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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44

       녹는점(Melting Point)이란 ‘고체가 액체로 변하는 온도’로 정의된다. 상계에서는 해당 단어를 주화의 화폐 가치가 주조 가치 이하로 떨어지는 시점을 가리키는 용도로 사용했다.

         

       즉, 해당 주화를 돈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그냥 용광로에 녹여서 그 재료를 파는 게 더 나을 경우, 그 동전은 녹는점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나이스는 자신이 지금 그 지점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아나이스 베르그송’이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불과 몇 달 사이에 대폭락했다. 신분, 지위, 재산 등. 그녀는 가지고 있던 것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세상은 그녀를 위조 화폐로 분류했다. 위조 화폐는 보증하는 금액 자체가 없기에 존재 그 자체로 언제나 녹는점에 머물러 있었다.

         

       녹는점에 도달한 화폐는 주물 덩어리로서의 가치만 가졌다. 아나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녹는점에 도달한 그녀에게 남은 가치는 이 몸뚱어리뿐이었다.

         

       “헥헥, 이 음란한 암캐를 길러주세요! 제 몸을 마음대로 다뤄주세요!”

         

       반쯤 이성을 놓은 상황에서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상인으로서 자질을 발휘했다. 자신이 지닌 유일한 가치를 그에게 거래의 대가로 제안하는 것이었다.

         

       “부탁이에요. 제 몸을 받아주세요.”

         

       모든 것을 잃은 자신이 그에게 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제발요. 부담가질 필요 없어요. 당신 앞에 있는 건 진짜 베르그송 자작이 아니에요. 그냥 한 명의……바, 발정이 난 암캐일 뿐이에요. 부탁이에요. 개처럼……박아 주세요…….”

         

       지난 며칠 동안 원더스타인은 그녀를 만날 때를 대비해 도플갱어 마법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을 충분히 쌓아왔다.

         

       정신은 육체와 혼 사이를 단단히 묶고 있는 끈과 같은 것이었다. 한 인간의 육체가 둘이 되어버린다면, 정신은 혼과 육 사이에서 혼란을 겪기 마련이었다.

         

       도플갱어의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 정신은 크게 취약해진다. 도플갱어와 마주친 인간은 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아나이스는 그런 와중에 자존감이 무너지는 상황을 연달아 경험했다. 그녀의 자아는 현재 무너져 내리기 일보 직전에 와 있었다.

         

       원더스타인은 애써 개 흉내를 내는 그녀를 보고 기시감을 느꼈다.

         

       그가 ‘토치 댄서’로 활동할 때, 그는 사람들 앞에서 ‘데굴데굴’이라는 재주를 보이곤 했었다. 누군가 큰 금액을 후원하면 그에 대한 감사로 몸을 말 그대로 공처럼 데굴데굴 굴렸다.

         

       자신의 장애를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거리로 소비하는 그의 대범함에 많은 사람이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원래 그의 실수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1인칭 액션 게임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주인공 시점에 몰입되어 몸을 틀고 말았다. 의자 위에서 떨어져 매트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그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이것을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포장했다. 사실 그는 이런 게 일상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식으로.

         

       그날 이후로 그는 방송에서 전용 개인기로 데굴데굴을 사용했다. 반응은 상당히 좋았다.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는 ‘자본주의가 낳은 저세상 유쾌함’이라는 식으로 유머 자료가 돌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호의적인 평가와 별개로 그는 자신에게 솔직하게 질문했다.

       데굴데굴이 정말로 즐거웠나?

         

       아니,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병신 같은 꼴을 보이는 게 즐거울 리 없었다. 다만, 자신의 못난 모습을 인정하기 싫어서 억지로 흥겨운 척했을 뿐이었다.

         

       광대는 필연적으로 무대 위에서 자신의 약점을 희화화하기 마련이었다. 큰 코, 작은 키, 못생긴 얼굴, 이상한 목소리. 그들은 일견 조롱받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숨긴 감정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억압될 뿐이라고 했다. 자기 희화화는 약점을 극복하는 방법이 아닌, 찔리고 아프지 않은 척을 하는 자기 최면이었다.

