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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44

     지브롤터가 습격당했다.

     크림슨 지브롤터가 모든 지브롤터 영지민들에게 명령했다.

     후퇴하라.

     피난을 가라.

     

     심지어 자신의 자식들까지 피난을 보냈으니, 영지민들은 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금방 깨닫게 되었다.

     소문이 무성했다.

     

     그레이 지브롤터가 아스타시아 황녀와 함께 다급히 지브롤터로 오고 있다더라.

     크림슨 지브롤터가 황제와 맞서 싸웠으나, 관문이 뚫리고 패색이 짙다더라.

     세이레네와 롤랜드, 협곡이 아닌 남북으로 수 만에 이르는 제국군이 들어와서 노스트럼을 학살하고 있다더라.

     “역시, 황제는 오래 전부터 전쟁을 하려고 했던 것이야.”

     “지브롤터와 편하게 지내고자 하는 척 하면서, 실상은 노스트럼을 모두 없애려고 전부 계획하고 있었던 거지.”

     지브롤터 사람들은 순진하게도 평화를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브롤터에 들어온 제국의 자원이 얼마나 많은데, 여태까지 보내줬던 모든 물적, 인적 자원이 전쟁을 위한 투자였단 말인가.”

     전쟁을 준비한다고 하기에는 지브롤터에, 노스트럼에 보내준 자본이나 자원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그 행동이 실제로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심지어 황녀까지 지브롤터에 보내놓고.”

     “그레이 도련님이 황녀님께 푹 빠진 걸 이용한 게 아닐까? 인질로 써먹되, 인질을 죽이지 못하게끔 말이야.”

     제국의 유일한 황녀까지 적국에 보내었다.

     황녀가 그레이 지브롤터와 긴밀한 관계가 아니었다면, 분명 당장 처형당하거나 유린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황녀님께서 도련님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다행이지.”

     “그러면 뭐야. 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는 노스트럼을 몰살하겠다 그런 건가?”

     “미친 황제로군.”

     지브롤터의 영지민들은 황제를 비난했다.

     지브롤터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이들일수록, 그들은 황제의 비정한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에휴. 왕이라는 작자들은 전부 자식새끼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한 명은 딸을 정적이랍시고 죽이려고 하지 않나, 다른 한 명은 딸을 전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나.”

     “크림슨 후작님과 비교를 하면…쯧. 말을 말아야지.”

     영지민들 입장에서는 영주가 곧 군왕과도 같은 위치에 있기에, 그들은 노스트럼의 왕과 테르시안의 황제를 비슷한 선상에 놓고 이야기를 했다.

     “가만히 놔두기에는 지브롤터가 너무 강해져버린 게 아닐까. 한 명은 반역자라고 숙청하려고 들고, 한 명은 전쟁이랍시고 없애려고 들고.”

     “크림슨 경이 진짜로 지브롤터 왕국을 만들까 두려웠던 거지.”

     사실 그 차이를 알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지브롤터를 이끄는 자는 크림슨이었고, 수 년 전부터 공공연하게 돌아다니던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가만히 놔뒀다가는 지브롤터에게 모든 권력을 빼앗길까봐 그러는 게 아닐까.”

     “권력이 뭔지. 우리같은 놈들이야 잘 모르는 거지만, 평화롭게 가만히 지내던 사람들에게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영지민들은 피난길에 오르면서 챙겼던 제국산 빵을 뜯으며 한탄했다.

     “분명 큰 일은 없을 거야. 지브롤터 경이 아니신가.”

     “협곡이 무너지더라도?”

     “협곡이 뚫리고 설령 크림슨 경이 패퇴한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는 다른 이들이 있지 않은가.”

     밀짚모자를 쓴 농민은 담담히 빵을 곱씹으며 말했다.

     “그 장남인 그레이 경이 있지.”

     “…….”

     “자네들도 알지 않은가. 그레이 경이 지금까지 지브롤터를 위해 해온 일을. 그레이 경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10년 동안 논과 밭을 갈기만 하다가 피난길에 올랐을 거야.”

     “그래.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늦게 도망쳤을 거고,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영지민들은 한 쪽에 멈춰있는 수레로 눈을 돌렸다.

     비록 부품들이 대부분 제국에서 들여온 것이었으나, 그 제국의 것 덕분에 영지민들은 어느덧 지브롤터령 바르셀로나까지 올 수 있었다.

