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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

        

         문을 열자 다른 사람이 있는 게 어색한 호텔 방 안이 드러났다.

         

         “…….”

         

         인간 문명이 꽃피워낸 휘황찬란한 지상의 불빛, 망가진 자연과는 달리 되려 맑아진 천공의 별빛. 환상적인 야경을 배경으로 두었음에도, 내 눈에는 헬레나가 가장 빛나 보였다.

         

         그저 외모만의 얘기가 아니다.

         그윽한 심성도, 사려 깊은 태도도, 나는… 이제 얻기 힘들어진 강함도. 편하게 다리를 꼰 채로 턱을 괴고 있는 것뿐인 데도 자신의 존재감으로 방을 가득 채운 것만 같았다.

         

         결심을 마쳤다고 여겼는데 막상 그 모습을 보니… 자신감이 조금 없어졌다.

         정작 나에겐 함부로 꺼낼 수 있는 대답도, 정보도 없었으니까.

         

         “……꿀꺽.”

         

         복잡한 심정을 담아 마른 침을 한번 삼킨 뒤, 침대 모서리에 앉아서 조용히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그녀의 곁에 다가가서 앉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꼬인 실타래를 풀어나가야 할까….

         고민이 길지 않았는데도 헬레나는 또 막힘없이 치고 들어왔다.

         

         “……말도 참 안 듣네. 농담으로 넘겨준대도?”

         

         “아니…… 그… 미안.”

         

         이… 이정도면 그래도 남자다운 사과가 아닐까…?

         지은 죄가 아직까지는 딱히 없는데도 불만 섞인 그녀의 말투에 저절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미녀의 분노에 약한 것도 남자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시종일관 창문 쪽을 보고 있던 그녀의 몸이 이쪽으로 돌려졌다.

         

         “…좋아. 아예 그럼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해볼까…? 우선은 진짜 이름부터.”

         “…아나스타샤 발렌타인. 다른 성도 있긴 한데… 깊은 생각은 없어. …엮인 문제도 많고.”

         

         형식은 일문일답. 사실상 취조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불쾌함 보다는 당혹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사라락….

         

         “나랑은 언제 만났었어?”

         “직접 만난 건 호텔……이 아니라, 그 브라이트사이드 대로에서 만난 게 처음이야.”

         

         ……왜냐고? 한없이 진지한 질문을 하는 주제에 손은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었으니까…?

         

         사락… 사락….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손 가는 대로 흩트려 놓더니 다시 삐친 머리를 넘겨서 정리해준다.

         미용실에서나 받을 법한 서비스에 호감 한 스푼까지. 그렇게 부드러운 촉감과 따스함에 깜빡 넘어가기 직전, 무시무시한 질문이 파고들었다.

         

         “하인리히 할아범한테 계획적으로 접근한 건 아니지?”

         “!! 절대…! 그건 절대로 아니야! 내 모든 걸 걸고 맹세할 수 있어.”

         

         …하마터면 방심을 유도한 책략에 넘어갈 뻔했다.

         만약 내가 정말 계획범이었다면 함정수사에 감쪽같이 걸렸을 것이다.

         

         역시… 같은 편일때는 든든해도, 헬레나 발렌타인은 여러가지 의미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재확인했다.

         

         “흐응…. 거짓말은 없어도 숨기는 건 있는 게 분명한데… 말할 생각은 없어보이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

         

         안도에 찬 숨을 다 내쉬기도 전에 어깨가 뒤로 슬쩍 밀렸다.

         넘어간 상반신이 사뿐하게 침대위에 안착했다. 내가 뛰어들기만 해도 파묻히던 매트리스의 푹신함을 생각하면 가히 절묘한 힘조절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대체 마지막 질문이 뭐 길래 이런 압박면접 비슷한 흉내를 내는 걸까.

         

         “?!”

         

         헬레나의 얼굴이, 입술이 서서히 내려와 귓가에서 멈췄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조금씩 간질였다.

