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43

     한 동안, 제법 멍하니 있었다.

     갑작스럽게 너무 커다란 일이 다가오는 바람에 정신이 아찔했지만, 정신은 금방 돌아왔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건 언제나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심지어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회귀 전, 매국노 그레이의 가족들이 전부 죽었을 때도 그랬다.

     

     혈연이라는 게 뭔지.

     가족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 지브롤터의 죽음에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죽음으로부터, 나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내가 무너지면 안 돼.’

     다른 이들이 무너지더라도, 나는 무너져서는 안 된다.

     설령 회귀 이후에 다시금 그 20살에 느꼈던 실의와 가장의 무게를 다시금 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더 무너져서는 안된다.

     무너지는 건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어야 하며, 그 때까지는 결코 쓰러져서는 안 된다.

     “후ㅡ우.”

     한 번, 심호흡.

     방 안에는 여전히 피냄새와 탄내가 진동하지만, 그 사이에 스며든 알싸한 백은의 냄새가 내 정신을 일깨운다.

     ‘백은이라.’

     제국이 수작을 부린 걸까.

     황제가 몰래 암살자를 보내서 어머니를 죽이려고 한 걸까.

     만일 그렇다면 황제가 무능왕을 깨운다음, 그 무능왕을 어머니를 향한 암살자로 보낸 걸까.

     내가 너무 합스베르크 황제에 대하여 안일하게 생각한 걸까.

     ‘아니야.’

     황제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설령 암살자를 보냈더라도 최소한 무능왕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능왕은 황제의 신념에 정면으로 반하는 존재.

     그런 존재를 그저 노스트럼을 없애기 위한 도구이자 지브롤터를 찌르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고 한다면, 그런 건 내가 아는 황제가 아니다.

     

     합스베르크 황제가 아닌, 테르시안의 마지막 황제 같은 존재일 뿐.

     ‘별개의 상황이 겹쳤어.’

     황금룡의 기적? 무능왕의 마지막 집념?

     아니면 거짓된 황금으로 몸이 바뀌어버린 망령이 저지른 최후의 발악?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적어도 내 앞에 있는 한 가지 상황은 분명하다.

     “…희망은 있어.”

     

     아직, 좌절하기에는 분명 이상한 부분이 있다.

     ‘시신이 없다.’

     어머니의 시신이 없다.

     까맣게 불에 탄 시신이라도 침대 위에 남아있어야 하는데, 아예 시신 자체가 이곳에는 없다.

     이 결계 내부에 있던 이를 갑자기 순간이동 시켜주는 그런 대마법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시신이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한 가지 희망이 생긴다.

     ‘살아계실 거야.’

     

     희망론이다.

     99% 정도는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머지 1% 정도는 살아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죽는다면-

     “도련님!”

     “…멘테 경.”

     사색에 잠긴 사이, 멘테 경이 도착했다.

     “이게, 어떻게 된….”

     “그건 아버지의 팔인가?”

     “…예.”

     “…….”

     멘테 경은 응급처치로 봉한 아버지의 팔을 든 채 저택까지 달려왔다.

     “후작께서는….”

     “로버트 경에게 후방으로 이송하라 전했네.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은밀히.”

     “그러면 팔은….”

     “…상급 마법사의 치유가 통할지 모르겠어. 마스터의 팔을 붙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테니.”

     잘린 팔을 그대로 가져왔으니, 상처가 아물어도 마법의 힘을 이용하면 붙일 수는 있을 터.

     “황제가 베었나?”

     “예. 그….”

     “패배, 인 건가.”

     “…….”

     짐작은 하고 있었다.

     어쩌면 황제가 아버지를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걸.

     “그렇군. 아버지도 결국 닿지 않…아니, 황제가 넘어섰다고 보는 게 맞겠지.”

     회귀 전과 같이 백금경과 에르윈 황후를 죽여서 그 마나를 흡수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을 대신할 마스터들은 제국에 차고 넘쳤을 테니.

     “팔은 그대로 두게. 보존실에 둬서 썩지 않게 둔다면, 붙이면 그냥 팔로는 활용할 수 있을 거야.”

     “…….”

     “소드 마스터로서의 전력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오러’에 잘려나갔다면, 다시 마법으로 팔을 붙인다고 해도 마나는 붙인 팔로 제대로 흐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아버지니까, 외팔이든 팔을 다시 붙이든 소드마스터가 되시겠지. 이전과도 같은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

     “그래, 그래. 샤를로트 부인은 지금…’실종’되었다.”

