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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46

   한참을 굳어 있던 아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린 것은 그의 어깨 위에 돌덩어리와 같은 손이 올려 졌을 때였다.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그 두터운 감촉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 아서는 자기보다 머리 몇 개는 클 듯한 베네딕의 정색 어린 눈빛에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안녕하십니까. 3왕자 저하. 여기에는 어쩐 일이신지요.”

   “아. 저. 그것이. 알른 가문의 영애께 귀한 것을 받았는지라 그에 대한 감사를 표하러 왔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당신의 눈이.”

   “바~보 아버님! 얼마 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 안 나세요?!”

   “그. 아니다! 루시!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바보아버님의 눈에는 제가 맹인처럼 보이시나 봐요?”

   

   무릎을 꿇었음에도 올려다봐야 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들들 볶는 딸과 방금 전의 위세는 어디로 간 건지 자그마한 딸의 앞에서 어깨를 쭈그린 채 변명을 늘어놓는 아버지의 모습에 아서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하던 여러 생각들이 바보 같이 느껴져서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진정 저것이 루시 알른인가 생각을 했다만.

   

   “바보 아버님은 뻐끔뻐끔하는 금붕어가 되어버린 걸까요? 왜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이야기를 벌써 잊어버리시는 거죠?”

   “…미안하구나.”

   “미안하다는 소리는 낮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요? 제 기억이 이상한 걸까요? 바보 아버님의 딸이라 저도 바보가 되어버린 걸까요?”

   

   그녀가 맞군. 베네딕을 저런 식으로 대할 수 있는 건 그녀밖에 없을 테니.

   

   그렇게 한참이 지나 베네딕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을 즈음 한숨을 내뱉은 루시가 다음부터는 잘 하라는 말과 함께 손을 위로 쭉 뻗어 베네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딸의 손길에 울면서 웃은 베네딕은 슬며시 딸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정말 고맙구나. 루시. 저어. 다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만.”

   “뭐죠? 말씀해보세요.”

   “이 차림새 그대로 단상에 올라갈 거니? 너무 눈에 띄는 거 아닐까?”

   “바보 아버님은 정말 바보바보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제가 왜 저 변태사도를 데려왔겠어요.”

   “…변태사도?”

   “오랜만입니다. 베네딕 경.”

   

   자신의 얼굴에 범벅이 된 코피를 닦아내며 해맑게 웃는 프레테의 모습에 베네딕의 얼굴이 다시 한 번 험악하게 변한다.

   

   방금 전 아서 때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이번에는 루시가 베네딕을 만류하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예술 교단의 사도시여.”

   “…예?”

   “우리 한 번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 봐야 할 듯 하군요.”

   “베네딕 경. 알른 가문에서 대화라는 것은 주먹을 치켜 들고 하는 것입니까?”

   “딸을 지닌 아비의 대화는 이렇습니다.”

   “과연. 이해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해명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목숨만 붙여 주십시오.”

   

   *

   

   “이 역겨운 곳에 다신 안 올 생각이었는데.”

   “…2왕비님. 주변에 사람이 많습니다.”

   “나도 알아. 그래서 일부러 소리를 막고 이야기한 거잖아.”

   

   종강 파티장에 발을 들인 세나르 솔라딘은 저 멀리서 반가움을 표시하는 자기 세력의 귀족에서 웃으며 인사함과 동시에 입으로는 가시가 잔뜩 돋힌 험악한 소리를 냈다.

   

   “젠장. 저 미친 년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1왕비. 카바디 솔라딘에게 향하는 세나르의 감정은 부드러운 눈과는 달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아주 어리던 시절부터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걸림돌이 되었던 이를 어떻게 좋아하겠는가.

   

   “조금만 참으시죠. 하루 저녁의 일일 뿐이지 않습니까.”

   “나도 알아. 그냥 투정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이러고 있을 뿐이지.”

   

   그녀가 왕국의 두 번째 왕비가 되고, 여러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짠 것도 벌써 몇 년째다.

   

   그 동안 사교 활동을 신물이 날 정도로 해온 세나르는 공사를 구분하지 못할 바보는 아니었다.