         …정말 바보 같은 궁금증이었다. 나를 도망치게 만들었던 불은 아직 꺼지지도 않았는데, 겨우 그녀의 믿어준다는 말 한마디에 마음을 놓다니.

         

         “…아샤는 왜 나를 그런 눈으로 계속 바라본거야…?”

         

         귀를 파고든 열기에 화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아니면 이미 고막이 타들어가고 있는데 내 멍청한 머리는 그걸 고통이 아니라 다른 달콤한 감각으로 착각하는 거던가.

         

         정열적인 헬레나의 시선이 명확하게 느껴졌다. ……만약, 아주 만약에 내가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고… 뜻밖의 도움에 감사하고… 네오 헤이븐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하루 종일 저런 눈초리로 그녀를 힐끔거렸다면. 과연 그건 어떤 신호를 전달했을까.

         

         옅은 홍조가 떠오른 그녀의 얼굴을 그대로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

         

         팡…!

         

         나를 가두고 있던 팔을 밀치고 재빨리 구석까지 물러났다.

         그 과정에서 발버둥질엔 이불이 둘둘 말리고 손은 미끄러지고 난리도 아니었으나 헬레나는 그 자리에서 태연하게. 그렇지만 잔열이 남은 표정으로 내 추태를 구경했다.

         

       

       

         

         

       

       

         그 모습은… 마치 내가 헬레나를 바람맞힌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고 죄책감이 샘솟았다.

         저절로 입이 열리고, 웬만하면 꺼낼 생각이 없던 말까지 튀어나와버렸다.

         

         “그… 그건 내 상황이랑 정신이 좀 복잡해서…!”

         

         “정신…? 혹시 남자의 성정체성을 가진 걸 말하는거야? 그게 뭐가 어때서?”

         

         “!! 아… 알고 있었어?!”

         

         나란 새끼가 도대체 얼마나 음흉한 시선을 향했길래 들켰나 싶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그야, 모처럼 생긴 여동생한테 언니라고 부르라 했더니 누나라고 하질 않나… 간단한 근력 강화시술만 받겠다던 애가 성전환 시술을 뚫어져라 보고 있지 않나….”

         

         “윽…!”

         

         골치 아프다는 것처럼 나열되는 어리숙한 행동의 역사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렇지만 그건 자꾸 이쪽을 자극하는 헬레나의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튼지 간에, 난 아샤가 바이젠더 같은 거라고 해도 신경 안 써. 딱히 혐오주의자도 아닐뿐더러….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런 걸 신경쓰기엔 너가 너무 매력적인 걸…?”

         

         “잠깐! 잠깐만!! 헬레나헬레나헬레나…!!”

         

         진즉에 눈치챈 사실을 밝혔음에도 내가 움직일 기미가 안보이자, 그녀는 다소곳하게 기다리던 자세를 풀고 양손과 무릎을 이용해 거리를 성큼성큼 좁혀왔다.

         

         이걸 어떻게 잘 설명해야 그녀가 이해해줄까…?

         난 하루 아침에 몸이 뒤바뀐 인간이라 정신만 문제가 아니라 육체도 문제라고? 이미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뒤섞인 아나스타샤의 자의식이 걱정된다고?

         

         아니, 그보다도 혼란을 틈타 굉장히 열정적인 표현을 은근슬쩍 해오지 않았나…?!

         

         일단 헬레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급한대로 떠오르는 모든 이유를 주워섬겼다.

         

         “가족…! 우리는 가족!!”

         “? 높은 곳에 사시는 일부는 우수한 유전자를 보전해야 한다면서 오히려 근친상간만 한다는데 뭐 어때.”

         

         “그… 아무래도 그 생산성이 없잖아?!”

         “…역시 아샤는 상식도, 사고방식도 꽤 낡은 것 같네. 에나마에서 제공하는 인공수정 서비스도 있는데?”

