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48

       클라이스는 폐허 한가운데에 있었다.

       

       무너진 천장에서는 검은빛이 일렁였다. 사기(邪氣)가 도는 토양에서는 썩은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건물 중 성한 것이 없었다. 하나같이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채였다.

       

       산맥은 잿빛으로 물들었으며, 강에는 피와 살점이 뒤엉켜 흐르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클라이스는 서 있었다.

       

       ‘이건….’

       

       마치 핵폭탄에 파묻힌 수도 같지 않은가.

       

       잿가루와 불똥이 바람 가는 대로 휘날린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클라이스는 몽롱한 정신인 채로 구불거리는 가도를 따라 걸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가도의 끝에는, 어느 소녀가 서 있었다.

       

       – 클라이스.

       

       먹을 풀어놓은 듯한 머리카락에, 타오르는 듯한 금빛 눈동자.

       

       – 네가 죽였어.

       

       음이 공기를 타고 진동한다.

       

       – 네가 처음부터 잘 대해 주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죄악을 부르짖는 듯한 단어가 총알처럼 날아와 비수처럼 박힌다. 클라이스는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뛰었다.

       

       아주 요란하게.

       

       금방이라도 멎을 것처럼.

       

       – 클라이스.

       

       소녀는 천천히 다가왔다.

       

       이윽고 그림자가 드리웠다. 연기처럼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소녀는 고개를 숙였다.

       

       – 모든 게 네 과업이다.

       

       뚝, 뚝, 뚝, 하고.

       

       소녀의 눈가에서 피눈물이 맺혔다. 클라이스의 눈동자처럼 붉은 핏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뚝, 뚝, 뚝.

       

       그렇게 몇 방울씩 떨어지더니, 이윽고 클라이스의 시야가 빨갛게 물들었다.

       

       – 클라이스. 클라이스. 클라이스.

       

       쿵, 쿵, 쿵, 쿵, 쿵.

       

       쿠웅─!!

       

       “허억…!”

       

       클라이스는 상반신을 거세게 일으켰다.

       

       “……!”

       

       흐릿했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보이는 것은 자신의 방. 논문이 찍힌 종이와 마전지가 잔뜩 놓인 침대 위였다.

       

       “…꿈, 인가요.”

       

       클라이스는 반쯤 안도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테르가 죽은 이후, 가끔가다 이런 꿈을 꾼다.

       

       자신이 처음부터 잘 대해 주었더라면, 그녀가 죽는 일은 없었겠지. 정령의 피해도 최소화됐을 것이다.

       

       그런 것에 대한 상실감과 아쉬움이, 이렇게 악몽으로 구현되고는 한다.

       

       클라이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나간 시간은 되감을 수 없다.

       

       지나간 사람도 붙잡을 수 없다.

       

       에테르는 죽었다.

       

       클라이스는 그 사실을 상기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후우….”

       

       손으로 몸을 더듬으니 얼굴이고, 목이고, 가슴이고 흥건하게 젖은 채였다. 침대 시트도 갈아야 할 정도로 눅었다.

       

       ‘물.’

       

       몸이 수분을 요구하고 있었다. 클라이스는 이마에 묻은 땀을 털어내며 자리끼를 들이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물이 담긴 유리잔에 금빛이 세 개나 비친다.

       

       하나는 위에서 쏟아지는 달빛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두 개는 출처를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클라이스.”

       

       클라이스는 고장 난 목각인형처럼 고개를 돌렸다.

       

       “아….”

       

       그곳에는, 꿈에서 보았던 소녀의 얼굴이.

       

       가까이에.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클라이스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에 에테르도 겁을 집어먹고는 폴짝 튀어올랐다.

       

       “귀, 귀신…!”

       “귀신 아니야 이 사람아!”

       

       에테르는 가슴팍을 툭툭 치며 불을 켰다.

       

       딸깍! 어두웠던 방이 조금은 환해진다.

       

       클라이스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린애처럼 벌벌 떨다가, 이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작고 어려진 에테르였다.

       

       “주, 주인님…?”

       “주인님도 아니야 이 사람아….”

       

       클라이스는 눈을 끔뻑거리며 에테르를 위아래로 훑었다.

       

       “에테르?”

       

       그래, 에테르다.

       

       그런데 어려졌다.

       

       짧고, 조그맣고, 귀여운 것으로도 모자라 하찮아 보이기까지 한다.

       

       “귀신이, 아닌 건가요…?”

       “그래요.”

       “이게 도대체….”

       

       에테르는 진작 죽었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흑주와 함께 사망한 것으로 처리됐다. 무덤이랑 비석까지 만들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는 건 불가능… 아니, 학술적으로 얘기해서 ‘아주 어렵다’라는 것쯤은 클라이스도 잘 안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마법을 웬만큼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클라이스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 앞으로 여인 한 명이 쿡쿡거리며 나타났다.

       

       “메리?”

       

       메리가 헤를라인. 클라이스는 ‘메리’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그녀의 베스트 프렌드였다.

       

       헤를라인 교수는 빵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웃어대던지. 클라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설명을 종용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미안, 미안. 반응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래. 설명해 줄 테니까 화내지 마.”

       

       헤를라인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에테르가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고,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정령이 되었다고요?”

       “그래. 친구들은 만난 뒤 나를 찾아왔지 뭐야? 곧 너도 찾아갈 거라고 하길래, 장난 좀 쳐 보라고 얘기했지.”

       

       깔깔거리는 헤를라인을 보며 에테르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건 클라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유치해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친다는 장난이 고작 침실에 들어와서 놀래키기라니.

