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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40

       흐릿한 밤중에도 레니냐는 자신을 업어 멘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달빛을 담은 듯 은은하게 찰랑이는 은발에, 오팔을 박아넣은 것처럼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눈동자.

       

       무엇보다, 자신과 같이 기다란 귀를 지닌 엘프.

       

       해당 특징을 지닌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 한 명밖에 없었다.

       

       “…르네이 총장님?”

       

       자신을 둘러맨 사람은 다름 아닌 세실 르네이 총장이었다.

       

       “총장님이 여긴 어떻게…! 읍!”

       “쉿! 조용히!”

       

       세실은 레니냐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파바밧!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난다.

       

       질 좋은 마력을 운용하는데다가 공계정령의 도움까지 받는 세실의 전력 질주는 바람과도 같았다.

       

       레니냐는 놀라움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꼈다.

       

       “후우… 이제 안 따라오네.”

       

       눈 깜짝할 사이에 경찰과 주민을 따돌렸다. 세실은 레니냐를 통나무 위에 내려놓았다. 곧이어 손전등을 비추었다.

       

       세실이 레니냐의 발목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레니냐의 입에서 윽윽, 하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발목을 삐었구나. 기다려 봐. 금방 처치해 줄 테니까.”

       

       세실은 정령마도를 사용하여 빠르게 염좌를 제거했다. 뻐근함 감이 남아있었지만, 조금 전에 비하면 확실히 좋아졌다.

       

       레니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발목을 천천히 돌렸다.

       

       “괜찮지?”

       “네. 저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레니냐는 입을 달싹이다가 말았다.

       

       “결국 이런 식으로 일이 터졌구나. 대신 사과할게. 미안해.”

       “아니에요. 총장님이 어째서….”

       

       세실은 고개를 내저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라 그래. 지금 제정신이 아닌 엘프가 많아. 하지만 이것 하나만 알아줘.”

       

        너흴 응원하는 엘프들도 있다는 것을.

       

       그리 말하는 세실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니냐. 총장인 나도 이제는 어찌할 수가 없어. 일리야드 아카데미에는 더 다닐 수 없을 거야. 정말 미안해.”

       “그러면…….”

       

       세실은 레니냐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겼다. 형형색색의 눈동자와 금빛 눈동자가 맞닿았다.

       

       “대신 이걸 받아. 추천장이야. 이걸 들고 에테리아에 가서 틸레트에 편입하렴.”

       

       레니냐의 눈앞에 작은 편지 봉투가 내밀어진다. 레니냐는 망설임 없이 봉투를 받아들었다.

       

       “읏.”

       

       제법 무겁다.

       

       “안에 골렘이 담긴 스크롤이랑 마력초를 동봉해 놓았어. 안전한 곳까지 벗어난 다음 그걸 사용해서 도망치렴.”

       “…감사합니다.”

       “에테리아에 도착하면 반드시 하스펠트 공작부터 찾고. 알겠지?”

       

       레니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냐는 품에 편지를 넣은 뒤 천천히 뒤를 돌았다. 세실이 북서쪽을 가리키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세상에는 악인이 많다.

       

       그렇지만.

       

       선인 또한 있는 법이었다.

       

       레니냐는 달렸다.

       

       

       **

       

       

       나흘에 걸친 대장정 끝에, 레니냐는 에테리아의 수도에 도착했다.

       

       틸레트.

       

       과거에 끗발 날리던 아카데미의 명칭이 새 나라 서울의 이름으로 탈바꿈한 셈이다.

       

       레니냐는 세실이 말해준 대로 하스펠트 공작을 찾았다.

       

       정확히는, 그의 딸을 찾아간 것이지만.

       

       “…그래요, 그렇군요.”

       

       신(新) 틸레트 아카데미.

       

       화계마도 집중 연구실.

       

       찰랑이는 금발과, 홍옥 같은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 세실의 추천장을 조용히 읽어내려갔다.

       

       그녀는 입에 마력초를 문 채로 두 눈을 슴벅거렸다.

