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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48

     [출발 전, 지브롤터 캐롤라인성 서재.]

     구 백작성이 아닌 캐롤라인 성의 서재에는 여러 장치들이 있다.

     전시 상황에서 구 백작성의 아버지 서재가 곧 상황실과도 같았다면, 캐롤라인 성의 서재는 정치적인 목적이 깃들어있는 장소였다.

     [아, 아아. 들리나요, 그레이? 아, 아아.]

     “들립니다, 여왕 전하.”

     지브롤터와 모르가니아 사이에서의 신속한 정보교환을 위해 설치해둔 양방향 직통형 수정구.

     음성만 전해진다는 게 단점이며 중간에 결계가 펼쳐지면 대화하기 곤란하다는 게 문제기도 하지만, 우리는 캐롤라인 성에 있는 통신을 복구하는데 성공했다.

     원래라면 뭐, 아버지와 카르멘 왕비가 둘이서 통신을 나누고자 했던 은밀한 회선이라고 해야 하나.

     그 여러 가지 회선 중 하나가 캐롤라인 성의 아버지 서재에 연결되어있었다는 게 그렇기는 하지만, 어찌됐든 신속하게 정보를 교환할 수 있기만 하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불륜도 아니었고, 설령 불륜이라고 해도 뭐.

     “그쪽은 괜찮습니까?”

     [그레이, 그게….]

     “어디에서부터 괜찮냐고 묻는 건지 애매하게 말씀을 드린 것 같군요. 묻는 사람 중에 안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나는 자꾸만 대답을 얼버무리려는 나리아에게 우리 가족 전체의 이름을 하나씩 나열했다.

     […….]

     “안 죽었다면 괜찮은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나에게 있어 지금 ‘안 괜찮다’라는 건 죽었거나, 혹은 어머니와 같은 실종상태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레이. 아버님은….]

     “아버지께서는 정신을 차리셨습니까?”

     [……어머니가 옆에 붙어계셔요. 깨어나기는 하셨지만, 눈에 생기를 잃은 채 천장만 바라보고 계시죠.]

     “그렇겠죠.”

     아버지는 많은 걸 잃었다.

     팔을, 어머니를, 자존심을, 지브롤터를.

     사실 그런 걸 다 떠나서 어머니를 잃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아버지는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령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고 해도, 아버지에게 다시 일어나서 제국과 싸우라고 말하는 건 끔찍한 강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괜히 여기에서 버티고 있는 줄 아십니까. 여왕 전하께서는 후방에 정보만 퍼뜨리면 됩니다. 아직, 지브롤터는 무너지지 않았다.”

     […지브롤터에, 그레이 경이 있다.]

     “마음껏 이용하십시오. 노스트럼을 지키는 수호자든, 아니면 제국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분개하는 매국노든, 그도 아니면 아버지가 패배하고 어머니가 살해당한 것에 분노한 복수귀 아들이든.”

     […….]

     “정치란 게 그런 겁니다, 여왕 전하. 당장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그 앞에 ‘대의명분’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구국의 결단이 되는 셈이지요.”

     전쟁 중이다.

     이런 상황인 만큼, 우리에게 유리한 정보를 각 영지에 주입하는 게 중요하다.

     “부모의 패배나 죽음조차 이용하여 이득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정치. 냉정하고 잔인하지만, 동시에 효율적이죠.”

     파발이 말을 타고 달려도 하루면 빨리 도착하는 편이고, 심지어 중간중간 제국 흡혈귀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

     “여왕께서는 노스트럼을 안정화시키고, 백성들이 동요해서 행여나 자결이라도 하지 않게 진정시키십시오. 아직 이 땅에 희망이 남아있음을 알리십시오.”

     그 희망이 수호자든 매국노든, 적어도 ‘그레이는 모든 노스트럼 사람들이 몰살당하는 걸 바라지 않기에 검을 들고 지키려고 한다’라고 착각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정말 괜찮은 건가요?]

     “괜찮냐는 말은 몇 번이고 들어도 괜찮습니다만, 이제는 더 안 들어도 될 것 같은데 말이죠.”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나리아 여왕 전하께서 가장 잘 하시는 것.”

     […….저는.]

     나리아의 목소리가 우울해진다.

     [그저, 무력하게 이곳에서 지시를 내리는 것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여왕이지만….]

     “나리아 개인이 가장 잘 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제가…?]

     “기억해주십시오.”

     […….]

     나리아가 숨을 멈춘다.

     “지브롤터를 위하여,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러 가는 이들을 기억해주십시오.”

     [경.]

     “참으로 이기적인 말이지요. 어쩌면 십수 만,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제서야 천여명 정도 되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달라고 말하고 있으니.”

     지브롤터 최전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여왕 전하의 기억에 남길 것입니다. 지브롤터를 지키는 최전선의 수호자라는 명목으로.”

     기사, 용기병, 고아 출신 병사들, 흡혈귀 사냥꾼, 그림자 등을 합쳐 전부 약 1천여명.

     […아뇨.]

