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46

     지브롤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이곳에 있었던 어머니를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지브롤터에 남아있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멘테 경이 찾아오고, 누아르가 찾아오며, 그들을 따라온 지브롤터의 기사들이나 바르셀로나의 행정관들이 찾아오기도 하며.

     “아스타시아, 당신까지.”

     

     내게 마도바이크를 내어줬던 아스타시아까지.

     “어떻게 온 겁니까? 설마 달려온 건….”

     “날아서 왔어요.”

     아스타시아가 하늘을 가리켰다.

     어두운 밤하늘이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을 선회하는 비룡은 상당히 익숙했다.

     “저 녀석이….”

     니드호그.

     내가 따로 부르지도 않았는데, 아무래도 아스타시아의 호출에 응한 모양.

     “죽지 않고 살아있었나보군요.”

     “…농담이기는 하지만, 죽었기를 바라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지금은 뭐든지 살아있으면 반가운 심정입니다. 한 명 빼고.”

     무능왕.

     “혹시 죽었으면 하는 이들도 있나요?”

     “차라리 죽음으로 이 불명확한 기대감과 불안감을 없앨 수만 있다면, 죽은 걸 직접 눈으로 확인했으면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누구…?”

     “엘프들.”

     현재, 지브롤터에 있어 가장 불명확한 변수.

     “엘프들이 증발했습니다.”

     “……그건.”

     “아스타시아가 모르는 건 당연합니다. 그들은 지브롤터와 협력하기로 했지만, 항상 실시간으로 지브롤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백금경 에이페리아와 엘프의 숲 엘프들이 전부 종적을 감췄다.

     “예상은 갑니다. 에르윈 황후가 인질로 잡혀있으니, 황제는 협곡 문을 두드리기 전 엘프의 숲에 사절을 보냈겠죠.”

     “전쟁에 협조하지 않으면 에르윈 황후…제 어머니를 죽이겠다.”

     “최악의 경우입니다. 아마도 황제가 요구한 건 ‘중립’이거나, 혹은 ‘개입하지 않는 것’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엘프들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모두 사라졌다.

     “적인지 중립인지는 불명확하지만, 하나는 확실합니다. 엘프는 아군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에르윈 황후가 내게 비행선을 빌려준 게 엘프들이 마지막으로 베푼 도움이라고 한다면, 사실상 이제 엘프들로부터 도움을 바라는 건 요행을 바라는 일.

     “그리고 그건 블러드 엘프…흡혈귀 또한 마찬가지.”

     “바토리 소장을 말하는 거군요.”

     “지브롤터 영지민들을 후방으로 피신시키는 것까지가 그녀가 지브롤터를 위해 해준 마지막 배려라고 한다면,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지브롤터역에 정차되어 있던 마도자동선에 시한폭탄을 설치한 것도 전부 그녀의 짓일까.

     아니면 우리 쪽에 붙기로 한 것 때문에 황제가 미리 첩자를 보내서 제거한 뒤인 걸까.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지브롤터의 기사들과 아스타시아 밖에 없는 것 같네요.”

     “그레이….”

     “아스타시아.”

     나는 아스타시아를 향해 다가간 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누아르에게도 그런 말을 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무너지면 안 됩니다. 반드시 살아가야만 해요.”

     “…살아갈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살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회귀 전의 아스타시아가 처형당하면서도 내게 바랐던 것처럼.

     “설령 제가 어떻게 된다고 하더라도, 당신만큼은 계속 살아서 지켜봐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도대체 뭘 보고 살아가라고 하는 거죠?”

     “잊어도 됩니다.”

     “그레이.”

     내 말에 아스타시아가 내 얼굴을 붙잡은 뒤.

     짜ㅡ악!

     “……?!”

     두 손으로, 내 뺨을 샌드위치처럼 때리며 들었다.

     “미쳤어요?!”

     “아스타시아, 저는 지금 진지하게-”

     “곧 죽을 사람처럼 말을 해도, 해도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지!”

     “…….”

     아스타시아가 나를 향해 잡아먹을듯이 으르렁거린다.

     심지어 약간의 살기마저 감돌고 있어, 그 살기로부터 느껴지는 긴장감에 나는 흐트러졌던 정신이 단숨에 맑아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오직, 아스타시아에게만 온 정신이 쏠리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만일 당신이 죽는다고 한다면, 저는 평생을 홀로 살다가 늙어 죽을 거예요. 만일 당신이 없는 세상을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다면, 꿈 속에서 당신을 찾다가 영원한 안식에 들 거예요.”

     “아스타시아.”

     “당신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나요?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게?”

     “…….”

     아니다.

     아스타시아가 죽은 뒤로도, 나는 오직 아스타시아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저는 강한 사람이에요. 검보다도, 이게 더 강하다고요.”

     아스타시아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굳건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그런 걱정을 토해내고 미래를 우려하는 걸로 편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제게 쏟아내세요. 당신이 원하는 만큼, 당신의 방법대로.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 저를 다른 이에게 보내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어요.”

     “…….”

     “괜찮다면 계속 말하세요. 안 그러면 이대로 영원히 말하지 못하게 막아버릴 테니까.”

     “그건…꽤 설렐 것 같은데.”

     나는 아스타시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황제, 죽이고 싶습니다.”

     “이해해요.”

     “어머니가 살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한 말이에요.”

     “당신의 어머니 또한, 구해내고 싶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아버지가….”

     순간적으로, 나는 잠시 울컥했다.

     “…어머니를 잃었다는 생각에 무너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회귀 전의 그가 그러했듯이.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여 어머니를 마음 속에서 죽였지만, 지금의 아버지는 매국노 크림슨과는 다른 존재다.

     “아버지가….”

