳐 보이는 여성용 속옷이었다.

        혹시 인간 시절 숨겨놓은 보물이라도 바치려나 싶었는데, 뜻밖의 제안을 듣게 되었다.

       

        — 소호ㅏㄴ은 차원!! 수납!

        “인벤토리로 쓰라고?”

        — 가능!! 베달ㄷㅗ 가능!!!

        “흠…….”

       

        나는 잠시 포인트 상점의 존재에 대해 떠올렸다.

        게시판을 만들자 악질들이 분산되어 더 찾기 힘들어지긴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좋은 제도였다.

        자신의 아이디에 애착을 가지게 만들 수 있기에 대다수의 유저들이 스스로 차단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깡통 계정의 생성 빈도도 이전과 비교해 유의미하게 줄어들었다.

       

        살살이가 있으면 좀 더 유의미한 보상을 전달할 수 있다.

        정확한 실력은 모르겠지만 최소 중층까지 올라온 소환술사를 마음껏 부린다는 건 굉장한 메리트였다.

       

        “그럼 일단 공역에서 나갈 때까지 고민해 볼까.”

        — 사라ㅇ!! 주ㄷ닥 에저ㅇ!!

        “아, 근데 파딱은 시킬 거다?”

        — …….

        “일 잘 하면 나중에 네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강구해 볼게.”

       

        주딱의 검이라.

        생각해보면 제법 멋진 네이밍이로군.

        살살이와 함께하는 갤러리 대숙청의 날을 언젠가 기대해보기로 하며 우선 녀석을 데려가기로 마음 먹었다.

       

        이제 저 지루한 회의만 끝난다면 집에 갈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할 즈음 굳게 닫힌 문이 열리며 고위 마법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비나가 언제 나오나 찾고 있던 내게 크리스티나가 먼저 와서 말을 걸었다.

       

        장난기 어린 시선이 내 무릎 위에 놓인 얼음케이크에 고정되었다.

       

        “그거 거의 다 부수셨네요?”

        “네, 공역에서 나갈 때까지 이걸 부수면 비나 님께서 제게 마법을 하나 내어주시기로 하셨거든요.”

        “마법이요? 혹시 니플헤이르가 갖고 있는 마력의 총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러고 보면 비나도 같은 표현을 썼었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리어 크리스티나가 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되게 담담하시네요? 혹시 순혈 마법사가 마법을 내어준다는 게 어떤 뜻인지 모르시나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당연하죠!! 마법의 근간이 되는 술식의 고유 구절을 타인에게 완전히 개방한다는 건 요람에서부터 지켜온 정수를 혼탁시킨다는 의미에요!”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비유가 있을까요?”

        “그러니까아……! 아, 저기!”

       

        크리스티나의 손가락이 때마침 걸어 나오는 비나를 가리켰다.

        작게 인상을 쓴 그녀는 뒤에서 따라오는 한 남자를 떨쳐내기 위해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현 백가 서열 3위인 운드라 가문의 소가주에요. 이름이…… 빈센트였나? 아무튼 수 계통 마법에 대해서는 플루비아보다 몇 단계는 명망 높은 정통 원소학파죠.”

        “그렇군요.”

        “순혈 가문이 마법을 내어준다는 건 예컨대 저런 이들과 하는 일종의 거래에요. 대를 잇고 새로운 요람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쉽게 말해 피를 섞는 거죠.”

        “…….”

        “특히 비나 입장에선 백가는 커녕 어지간한 순혈과 해도 급이 안 맞는데 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비나! 너 당장 이리 와!”

       

        순혈 마법사라는 건 반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였다.

        수명도 수백 년은 거뜬하며 늙지도, 마력이 쇄하지도 않는다.

        오직 더 위대한 마법을 위해 정순한 혈통을 추구하는 그들은 가계도에 결코 아무나 포함시키지 않았다.

       

        나는 그 후보가 될 수 있다고 한 빈센트를 살펴 보았다.

        그는 상당히 불안한 기색으로 공역의 소유권에 대해 논의하던 중이었다.

       

        ‘니플헤이르의 이번 행보에 트라팔가 호수만큼은 제외시켜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건 제 의지로는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에요.’

        ‘단순히 피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추후 저희와 좋은 연을 맺게 되신다면 혼수로…….’

        ‘비나! 너는 대체 생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아, 죄송합니다. 잠시 저희끼리 이야기 좀 할게요.’

       

        크리스티나가 끼어들자 그는 한 발 물러나 얼굴을 찡그렸다.

        위치노트를 자꾸 접었다 폈다 하는 모습에 슬쩍 좌표를 확인한 나는 익숙한 아이디를 발견했다.

        ‘메테오는 물마법’.

        열차 테러를 사주한 꿀벌들의 리더이자 갤러리 내에서 나를 사칭한 녀석이었다.

       

        ‘이 자리에서 조질까?’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곳은 인파가 많으며 그는 딱 봐도 명망 높은 백가의 고위 마법사였으니.

        그런데 아르투르에게 보내준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금구의 ‘S랭크 접근제한 폴더’를 개방하며 그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살살아?”

        — 살(殺)!!!!

       

        갑자기 허리춤의 검이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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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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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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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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