         

       실제로 많은 희극인이 자신의 일상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약점과 관련된 무례한 농담을 걸어오는 것에 불쾌함을 느낀다고 증언했다. 허수아비는 그에 대해 공감했다. 누군가 방송 바깥에서 자신에게 돈을 주며 데굴데굴을 요구하면 큰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그는 아나이스가 자신을 가짜라고 주장하는 데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적들의 위협 앞에 굴종하며 추한 발버둥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녀는 자신이 그걸 즐겼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였다.

         

       마침 그녀에게는 도플갱어라는 간편한 변명거리도 있었다. 자신이 떨어진 높이를 차마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보다 더한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그녀를 보고 원더스타인은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멍멍’은 자신의 ‘데굴데굴’과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의 추락 쇼에 호응해줘야 하나? 아니면 그녀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다그쳐야 하나? 무엇이 그녀를 위한 길이지?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고는 결정을 내렸다.

         

         

       ***

         

         

       다음 날, 황태자 암살 시도에 대한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제국 전역이 들끓었다.

         

       사람들 사이에 많은 추측이 오갔다. 실행범은 누구인지, 그 배후는 또 어디인지, 전하는 얼마나 다치셨는지.

         

       그러나 사건을 수사 중인 황실근위대는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철저히 단속했다. 그들은 이런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섣불리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혼란만 초래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것들은 있었다. 암살자들의 정체가 그랬다. 목격자가 워낙 많은 덕분에 사건이 터진 지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언론은 그들의 출신지를 특정할 수 있었다.

         

       거기다 황태자의 용태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 이렇게 상황이 혼란스러운데도 황태자는 공식 석상에 전혀 얼굴을 비추지 않고 있었다. 암살자들의 공격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인 동시에 사실이 아니었다.

         

       “코카 군은 적어도 3달은 요양해야 할 것 같답니다.”

         

       펠레빈의 보고에 니카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봤다. 현재 그가 머무는 왕실 휴양지의 마당에는 순직한 근위대원들의 유해를 실은 관들이 있었다.

         

       원래부터 내쫓으려고 데려왔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쨌거나 ‘황태자 니콜라이’를 위해 목숨을 바쳐 용감히 싸웠다. 죽은 그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문제가 터지면 딱 갈아치우기 좋잖아? 어차피 별 볼 일 없던 자들이고.’

         

       사람은 체스판 위의 말과 다르다. 머리로는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직접 말 신세가 되어보니 받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코카라면 적당히 여인들을 희롱하고 놀겠지. 사고 좀 쳐주면 나야 더 좋고.’

         

       그렇게나 쉽게 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직접 희롱당하는 여인의 몸이 되어보니 그 무도함에 얼마나 치가 떨리던가.

         

       ‘비겁한 자들은 싫어. 그들의 호흡은 상황에 따라 너무나 쉽게 변해서 말이지.’

         

       그러는 정작 자신은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 앞에서 얼마나 비굴하게 굴었는가. 인간을 버리고 개가 되기까지 했다.

         

       세상을 다 깨우쳤다고 생각한 15살의 자신이 아직 미숙한 존재였음을 그는 이번 일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본 ‘큰 흐름’은 얼마나 작은 호흡들이 켜켜이 쌓여서 만들어내는 것인지…….

         

       펠레빈은 그런 주군의 변한 모습을 보고 대견함을 느꼈다.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지만, 생사가 갈리는 현장에서 뭔가 큰 경험을 한 것 같았다.

         

       “이번 여정의 마지막 단계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는 좀 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요양에 들어갈 예정이지 않았습니까?”

       “그래. 한 달 정도는 빨라. 하지만 비극의 주인공도 나쁘지 않잖아?”

         

       니카의 대답에 펠레빈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비극적인 이야기의 다음 편을 읽기를 두려워합니다. 지지자들에게 괜히 불안감을 줄 필요가 있을까요? 서둘러 세상에 건재하심을 보여주는 게 상책입니다.”

         

       펠레빈이 지금 그에게 건넨 조언은 오늘 아침에도, 어젯밤에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니카는 무슨 생각인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밝히지 않을 거야.”

       “왜 멀쩡하다는 걸 숨기시려는 겁니까?”

       “이대로 3개월 동안 요양하는 것도 괜찮다 싶어서.”