     “…….”

     멘테 경이 순간적으로 침대를 바라봤다.

     리프트 영지의 주인으로서 어머니의 몸이 저 침대에 남은 흔적과 딱 들어맞는다는 눈치 정도는 당연히 있기에, 그녀는 연신 나를 신경 쓰며 뭔가를 계속 말할듯말듯 머뭇거렸다.

     “멘테 경.”

     “예, 도련님.”

     “나는 분명히 실종이라고 말했어.”

     “…….”

     “나보다 자네가 더 동요하는 것 같군.”

     “도련님은…괜찮으신 겁니까?”

     “자주 들을 것 같긴 한데, 안 괜찮아도 괜찮아야지.”

     차라리 누아르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레타르처럼 혼절이라도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다른 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좀 괜찮아지는 걸까.

     “멘테 경. 이 짧은 전쟁 중에 죽은 사람의 수만 일만이 넘을 거야. 지브롤터 가문의 사람 중에서도 죽은 사람이 나왔다고 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하지만 그런 건 누아르와 레타르의 몫이다.

     “설령 죽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린 동생들을, 그리고 쓰러진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말해야 해. 어머니는, 실종되셨다.”

     “…….”

     내가 그렇게 믿어야 한다.

     “당장은 아니지만, 하루 이내에 노스트럼 전체가 알게 되겠지. 지브롤터의 피난민들이 오로솔에 도착하고 난 뒤에 모두가 알게 될 거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고, 제국의 비행선이 협곡 너머로 넘어올 테니.”

     다른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괜찮아. 간악한 제국은 지브롤터 후작의 약점인 샤를로트 부인을 몰래 습격했고, 샤를로트 부인은 실종되었다. 황제는 그 약점을 이용해 아버지를 상대로 승리했다.”

     “…….”

     “아버지의 패배가 드러난다면, 그렇게 프로파간다를 펼치면 돼. 그러고 나면 어쩌면 그런 희망이 생길 수도 있겠지. 어머니를 제국이 납치하여 인질로 잡고 있다고.”

     실제로 그럴 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나 또한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거짓이 아니다.

     “도련님은…상상 이상으로 침착하시군요. 알겠습니다. 일단, 보고드리겠습니다.”

     멘테 경은 아버지의 팔을 붙잡은 채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황제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로 일주일의 시간을 줬습니다.”

     “…….”

     “저는 그 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으니, 도련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겠습니다. 제가 판단하는 것보다, 도련님이 더 확실하게 판단하실 수 있을테니.”

     “글쎄.”

     잘 모르겠다.

     “기습전쟁을 일으키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소드마스터 일곱을 데려다가 협곡 정면을 뚫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 그런 내가 지금 판단을 내릴 자격이 있을까.”

     “도련님이 아니면, 누구도 그 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저 소드 마스터 일곱이 나타나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으로 하나의 가설이 확증으로 변했다.

     “갑자기 황제가 강해졌다?”

     “예.”

     “…….”

     일곱의 소드 마스터.

     “일곱명 전부 보이지 않았나? 아니면 일부만?”

     “전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양동이 아닐까 의심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 그렇겠지.”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옳다.

     황제가 모종의 방법으로 강해진 뒤 아버지를 상대로 지브롤터 협곡을 뚫었다.

     제국군은 다른 방면으로 병사들을 파견하여 노스트럼을 남북으로 공략하려고 한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일곱 명의 소드 마스터는 전력에서 지워버려도 되겠어.”

     “…예?”

     “멘테 경. 황제가 일주일동안 협곡에서 진군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나?”

     “예. 도련님께 전하라고 직접 말했습니다.”

     “…하긴.”

     거짓이었다면, 애초에 멘테 경이 살아서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최소한 팔, 혹은 다리 한 쪽은 황제에게 베였을테니.

     “멘테 경. 희망을 놓지 말게. 희망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원동력이니까.”

     “…….”

     “그렇게, 바라볼 필요 없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것 뿐이니까.

     “분노를 토해내야 할 대상이 그대가 아닌데, 내가 왜 그대에게 역정을 내고 그러겠는가.”

     “도련님.”

     “그러니, 지시대로 움직이게. 오래 전부터 생각만 했던 거지만, 저지를 때가 된 것 같아.”