     나리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모두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그들의 성을. 그들이 지브롤터를,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노스트럼을 지키기 위하여 제국의 앞에 섰음을.]

     숫자는 분명 적다. 

     하지만 한 명의 인간이 그 이름을 전부 기억한다고 하는 건 무리가 있다.

     상식적으로는.

     [마지막 한 명까지 제가 기억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나리아는 가능하다.

     이 세상 누구와 견주어도 비교할 수 없는 나리아의 재능은 다름아닌 기억하는 것.

     “그거면 됩니다. 왜냐하면…나중에 보상을 해주셔야 하니까.”

     [예?]

     “논공행상을 하려면 당연히 기록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기, 그런 거 일일이 기록할 시간 없어요.”

     나는 수정구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아아. 혹시 끊기면 이야기 해주십시오. 지금 들고 연병장으로 이동 중이니까.”

     [그, 그레이 경. 그게….]

     “모두들, 들으라ㅡㅡ!”

     나는 연병장에 모인 이들을 향해 수정구를 들었다.

     “나리아 여왕 전하께서 그대들을 기억하신다고 하신다!”

     연병장에 모인 기사들이 자세를 잡는다.

     “시간 없으니까, 한 사람당 10초! 이름, 나이, 고향, 그리고 유언! 딱 10초씩만 말하고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 끝낼 때 이상이라고 외치도록! 이상!”

     [그, 그레이 경!]

     “로버트 경부터, 시작ㅡㅡ!”

     “로, 로버트 세빌리야ㅡㅡㅡ! 나이는….”

     긴장해서 그런지 몰라도, 마드리드 영지는 어디에 바꿔먹은 건지 그 성을 세빌리야라고 외친다.

     “유언은, 없습니다! 안 죽을 거니까요! 이상!”

     […….]

     “다음!”

     

     로버트 경의 선언 이후.

     “카를로스! 나이 37세! 지브롤터 출신! 어, 음, 지브롤터 지키러 갑니다!”

     “멘테 리프트. 나이는…. 하아, 유언은 유언장에. 이상!”

     한 명, 한 명.

     어제, 미리 준비해둔 말들을 하나둘 내지르기 시작한다.

     

     그 시간은 분명 길 것이다.

     한 명당 10초라고 해도, 한 인간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자신의 마지막을 10초라는 짧은 순간에 담기에는 부족하지만 그게 천 명 가까운 이들이 연달아 말하면 그건 길다.

     단순 계산으로만 따져도 족히 세 시간 가까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몇 시간이 걸리든, 수정구를 들고 선다.

     와락.

     내 옆으로 다가온 아스타시아가 내가 든 수정구를 아래에서 받쳐든다.

     아스타시아가 입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지만,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가로젓는 걸로 말을 대신했다.

     약, 2시간.

     연병장에 모인 모든 이들이 유언을 남기고 난 뒤.

     “그레이 지브롤터. 20세. 지브롤터.”

     마지막.

     “유언이 있다면.”

     나.

     “이 전쟁이 끝나면, 아스타시아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 것이다. 이상.”

     […예.]

     나리아 여왕이 말한다.

     [이기적인 명령일 수 있겠지만, 꼭 살아주세요.]

     명령한다.

     [살아서, 그 때는 얼굴보고 다시 이야기해요. 모두. …이상.]

     생존을.

     뚝.

     수정구의 마력이 끊어진다.

     “라고, 여왕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걸 아스타시아에게 건넸다.

     “하지만 여왕께서는 한 가지 착각하고 계시지.”

     나는 협곡 방향을 가리켰다.

     “모두가 지브롤터를 수호자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적의 공격을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여왕 전하의 명령은 생존이었다. 노스트럼에 남고자 하는 자, 살아라. 설령 싸우는 중에 살기 위해 떠난다고 해도, 나는 용서할 것이다. 그는 노스트럼 여왕의 명을 따르는 자이니까.”

     기사들 모두가 피식 웃는다.

     “하지만 그대들이 나와 함께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한다면, 지브롤터의 명령을 따르라.”

     기사들 전부, 표정을 굳히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살아라.”

     여왕의 명령과 같다.

     “그대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하지만 그 결은 다르다.

     “투항해도 좋다. 도망쳐도 좋다. 배신해도 좋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을 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인 자들이 아니다.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라의 위기에서 시선을 돌리고 나라를 팔아먹는 선택도 할 수 있는 평범한 이들이지.”

     어떤 이들은, 우리를 두고 매국노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그래서 나는 제국을 향해, 황제를 향해 검을 들기로 했다. 그가 내 가족을 죽이려고 하니, 내 가족이 죽기 전에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아스타시아와 마주섰다.

     “출정 전에 제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부인?”

     “최악의 프로포즈네요.”

     아스타시아는 쓰게 웃으며, 내 턱을 잡아당겼다.

     “이딴 프로포즈 한 번으로 끝내는 남자는 죽어마땅하다고 누가 그러던데.”

     입술에 스친 따스한 열기.