         

       그의 말에 펠레빈의 수심이 깊어졌다. 전하가 성숙해진 것은 좋았지만, 겁쟁이가 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중앙의 견제를 피하는 용도로 말입니까? 하책입니다. 제국의 황태자가 죽을 뻔한 사건입니다. 마도사에다가 암살자도 100명 넘게 동원되었죠. 정적들은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 우리 동태를 살필 겁니다. 절대 시선이 돌아갈 일은 없습니다.”

       “알고 있어.”

       “그러면 왜 그러십니까? 세상에 나서는 게 두려워지신 겁니까?”

       “그럴 리가. 이 정도 위협은 살면서 몇 번은 받아봤어.”

       “그럼 무슨 일입니까?”

         

       잠시 스승의 눈치를 살피던 소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 3달 말인데, 내가 자유롭게 좀 쓸 수 없을까?”

         

       제자의 뜬금없는 제안에 펠레빈은 놀라서 되물었다.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겁니까?”

         

       니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가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 물론 여자수영복이나 이름표에 관한 것은 쏙 뺐다. 우연히 그 자리에 따라갔다가 사건을 관찰할 것처럼 설명했다.

         

       주군과 떠돌이 마술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들은 펠레빈은 턱을 문지르며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흥미로운 정보들이군요. 황제 암살 미수의 배후, 황실 비자금 계좌의 행방, 거기다 콤프라치코스……. 앞의 둘은 꾸며낸 말이라고 해도 마지막 것은…….”

       “분명 캐볼 가치가 있어.”

       “부두교와의 연관성은 확실히 수상합니다. 정보부의 조사에 따르면, 뱀 마녀도 부두교와 연결고리가 있었으니까요. 거기에 하필 그랑프리에 참여 중인 서커스단이라니……. 그것도 조금이지만 의심쩍긴 하군요.”

         

       원래 서커스 그랑프리는 다시 열리는 게 힘들었던 대회였다. 각국 간의 정치적 경제적 사정이 예전만큼 낭만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2회 서커스 그랑프리에서 벌어진 사고를 두고 책임과 보상 문제로 서로 얼마나 신경전을 벌였던가. 당장 대회 유치를 위해 위원회를 꾸린다고 해도 과거의 그 문제가 나오면 각국 간의 협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때 그 모든 부채와 예산을 다 떠안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제국이었다. 뱀 마녀가 황제를 조종해 가장 먼저 벌인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황제의 막무가내식 지원 덕분에 대회는 무사히 개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 정부는 그 때문에 한 번 파산할 뻔했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 서커스 그랑프리 부흥에 목을 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순히 그녀가 몸담은 업계의 숙원이라서 그녀가 발 벗고 나섰다고 하기에는 설명이 부족했다.

         

       나중에 그랑프리의 개최가 확정된 직후, 그녀가 실종되었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는 목적을 달성해서 떠난 게 아니냐는 농담도 나왔었다. 세계 최고의 권력을 차지해놓고 기껏 노리는 게 그런 일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기에 그저 우스갯소리로 치부되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굳이 서커스단에 전하께서 직접 들어가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아니, 내가 직접 하고 싶어.”

       “하지만…….”

       “암살자에게 피습당해 3개월 동안 두문불출. 난 벌써 이 상황을 이용할 수를 몇 가지 생각해뒀어. 당신도 들으면 만족할 거야. 그러니까 허락해줘. 부탁할게.”

         

       며칠 전의 그였다면 당연히 거절했을 제안이었다.

         

       그러나 불과 며칠 사이 원더스타인이라는 자와 부딪히면서 주군은 놀라운 변화를 보였다. 그가 지난 몇 년간 노력해도 안 되던 일이었다.

         

       원더스타인이라는 자가 ‘호흡을 읽을 수 없는 자’라서 그런 것일까?

         

       타고난 능력 덕분에 세상을 다 산 것처럼 굴던 주군이 또 어떤 성장을 보여줄지 모른다. 그 기대감에 펠레빈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새우냥 님, 10코인 후원! 꾸준히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 바뀐 표지의 주인공은 루미입니다! novel ai로 뽑아본 것입니다! 퀄리티를 높이는 방법을 배워서 몇 장 뽑아봤는데, 공지에 추가해두었습니다!

    다음 화가 에피소드 마지막 화이자 19금 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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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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