         

         이 미친 에나마 코퍼레이션 새끼들아…!! 왜 그렇게 연구에 열심인 건데!

         

         내가 마음속으로 절규를 내지르거나 말거나, 그녀는 한술 더 떠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니면 내가 성전환 시술을 받을까?”

         

         “?! 그건 절대 안 돼—!! 헬레나는 지금 그대로가 제일 좋아…!”

         

         “……풉.”

         

         뇌가 화끈해지는 충격과 함께 비명이 자동으로 사출되었다.

         그제서야 조금이나마 이해가 갔다. 이 세상의 성관념은… 내가 네오 헤이븐을 플레이하면서 이해했다고 여겼던 것보다도 몇 천 배는 더 ‘미래지향적’ 이었다.

         

         “…아.”

         

         “…….”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헬레나의 실루엣이 확대된다. 방 조명을 등지고 있어서 그런지 위압감이 더 넘친다.

         아, 안된다. 이건 더는 댈 핑계도 막을 방법도 없었다. 나는 체념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고….

         

         …쪽. 쪽.

         

         살포시 들춰진 이마에 한 번, 이불에 흩어진 머리카락에 한 번.

         가볍지만… 아찔하고도 감미로운 입맞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품고 있던 열기의 일부를 직접적으로 전달받았다는 걸 자각하니 손발이 찌릿찌릿해졌다.

         

         “나라고 뭐 억지로 할 생각은 없으니까… 대신 자매끼리 이정도는 괜찮지…?”

         

         “……. 헬레나….”

         

         “……마음을 정하기 전까지는 언니도 꼭 붙여. …잔뜩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멋대로 도망친 벌이야.”

         

         위쪽에 있던 베개를 끌어 다가 품에 안겨준 그녀도 이내 편하게 몸을 뉘었다.

         싱글베드 치고는 넓다고 생각했던 침대는, 한 켠에 헬레나가 누우니 적당한 온기와 무게감으로 가득해졌다.

         

         아직도 짜릿한 감촉이 남아있는 이마와 머리칼을 손으로 더듬어봤다.

         

         분명 입맞춤을 하는 부위에 따라서 뭔가 깊은 의미가 있었다고 들은 것 같다. …그리고 이마나 머리카락이 뺨보다는 훨씬 더 끈끈한 의미를 가진다는 어렴풋한 기억도 떠올랐고.

         

         “아샤도 얼른 자. 이 언니는 또 근무 나가야 해서 집에만 일찍 데려다 주고 나가봐야 하니까….”

         

         “…언니는 왜 전투경찰 일을 해?”

         

         “왜냐니… 급여 지급 확실하고, 수칙만 잘 지키면 범죄자가 될 걱정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너도 위험한 일 할 생각은 접고, 평범한… 엔지니어 직장 좀 알아봐.”

         

         “……응.”

         

         조용히 신발을 벗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녀를 만난 뒤로 계속 거슬리던 궁금증 하나를 해결했다. 지금의 헬레나 발렌타인에게는… 그녀를 네오 헤이븐의 늑대로 만들었던 독기와 불신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건… 딱 부러지게 정의하기 힘든 내 정신상태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녀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들었다.

         

         

         두근… 두근….

         

         “으…….”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방망이질하는 심장이 진정하기 전까지 편히 잠들기란 요원했다.

         보통 이런 경우엔 피해자는 발 뻗고 자고, 가해자가 밤을 새는 거라고 배웠는데… 정말 불공평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메인 히로인님의 사랑이 너무 무겁다.
    사이버펑크 세계의 인간성의 벽에 이은, 관념의 벽에 머리를 세게 박은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 묘사면 태그에 백합을 추가해야 할까요…? 못난 저는 아직도 태그 구분이 너무 어렵습니다…. 으….

    바이젠더 : 남성과 여성의 성별 정체성 또는 의식을 둘 다 가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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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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