       

       탁.

       

       여인이 편지를 내려놓았다.

       

       “편입 수속은 문제 없이 처리될 거예요.”

       “저, 정말인가요?”

       “다른 엘프도 아니고, 르네이 총장님께서 보낸 것이니까요. 게다가…….”

       

       그녀가 레니냐를 아련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을 끝맺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여인의 이름은 ‘클라이스 하스펠트’.

       

       한때 에테르의 담임이었고, 지금은 레니냐의 보호자가 될 사람.

       

       다만 에테르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을 갖추었다.

       

       자신의 오랜 친구인 헤를라인처럼 이 아이를 보살피겠다. 비록 그 과정이 서투를지라도. 정성으로 대해 주겠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잠깐 식사라도 할까요?”

       

       그런 다짐을 한 클라이스는 레니냐에게 애플파이와 에그 스크램블 따위를 내주었다.

       

       레니냐의 눈동자가 왕방울처럼 커졌다.

       

       에테르 선생님이 고인이 된 이후, 오랜만에 먹어 보는 고급 요리.

       

       레니냐는 접시를 단숨에 비워냈다.

       

       “맛있어요?”

       “맛있어요!”

       

       클라이스는 내심 안도했다.

       

       설마 입맛에 안 맞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레니냐는 에테르의 제자다. 엄밀히 말하자면 클라이스의 사손인 것이다. 그러니 더욱더 잘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클라이스가 죽은 에테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었다.

       

       

       **

       

       

       …라고, 클라이스는 생각했겠지만.

       

       유감이다.

       

       나 안 죽었다.

       

       아니, 죽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지.

       

       이 유아스러운 신체만 어떻게든 성장하면 하계로 내려갈 거라고.

       

       그동안 느긋하게 상황을 구경하기로 했다.

       

       “사태가 영 좋지 않은데.”

       

       로테나 프레이도 꾸준히 보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국제정세였다.

       

       엘프들은 내가 남긴 마법을 미사일에 실어 전진 배치했다. 마왕군 잔당을 압송하지 않으면 인간들을 쓸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셈이다.

       

       하지만 쉽게 당할 인간들이 아니었다.

       

       [유감입니다.]

       

       그런 단어로 시작하는 성명을 발표한 레너윌이 히든 카드를 빼들었다.

       

       심지어 그 카드가 무려 세 장이다.

       

       [흑주는 당신들만 있는 줄 아십니까? 우리나라의 국호가 ‘에테리아’입니다. 기술력은 이쪽이 우위임을 아십시오.]

       

       일단 에테리아에서도 흑주 스크롤을 맞서 배치했다.

       

       심지어 미사일에 실어서.

       

       미친. 저건 또 언제 만든 거야.

       

       아니, 만들었다기보다는 엘프들의 기술을 훔쳤다고 하는 편이 맞으려나? 레너윌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이것이 첫 번째 카드였고.

       

       두 번째 카드는….

       

       [고룡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요르문간드.

       

       레너윌은 요르문간드의 군대를 두 나라의 길목에 해당하는 지역에 배치한 뒤 방비를 굳혔다.

       

       명목은 치안 유지였다.

       

       정작 요르문간드는 그 앞까지 가서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지만, 엘프들 입장에서는 간 떨려서 잠도 못 자겠지.

       

       그러나 여기까지만 하면 과연 레너윌일까?

       

       행정, 군사, 외교에서 모두 두각을 드러내던 레너윌 하스펠트다.

       

       며칠 후 공개된 그의 마지막 카드가 엘프들의 의표를 찔렀다.

       

       [무럭무럭 자라라~]

       

       “저, 저 녀석 뭐해.”

       

       내 무덤 앞에 로즈마리가 있다.

       

       심지어 세계수 묘목에 물과 마력을 주고 있다.

       

       그리고 레너윌은 그 장면을 찍어 언론에 보도케 했다.

       

       [여신께서 금안을 보살피고 계십니다.]