     나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눈 앞에서 아스타시아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고 절망하고 좌절하여 모든 걸 포기했던 것처럼, 아버지도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 괜찮을 거예요.”

     아스타시아가 내 등을 토닥인다.

    “누아르도 있고, 레타르도 있고, 동생들도 있어요. 카르멘 왕비도 있어요. 특히 그녀는 자신이 쓰러졌을 때 아버님께서 도와주셨던 걸 기억하고 있는 만큼, 성심을 다해 아버님을 옆에서 도와주실 거예요.”

     “…예. 그럴 겁니다.”

     로버트 경에게 아버지를 맡겼다.

     그리고 아버지는 카르멘 왕비가 있는 곳에서 보호를 받을 것이다.

     그 누구도 모르게.

     적어도 제국이 정보를 뿌려버리기 전까지.

     “아스타시아.”

     “네.”

     “이 싸움이 끝나고 나면, 모든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전에 그런 약속을 했던 것 같은데, 그런 말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거 아녜요?”

     “저는 그런 일 없습니다.”

     곧 죽을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느니, 나는 그런 미신같은 걸 믿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오직 해피엔딩만이 있을 겁니다. 반드시.”

     “네. 저도…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로 그레이를 응원할게요. 만일….”

     아스타시아가 침을 꿀꺽 삼키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당신이 제 몸에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떠난다고 해도, 저는 받아들일게요.”

     “아스타시아, 그건….”

     “원래 전쟁 중에도 사랑이 싹트는 법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그, 이런 식으로 위로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으니까….”

     “아뇨.”

     나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약속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약속…?”

     “황제를 죽이고, 당신과 …스를 하겠습니다.”

     “……저기, 그레이?”

     아스타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지, 지금 뭐라고….”

     “제 처음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아니, 당신의 처음을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아, 아니…! 그렇게 말 안 해도 저도 처음이고, 당신 처음인 거 아는…그게 아니라! 처, 처음에 뭐라고 한 거예요?!”

     “점잖은 황녀님께 들려드리기에는 좋지 못한 표현이었던 것 같군요. 좋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해피엔딩에 어울리는 말로 말씀 드리죠.”

     나는 아스타시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뒤, 그의 왼손에 입을 맞췄다.

     “이 싸움이 끝나면, 결혼하고 아이를 만드는 겁니다.”

     “…….”

     “부디, 약속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이미, 약속이 예정되어있는 걸요.”

     아스타시아가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은 아무도 없는 남쪽 바다에서. 잊지 않았겠죠?”

     “물론입니다, 나의 공주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공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신 덕분에, 결코 죽지 않고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겠네요. 후후.”

     “왜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뭐 그런 건 당연한 거니까 넘어가고.”

     나는 아스타시아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번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으니, 무조건 이겨서 돌아온 다음 사랑을 나눠야 하니까요.”

     “…변태인가요?”

     “성인이죠.”

     새삼스럽지만, 아스타시아도 나도 20살이다.

     “아스타시아. 우리, 서로의 생일에 무엇을 주기로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나의 생일, 3월 31일.

     아스타시아의 생일, 4월 5일.

     “…서로의, 처음.”

     “예.”

     나는 아스타시아의 허리에 손을 올렸고, 아스타시아는 내 목 뒤로 팔을 걸며 까치발을 들었다.

     “죽지마요. 나의 왕자님.”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나의 공주님.”

     약속이었다.

     * * *

     그 시각.

     “…….”

     합스베르크 황제는 검은색 로브를 두른 누군가를 앞에 두고 있었다.

     “이걸로, 거래는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나지막하게 깔리는 목소리.

     마법을 통해 음성을 바꾼 것처럼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지만, 로브의 신장은 합스베르크 황제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작았다.

     “……거래라.”

     합스베르크 황제는 품 안에 애지중지하듯 움켜쥔 넓은 유리병을 만지작거렸다.

     그곳에는 붉은 액체가 손가락 세 마디 정도의 높이로 찰랑거리고 있었다.

     “수용하지. 그렇게 하겠다.”

     “…….”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어차피 서로 얼굴 오래 보고 싶지도 않을텐데.”

     파ㅡ앗.

     로브는 사라졌다.

     

     합스베르크 황제는 로브의 존재가 바닥에 남기고 떠난, 사람 한 명이 두 팔을 벌리고 들어야 할 정도의 넓은 ‘황금의 원판’을 훑었다.

     “이게….”

     합스베르크 황제는 황금의 원판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자신의 품에 안고 있던 유리병 뚜껑을 열고는, 안에 보관된 붉은 피를 가볍게 흘렸다.

     사아아아.

     금색의 빛이 찬란하게 빛나며 합스베르크 황제를 뒤덮은 순간, 합스베르크 황제의 앞에는 찬란한 황금의 신전이 빛나고 있었다.

     “이곳인가.”

     황금의 신전.

     그 가운데, 거대한 황금의 드래곤이 금색의 기둥을 휘감고 있었다.

     “드디어 만났도다, 모든 뒤틀림의 근원. 황금룡 크로노스트럼.”

     합스베르크 황제가 팔을 앞으로 뻗는다.

     칭칭 휘감은 붕대 사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으나, 황제는 황금의 드래곤을 올려다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회귀.”

     합스베르크 황제는 어딘가 기대감 어린 얼굴로 검을 들었다.

     “……탐나는군.”

     합스베르크 황제가 천장을 올려다본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그 누구도 답하지 않는 황금 신전에서, 황제는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수천 수만 아들딸들을 내버린다고 하더라도, 단 한 명의 아들을 나의 아들로 만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벅, 저벅.

     “대답해다오. 황금룡이여.”

     피 묻은 손으로 황제가 황금룡의 몸에 손을 올린 순간.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나?”

     구구구.

     황금의 드래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사실상 최종 챕터네요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화 보기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