     “황금이 보여주는 그 꿈속에서, 그레이 경이 어떻게 했던가. 지브롤터 이외의 모든 영지가 점령당했어도 기어이 지브롤터를 지켜내셨던 분이야.”

     “그래. 꿈이 보여주는 세상과 비교하면, 지금은 오히려 낫지. 적어도 모두가 몰살당하지는 않고 있지 않은가.”

     뿌ㅡ우.

     호각이 울린다.

     휴식을 끝낸 뒤, 슬슬 다시 이동하자는 신호였다.

     “어서 움직이도록 하세.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그래. 어떤 일이 일어나든, 영주님을 믿고 그에 따르는 것.”

     

     10년.

     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지브롤터는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제국신문에 그런 말이 있더군.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

     “반만 가려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 사람아.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해야겠어? 노스트럼스럽게 행동하지 말자는 거 아닌가.”

     “난 또. 그냥 지브롤터답게 행동하자고 말하면 되는 것을.”

     그건 비단 지브롤터가 영지로서 발전을 이룩한 것 뿐만 아니라, 지브롤터 영지민들의 정신적 성숙 또한 포함되는 것.

     “가도록 하세. 피난하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그분들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우리가 괜히 그분들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하면 돼.”

     “그래. 그리고 만일….”

     깡깡깡깡.

     갑자기 울리기 시작하는 경종 소리.

     영지민들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느덧, 해는 지고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한 시각.

     지평선 너머에서 무언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다.

     “……후.”

     영지민들은 하나둘 시선을 마주한 뒤.

     “여인과 아이들은 어서 수레로! 어르신들을 모시고 최대한 빨리 달려!”

     “무기 꺼내! 여기는 우리가 막겠다!”

     약속이라도 한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다가오는 적을 대비했다.

     구구구구.

     멀리서 다가오는 마도자동선.

     바퀴가 하나 빠진 채 바닥을 긁으며 달려오는 속도는 비록 마차보다는 느렸지만, 그 거대한 배에 타고 있는 이들의 눈은 어둠속에서도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제국의 흡혈귀…!”

     흡혈귀 부대.

     그들이 노스트럼을 향해-

     서걱.

     

     무언가 빛이 반짝인 순간, 배가 갈라졌다.

     “무, 무슨 일이…?”

     “저, 저 검은색은…?!”

     배의 앞.

     “지브롤터의 영지민들은 들으라ㅡㅡ!!”

     평원을 뒤흔드는 포효와 함께, 흑발의 청년이 악을 쓰듯 외쳤다.

     “오로솔로 가는 길을 병사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계속 이동하라! 어서!”

     “누, 누아르 도련님…?”

     “당장! 우선 먼저, 오로솔로 가!”

     “……예!”

     방패도 아닌 것들을 들고 머뭇거리던 이들은 즉시 왕도로 향했다.

     “누아르 도련님!”

     “젠장, 빨리 가야하는데…!”

     누아르의 근처에 다가온 젊은 청년 기사들은 수평으로 갈라진 마도자동선에서 하나둘 뛰어내리는 제국군 병사들을 향해 창을 겨눴고, 누아르는 지브롤터 방향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부디, 모두 무사하기를…!”

     * * *

     타들어간다.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집 전체가 활활 타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후ㅡ우.”

     회색의 짙은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폐부 깊은 곳까지 흘러들어오는 회색 연기는 내 속으로 들어와 전신으로 퍼진다.

     “아직, 소식은 전해지지 않은 건가.”

     세상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바깥은 온통 짙은 어둠 뿐이고, 저택에는 어떤 빛 한 점 없다.

     그나마 있다고 한다면, 꺼져버린 불씨가 간신히 남아 명멸하는 잿불 뿐.

     “그렇겠지. 제국처럼 실시간으로 통신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니.”

     

     아무리 제국 문화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지브롤터는 제국처럼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파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지브롤터의 상황이 노스트럼 전역에 퍼졌다면, 노스트럼 사람들은 충격을 받아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을 테니까.

     그리고 계속 전쟁 중인 제국군이 좌절한 이들부터 쉽게 사냥하고 다니겠지.

     

     당연한 일이다.

     마음이 꺾인 자는 다시 일어나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만, 그 일어나는 시간동안 제국의 흡혈귀는 미간에 피묻은 머스킷을 쏴대니까.