     “죽을 거라면 제 손으로 죽일 거니까, 절대 죽지 말고 무조건 살아서 돌아와요.”

     “약속을.”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맹세의 입맞춤을 나눴다.

     * * *

     정오.

     “아주 죽으려고 환장을 하셨습니다.”

     “칭찬 고맙군. 로, 로버트 경.”

     “갑자기 저를 부르셔서 당황한 겁니다! 멘테 경이 제일 먼저 하기로 했잖습니까!”

     “연장자 우대 같은 소리를 하면 지금 당장 그대부터 죽여버릴 거야.”

     “끄응…!”

     로버트 경과 멘테 경이 낮게 웃는 사이, 카를로스 경이 최종 정비를 마치고 합류했다.

     “보고드립니다. 아스타시아 아가씨는….”

     “제대로 간 거 맞나?”

     “…예. 누아르 도련님이 계신 바르셀로나로 가셨습니다. 적어도 제가 고개를 돌려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는.”

     “다행이군.”

     

     아스타시아는 누아르가 지키고 있는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지브롤터에 있는 것보다는 누아르가 있는 곳에 있는 게 누아르에게도 아스타시아에게도 서로서로 안전했다.

     “바르셀로나는 곡창지대이자, 금광지대야.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될 곳이지.”

     “그런 곳에….”

     “누아르라면 지켜낼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믿고 앞으로 나서는 거지.”

     바르셀로나, 왕도 톨레도, 모르가니아.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세 곳을 지키는 이들은 믿을 수 있다.

     믿기 싫어도 믿어야 한다.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한다면, 후방을 신경 쓸 여력 따위는 없으니까.

     “됐고, 슬슬 출발하도록 할까. 협곡으로.”

     “그.”

     “변경백.”

     나를 향해 어떻게 부를지 고민하는 것 같은 세 사람을 위해, 나는 이 순간만큼은 호칭을 특정하기로 했다.

     “우리 모두가 변경백이며 지브롤터의 기사라고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그게 지금 내게는 제일 어울릴 것 같거든.”

     내 일생에서 가장 의미있었던 순간의 호칭.

     아스타시아와 사랑했던 시기에 불렸던 직위.

     “알겠습니다, 변경백 각하. 그런데….”

     로버트 경이 침을 꿀꺽 삼킨다.

     “황제가 저희에게 준 시간, 일주일 아니었습니까?”

     “일주일이었지.”

     “그런데….”

     “아까 말했잖나. 나는 자네를 기다렸다고.”

     “……?”

     로버트 경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자네가 이틀 전에 도착했으면 이틀 전에 움직였을 거야.”

     “…….”

     “핵심 전략을 위해서는 자네가 꼭 필요했거든.”

     “그….”

     로버트 경이 핼쓱해진 표정으로 침을 삼키며 묻는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자네만 못들어서 그래. 우리의 핵심 전략.”

     “…맞추라는 건 아니시겠죠? 지금?”

     “맞추면 졸업해도 좋네.”

     “힌트라도 주시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소드 마스터야.”

     “……변경백 각하.”

     로버트 경이 비장한 각오로 검을 든다.

     “어떻게 해서든 제가 황제를-”

     “0점.”

     “예?”

     “자네가 아니야.”

     “그러면…멘테 경입니까?”

     “-100점.”

     “……그러면, 도대체?”

     “다른 거 없고, 이것 하나만 명심하게.”

     현장 상황에 따른 전술 및 실시간 지시는 기본적으로 내가 하지만.

     “자네의 역할은 ‘카디안’이야.”

     “……예?”

     “자네가 아니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카디안 경이 되는 거야. 나 빼고.”

     “……!”

     로버트 경이 입을 떡 벌리며 나를 놀랐다.

     힌트가 너무 박해서 그렇지, 만일 약간만 침착했어도 그는 500점을 받아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협곡을 가리켰다.

     “일주일 줬다고 일주일에 딱 맞게 싸우러 가는 머저리가 어디 있나.”

     “…….”

     “그건 너무 정정당당한 노스트럼 스타일이야.”

     황제가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시간은 일주일.

     “우리는 지브롤터고, 지금의 변경백은 그레이 지브롤터지.”

     그리고 우리는 전쟁 중이며.

     “전쟁에 정정당당이 어디 있나.”

     “…….”

     “예의범절? 그딴 거, 이기고 난 뒤에 역사학자들 묶어놓고 입맛대로 새로 쓰면 돼.”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황제가 있으면 내가 발을 묶는다.”

     나는 모두를 향해 선언했다.

     “황제는 내가 맡을테니, 그대들은 가서 전부 죽여버려.”

     

     협곡의 앞.

     불타버린 리프트 영지의 위, 제국군 병사들이 진지를 펼쳐둔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황제에게로 가는 길에 무엇이 있든, 우리는 나아간다.

     “황제 모가지 따러.”

     “우오오오오ㅡㅡㅡㅡㅡ!!”

     로버트 경이 선봉에 서며, 지브롤터의 기사들이 일제히 제국군의 머스킷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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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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