     “예?”

     혹시나 하여, 준비했던 것들 중 하나.

     “리프트 령을 최종 방어선으로 삼는다. 멘테 경. 양해를 구해도 되나?”

     “도련님께서 제게 주신 영지였으니, 도련님께서 다시 거두어가시는 걸 괘념치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버지의 팔은 내가 보관할 테니, 그대는 지금 당장 바르셀로나로 가서 ‘협곡의 아이들’을 데려오게. 메를린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리고 전해. 달려와서….”

     보육원의 고아들은 제국의 그림자만큼은 아니지만, 전부 어느정도 충분한 실전 훈련-지브롤터의 기사단 훈련을 거친 정예병이다.

     “리프트 영지에 불을 지른다.”

     “……”

     “논밭과 상점가, 그리고 주거구역에 불을 지른다. 마침 건물도 대부분 목조건물이고, 추운 겨울이라 건조해서 불이 잘 붙겠지.”

     보육원에서 수많은 놀이활동을 통해 단련된 척후병이자, 공병.

     “청야전술…입니까?”

     “청야전술까지는 아니야. 불로 울타리를 만드는 거지. 임시로.”

     황제가 일주일의 시간을 줬다고는 하지만, 그건 황제 개인의 생각.

     “협곡이 뚫렸다고 지브롤터 성을 포기할 수는 없어. 이곳도 성은 성이야. 사람만 충분하다면 지킬 수 있는 요새이자 최전선이지.”

     이곳은 보금자리다.

     아버지의, 어머니의, 그리고 우리 가족의.

     “오해하지 말게. 그저.”

     지브롤터로서 가진 아집은 결코 아니다.

     “내가 있는 곳이, 곧 최전선이 될 뿐.”

     나는 불에 탄 집기들 사이에서 그을음이 진 수정구 하나를 집어들었다.

     “누군가는 지브롤터를 지켜야 해. 이기기 위해서라도.”

     * * *

     잠시 뒤.

     멘테 경이 내 지시를 받고 떠난 사이.

     “후.”

     나는 아버지의 팔을 들고 지하로 내려왔다.

     “…….”

     

     혹시나 오는 동안 저택 전체를 쭉 훑었지만,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택 내부에 연결된 마법을 내가 제어하고 있기에 저택에 누가 어디에 있는지 전부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직접 내 눈으로 일일이 확인하고 다녔다.

     그것은 분명, 직접 눈으로 보고 난 뒤에야 믿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시신이 나타나든.

     아니면 황금룡이 지브롤터에 베푼 기적이든.

     “…….”

     어느 쪽이든, 이미 단두대의 칼날은 떨어졌다.

     

     끼이익.

     문을 연다.

     지하실 가장 깊은 곳, 거의 10년 만에 처음으로 문을 여는 곳.

     회귀 후, 내가 첫 살인을 저질렀던 그 장소.

     영안실.

     지브롤터의 역대 조상들이 안치되어있는 지하묘지.

     “…….”

     그 끝에, ‘크림슨 지브롤터’의 자리가 있다.

     

     잘 짜여진 관은 비어있으며, 보존 마법을 통해 한기가 흘러나왔다.

     “이 안에 들어가는 건 사람이 아닌, 잠시 보관될 팔일 뿐.”

     나는 아버지의 팔을 잠시 아버지-당대 가주의 관에 보관한 뒤, 그 옆에 비어있는 곳을 향해 칼을 들었다.

     사각, 사각.

     명패는 없다.

     칼로 그은 흔적이 곧 명패니까.

     그레이 지브롤터.

     짜여진 관조차 없는, 관을 놓아야 하는 빈 자리에 새겨진 이름.

     “후.”

     어느새, 나도 모르게 손이 안주머니를 향했다.

     회귀 전에 백은을 종이에 말아넣은 채 보관한 갑을 넣어두던 그곳을 향해.

     “…….”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멘테 경의 말에 따르면, 황제는 백은을 들이마셨다고 했었다.

     “쓰는 수밖에 없나.”

     생각은 했지만, 이론만 성립한 채 영원히 사용하지 못할 것 같았던 방법.

     ‘회귀 전에는 하지 못했던, 한 가지 방법.’

     영원히 사용하지 않았을 것 같았던 최후의 수단.

     “…….”

     달카닥.

     나는 관을 하나 열었다.

    다음화 보기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