     전황은 불리하-지 않다.

     제국이 노스트럼 전역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한다고 한들, 제국은 왕국의 충성병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작자들인지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다.

     때로는 도망치는 아낙네들마저도 나뭇가지를 들고 적과 싸우는 자들이 노스트럼이다.

     악착같은 이들이 무너지지 않게 잡아주는 건 영웅에 대한 믿음이며, 아버지는 그런 영웅이었다.

     “언제부터 퍼질까.”

     왕국의 영웅이 팔이 잘렸다는 소식이.

     황제가 후작과 싸워, 그 팔을 잘라냈다는 소식이.

     과연 그 소식이 노스트럼 전체에 퍼졌을 때, 노스트럼은 무너지지 않고 마음을 다잡고 일어날 수 있을까.

     애초에.

     ‘괜찮을까.’

     

     아버지도 그렇고, 동생들도 그렇고.

     동생들은 아버지가 팔이 잘렸다는 것에 충격을 받을 것이며, 어머니가 실종되었다는 것에 한 번 더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미 충격을 받았다.

     

     진실은 아직 그 누구도 모르지만, 정황증거라는 걸 그대로 믿어버린다면 아버지는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황제는 시간을 줬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몸을 회복하려고 할 것이다.

     그건 어쩌면 마음의 부채감을 털어내기 위한 행동일 것이며,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샤를로트 후작 부인을 향한 애도기간 비슷한 거겠지.

     “하.”

     깊게, 숨을 들이킨다.

     “헛짓거리.”

     타들어가는 연기에 남아있는 마나가 전신을 가득 채운다.

     ‘괴물조차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욕심인 것을.’

     황제는 모른다.

     지브롤터 협곡을 뚫었다는 소식이, 지브롤터의 영웅을 황제가 직접 쓰러뜨렸다는 소식이 제국군에게 전파되었을 때의 여파를.

     알고는 있겠지.

     하지만 이론으로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전쟁의 광기는 인간을 잠식해버리고 만다.

     황제가 증오하고 경멸하는, 통제 불가능한 인간의 광기.

     황제 스스로 전쟁을 일으켰기에 달게 그 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광기의 반향을 받는 건 우리 쪽이다.

     구구구구.

     감지에 수십 명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48.”

     훨씬 더 예민해진 감각을 통해, 나는 불에 타버린 후작성을 향해 뛰어오는 이들의 발소리만으로도 그 숫자를 파악할 수 있었다.

     “…….”

     심지어 그들이 어느 정도의 마나를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로 강한지.

     “몰려오는군.”

     저벅, 저벅.

     물건 하나를 챙겨, 밖으로 나선다.

     

     후작성의 정원.

     “그대들은 폭도인가, 아니면 제국의 병사인가. 일단 카사블랑카에서 온 부대인 건 확실하군. 세이레네 해협을 넘어왔나?”

     지브롤터 후작성을 점거하기 위해 나타난 흡혈귀들이 나를 보며 흠칫 놀란다.

     “황제의 전언은 듣지 못한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척하고 지브롤터를 점령하기 위해 온 건가.”

     “그, 그레이 지브롤터…?”

     “들었어도, 못 들은척 했겠지. 하긴, 휴전협정을 한 것도 아니고, 지브롤터 성을 점령한 걸 황제에게 바치고 싶어서 발정났을테니.”

     황제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제국군은 정말이지, 어디까지 지브롤터를 모욕할 것인지.”

     

     지브롤터가 더 이상 적수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제국군 병사들이 어디까지 폭주할 수 있는지.

     “저택에 불을 질러, 조상들의 유해를 불태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저택까지 완전히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더냐.”

     “무, 무슨…?”

     “아. 몰라도 돼.”

     나는 입에 물고 있던 타들어가는 물건을 내던진 다음, 아버지의 서재에서 가져온 물건-머스킷을 들었다.

     “그렇게 알려질 거고, 범인은 너희들이 될 테니까.”

     타ㅡ앙.

     “그런데 좀, 타이밍이 안 좋네.”

     머스킷에서 날아가는 마탄이 정확하게 흡혈귀 병사의 미간을 꿰뚫었다.

     “내가 좀, 쏴죽이고 싶은 기분이거든.”

     철컥.

     “죽어라. 어떻게 죽었는지는, 내가 결정할테니.”

     타ㅡ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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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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