   

   다만 아카데미에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이 나쁠 뿐. 그래도 마냥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세실 저 애가 조금 사람이 되어서 다행이지.”

   

   여태까지 바라는 대로 무언가를 해낸 적이 없던 그녀의 아들이 처음으로 왕자다운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지난 번 루시 알른에게 패배하고 난 후로 무언가를 느낀 건지 점차 바뀌기 시작한 세실은 지금에 이르러 그 어느 때보다도 성숙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세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고위 귀족 가의 영감님들조차 그를 보며 눈빛을 달리할 정도로.

   

   “덕분에 영감님들의 비위를 맞추는 대신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세실과 그 주변에서 시선을 뗀 세나르는 천천히 회장 안을 둘러 봤다.

   

   “루시 알른이 없는 동안 그 주변인들을 슬며시 회유해 봐야지.”

   

   그녀의 시선에 처음으로 닿은 것은 수많은 영애 사이에서 의례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파트란 가문의 영애였다.

   

   파트란이라는 거대한 뒷배와 아무리 기가 강한 사람이라도 숨을 죽이게 되는 날카로운 외모.

   

   몸에 배겨 있는 귀족의 의례.

   

   거기에 파트란의 피가 굳건함을 보이는 듯한 마법적 재능까지 지닌 그녀는 등장과 동시에 여러 귀족 영애들의 한 축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주변에 몰려있는 영애들을 보면 알 수 있듯 파트란 영애가 지닌 이름의 힘은 이전보다도 강해진 상태였다.

   

   소울 아카데미에서 이루어 낸 그녀의 업적이, 아카데미에 재학하며 한 층 더 조각 같아진 그녀의 외모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말을 걸러 가기 어렵겠네. 내가 끼어들면 속이 훤히 보일 테니까.

   

   파티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겠어.

   

   그나저나 저 아이가 입은 옷 엄청나게 예쁘네.

   

   대체 저런 건 어디에서 구한 거지?

   

   내가 아는 장인들도 저런 옷은 만들어내지 못 할 텐데.

   

   이것도 나중에 물어보자.

   

   시선을 거둔 세나르의 다음 목표는 주신 교회의 성녀였다.

   

   오래 전부터 주신의 뜻에 따라 조금의 쉼도 없이 세상에 선을 행해 온 그녀는 교회의 사람들이 따로 찾아온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이 전하는 것은 하나 같이 감사의 단어였다.

   

   과거 영지를 구원해 준 것에 대한 감사.

   

   누군가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

   

   억울하게 죽은 이의 원을 풀어준 것에 대한 감사.

   

   그 후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감사의 향연은 주신 교회의 선함은 의심할 수 있을 지언정 성녀 개인의 선함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는 누군가의 평을 떠올리게 했다.

   

   저 쪽도 지금은 못 다가가겠네. 세실 주변에 있는 영감님들보다 더한 지뢰뿐이잖아.

   

   …어라? 오늘 따라 성녀님치고 좀 화려한 걸 입고 오셨네.

   

   파트란 영애의 것과 비슷해 보이는 걸 보면 친구의 선물인 건가.

   

   저것도 진짜 예쁘다.

   

   대체 어떤 장인이 만든 거지? 점점 궁금증이 더해지네.

   

   일단 이 궁금증은 나중으로 미루고.

   

   어디 보자. 지금 느긋한 건 저 쪽인가.

   

   켄트 가문의 영애. 검술 명가에서 태어나 동세대 모두를 짓누르며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뽐낸 아이.

   

   훗날 왕국의 영광이 되리라 여겨졌으며 지금도 루시 알른에게 밀려났을 뿐 여전히 압도적인 검 실력을 지닌 괴물.

   

   그리고 주변 눈치를 조금도 보지 않는 귀족보단 짐승에 가까운 사람.

   

   구석에서 마구잡이로 음식을 입에 넣는 켄트 영애의 모습에 세나르는 그 쪽을 슬며시 외면했다.

   

   이전의 기억을 돌이켜 보았을 때 저기에 다가가 봐야 열불만 날게 훤했던 것이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아서 걔뿐인데.