       

       엘프들은 금안족을 여신이 버린 종족이라고 생각했다. 여신이 버린 종족이란, 마법을 홀로 못 쓰는 종족이다. 그런데 로즈마리는 마력초 없이도 마력을 쓰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전계정령이 하나둘씩 태어난 까닭이다.

       

       엘프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자체 마력을 써서 세계수를 돌보는 마왕군?

       

       그게 마왕군이냐?

       

       [에테리아에는 마수가 없습니다. 마왕군의 잔재도 깔끔하게 처리했습니다. 우리는 조종당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수는 필연적으로 여신과 정령, 세계수를 싫어한다. 그것이 엘프들이 제 국민에게 가르쳐 온 정서였다.

       

       그것이 정면에서 무시당하는 증거가 속속들이 나오고 있으니.

       

       이젠 싸울 이유마저도 사라진 것이다.

       

       나는 수경을 반대편으로 돌려 엘프 관료들이 무얼 하나 훑었다.

       

       쾅쾅쾅쾅!

       

       저집 팝콘 잘하네.

       

       [명분이 사라졌습니다.]

       [이대로 했다간 우리만 손실을 볼 겁니다.]

       

       저들도 아주 바보는 아닌지라 정책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저 이상으로 가면 어떻게 될지 자기들도 아는 것이다.

       

       게다가.

       

       [미쳤나요? 마왕군하곤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왜 잡아다가 감옥에 넣어요?]

       

       엘프 쪽에서도 자중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눈깔이 노랗든 어떻든 일만 잘하면 그만이다!]

       

       세실 르네이 총장. 게오르그 펙튼 장군.

       

       거기에 피어바인 가문을 위시한 몇몇 하이엘프 가문까지.

       

       의외로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내주고 있다.

       

       [전 마도부장관이 우리를 위해 해준 게 있습니다. 에테리아를 이렇게 적대해도 되는 겁니까?]

       [정부는 반성하십쇼!]

       

       3할. 그 정도 될까?

       

       그만한 사람들이 입을 모아 현 시국을 성토한다.

       

       이는 내가 감옥에 있었을 때 맨 처음 나를 지지해 주겠다고 한 엘프들의 비율과 엇비슷했다.

       

       물론 이 때문에 국회는 난장판이 됐다.

       

       [인간들이 우리를 먼저 배신했소!]

       [우리가 금안족을 먼저 박해했으니 응당 치러야 할 대가였습니다!]

       [그거랑 이거랑은 별개지!]

       [여기 기밀문서나 보십시오. 전후 구제국 영토를 그대로 흡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이 매국노 새끼야!]

       [종족차별주의자 놈들아!]

       

       소화기 뿌리고, 멱살 잡고, 백덤블링까지.

       

       아주 난리도 아니다.

       

       엘프의 국론은 반으로 분열됐다.

       

       그 이후로도 로즈마리가 온갖 선행을 벌인 덕에 카우렐리아는 고역을 치렀다.

       

       [본국은 카우렐리아에서 넘어오는 금안족 난민을 무제한 받을 용의가 있다고, 행정수반이 오늘 발표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 발표가 치명타였다.

       

       노예… 가 아니라. 인구 유출을 우려한 카우렐리아는 서둘러 국경을 봉쇄했다.

       

       아무리 금안족이 소수민족이라고는 하나, 숫자가 꽤 된다. 하류층 용역으로 부려먹기 좋은데 나가면 안 되지. 암.

       

       하지만 일반 국민은 그걸 모른다. 금안족이 빠져나가면 아랫경제가 붕괴한다는 걸 알지 못한단 말이다.

       

       [왜 나간다는데 막냐!]

       [정부 새끼들 미쳤어?]

       

       금안족 막으면 왜 막냐고 지랄.

       

       금안족이 빠져나가면 경제지표 떨어지니까 지랄.

       

       카우렐리아는 안정되기는커녕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후.

       

       카우렐리아 남부에서 붉은 깃발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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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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