       

       사실 누구나가 놀랄 것이다. 불길한 꿈을 꿨는데, 그 꿈에서 나왔던 고인이 현실에 나타난 것이었으니까.

       

       하필이면 오늘 악몽을 꾼 것도 한몫했다. 클라이스는 아직도 심장이 맥동하는 것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좋잖아? 이 귀여운 제자랑 다시 만날 수 있어서.”

       

       헤를라인은 실실 웃으며 에테르의 볼을 잡아당겼다. 탄력성 좋은 피부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한다. 에테르가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항변했지만, 헤를라인은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클라이스는 눈치를 채고 말았다.

       

       헤를라인의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다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친밀감을 표현하려면 안아주는 것이 좋다고 했다.

       

       클라이스는 삶에서 가족 외 누군가와 포옹을 나눈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 헤를라인이 자주 허그를 하는 걸 보고 영감을 얻었다.

       

       차가운 성격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가벼운 스킨십은 필요하다.

       

       그런 생각을 한 클라이스는 큰맘 먹고 에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아… 진짜.”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클라이스는 깜짝 놀라며 즉시 머리에서 손을 뗐다.

       

       “미, 미안해요. 기분 나빴나요?”

       “신경 쓸 거 없어, 클라이스. 지금 아니면 언제 어린애를 이렇게 안고 있겠어?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 그런가요?”

       “아아아아아악!!”

       

       클라이스는 곧바로 딥 허그에 머리 문질문질을 시전했다.

       

       으아아악!

       

       그렇게 에테르는 30분에 걸쳐 두피마사지를 받아야만 했다.

       

       

       **

       

       

       지옥의 헤드 테라피에서 겨우 벗어났다. 이제 할 말을 전할 수 있어.

       

       “그래서 저희에게 부탁할 게 있다고요?”

       “그래요.”

       

       몇 시간 전, 아카샤가 내게 부탁한 게 있었다.

       

       – 여기 교수가 진짜 더럽게 없거든? 특히 전계마도 교수. 학생은 꽤 모였는데 가르칠 사람이 죽어도 없어.

       

       아카샤도 교수를 하고 있는 몸이었다. 그것도 혼자서 모든 금안족 학생을 관리한다.

       

       죽을 맛이라고 아카샤는 덧붙였다.

       

       아니,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그리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 뭐긴 뭐야. 테르도 나 따라서 교수하라고.

       

       흐음.

       

       이론상 불가능하지는 않다. 어린 정령이라도 계약자에게 마력을 충전받으면 며칠은 현계를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이건 로즈마리도 허락했다.

       

       – 언니가 가르친 학생들이 나중에 이 나라를 지탱하겠죠. 현명한 선택이에요. 암, 그렇고말고요!

       

       일국의 공주답게 정치적인 계산이 들어있긴 했지만, 뭐.

       

       “그런데 교수라니.”

       

       갑자기, 이런 몸으로?

       

       뭔가 입장이 애매해서 거절하려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쁜 제안도 아닌 것 같았다.

       

       나 가르치는 거 좋아해. 연구하는 것도 좋아하고.

       

       사실 포닥 이후의 내 꿈은 교수였다.

       

       정년보장 받고 대학원생을 잔뜩 수집하는 게 버킷리스트였지, 아마. 심지어 그 버킷리스트는 중학교 때 썼었다.

       

       지구 나이로만 치면 그때부터 벌써 15년 가까이 됐나?

       

       “와, 인생목표가 여기서 이뤄지네.”

       

       역시 아렌스 대륙으로 돌아오길 잘했다.

       

       한국에서 교수하려면 0.3대 저출산의 파도가 만들어낸 대입정원 축소를 이겨내고 임용에 골인해야 했으니까!

       

       “흐음.”

       

       하지만 이러고도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이런 몸으로는 현계에 정치적인 간섭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저희더러 정체를 숨겨 달라는 의미죠?”

       “맞아요.”

       

       하스펠트와 헤를라인의 보조가 있다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문제없어요. 총장님과 이사장님께는 잘 이야기해 둘게요.”

       “부탁드릴게요.”

       

       두 사람은 생각보다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어쩌면 인력이 부족한 아카데미에서 어영부영 넘겼을지도.

       

       그렇게 나는 학력을 위조한 채 임용됐다.

       

       “맞다, 대학원생! 들여도 돼요?”

       “어머머, 교수 명함 달았다고 벌써 이러는 것 봐.”

       

       정령의 몸인지라 대학원생을 들이기는 어렵다고 한다. 정령은 사익을 추구하면 안 된다나 뭐라나.

       

       아쉽군. 아쉬워.

       

       그래도 일단 강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어디 보자.”

       

       나는 급히 개설한 강의를 최종 점검했다.

       

       [전계마도총론]

       

       전계마도를 강의하기 때문에 수강 대상은 대부분 금안족이다. 이중에는 레니냐도 있다고 한다.

       

       레니냐에게는 내 부활을 귀띰해 놓았다. 아무렴. 들어갈 때 서로 모른척 하기로 했다. 내 정체가 들키면 곤란해.

       

       좋아. 이 부분은 문제없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목차를 살폈다.

       

       [1장 : 벡터대수 및 미분적분학]

       [2장 : 전기장과 전기 퍼텐셜]

       [3장 : 자기장과 자기 퍼텐셜]

       [4장 : 물질 속의 전자기장]

       

       이 밑으로도 챕터가 주르륵 나와 있다.

       

       다만, 당장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들에게 가르칠 건 4장까지가 전부겠지. 전자기파나 상대론은 2학기에 가르쳐야겠군.

       

       그나저나.

       

       [전계마도총론]

       

       과목명이 마음에 안 드는데.

       

       고쳐야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_513님, 1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