   

   어디에 있지? 파티가 시작되기 직전인데 왜 어디에도 안 보이는 거야.

   

   요즘 점점 활약상이 많아져서 그 녀석한테 눈독 들이는 사람이 늘어나 있는 판에.

   

   일단 우리 쪽 귀족들이랑 이야기나 나누고 있어야 하나 세나르가 생각하던 그 때에 회장의 불이 꺼졌다.

   

   이제 시작인가.

   

   드디어 루시 알른의 모습을 볼 수 있겠네.

   

   예술 교단의 사도가 찬양할 정도로 아름다워졌다는 그 얼굴을 어디 한 번 구경해보도록 할까.

   

   반발심리에 어떤 식으로건 트집을 잡을 생각으로 무대를 살피던 세나르였지만 그녀의 생각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여태까지 세나르는 왕국의 2왕비로써 수많은 미를 마주하면서도 아름답다는 표현으로 모든 감탄을 대신했다.

   

   기껏 해봐야 앞에 너무라던가 대단히 같은 부사를 덧붙일 뿐 아름답다 이상의 표현이 존재하는 지에 대해 고민한 일은 없었지.

   

   과거의 세나르는 이러한 자신을 효율적인 사람이라며 칭찬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단어를 잊어버린 그녀는 과거의 게을렀던 자신을 원망했다.

   

   눈앞의 풍경을 무어라고 묘사해야 하는가.

   

   눈에 담는 것만으로 머리가 새하얘지는 이 광경을 어찌 설명해야 하는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저 아름다움을 어찌 말로 풀어내야 하는가.

   

   구구절절 설명을 해야 할까?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추잡하게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면 시인처럼 비유법을 써야 하는 건가?

   

   빛난다고?

   

   별보다 밝다고?

   

   불이 꺼져버린 회장에 인간의 형상을 한 따스한 태양이 내려온 것 같다고?

   

   주신께서 대지에 내린 천사처럼 보인다고?

   

   모르겠어.

   

   등장만으로 회장을 적막하게 만든 저것을.

   

   자그마한 발이 움직이는 소리에도 귀 기울이게 만드는 저것을.

   

   손짓 발짓 하나하나에도 집중을 하게 만드는 저것을.

   

   눈빛이 스치고 간 자리마다 가슴을 부여잡게 만드는 저것을.

   

   얄미운 미소마저도 매력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저것을.

   

   나는 뭐라고 묘사해야 하는 걸까.

   

   아. 그렇구나.

   

   난 착각을 하고 있던 거였어.

   

   아름답다는 단어는 모든 감탄을 대신했던 게 아니야.

   

   아름답다는 단어밖에 모르기에 내가 보았던 수많은 것들을 아름다움의 영역으로 끌어내렸을 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아름답다는 단어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하고서 아름답다는 말이 얼마나 바보 같은 단어인지를 알게 된 거고.

   

   스스로가 미워지네.

   

   아름답다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게 내 눈 앞에 있는데.

   

   더 많고 더 풍부한 단어로 묘사해야 하는 아름다움이 저기에 서 있는데.

   

   나는 언제나처럼 아름답다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어야 한다니.

   

   “아아.”

   

   날개를 숨긴 천사가 연단의 한 가운데에 서서 목소리를 냈음에도 멈추어버린 파티회장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천사 같은 아이가 모습을 드러내며 만들어낸 적막은 그녀가 모습을 감출 때까지 이어질 것처럼 굳건했다.

   

   “푸흫. 안녕하세요. 허접 여러분들. 변태 같은 시선으로 절 훑어보는 게 너~무 징그럽네요. 거울만 보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보니 꿈만 같으신가요? 저런. 어떡해요? 다음부터 거울보기 무서워지겠다~”

   “…뭐?”

   “…저게 무슨.”

   “…내 귀가 이상한가?”

   

   그리고 그 굳건한 적막을 깨부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적막을 만들어낸 여자아이 본인이었다.

   

   묘사할 말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과 도저히 귀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교양 없는 말 사이에서 수많은 이들이 당혹을 느끼던 그 때에.

   

   그 혼란의 중심이 된 루시 알른은 키득거리면서 회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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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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