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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

       잠시동안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던 대주교가 박장대소했다.

        ​

        “푸하하! 그걸 기어코 들킨 겁니까!”

        ​

        “끄응….”

        ​

        할 말이 없었다.

        ​

        아니, 사실 있었다.

        ​

        엄밀히 말하자면 내 계획이 들킨 게 아니었다. 마리아가 내 성향을 근거로 나라면 당연히 어떻게 움직일 거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

        문제는 마리아가 단순한 짐작을 넘어 확신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이미 시녀들을 시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자꾸 이상한 것들을 챙기는 것이 내가 답답해서 훈수를 두게 한다는 사소한 이슈가 있긴 했지만.

        ​

        “그래서, 어찌하시렵니까? 이대로 의뢰도 취소할까요?”

        ​

        대주교는 코웃음을 치며 나를 골리듯 물었다.

        ​

        굉장히 열이 받는 말투였지만, 내가 봐도 참 웃긴 꼬락서니였기에 한숨만 푹 쉴 따름이었다.

        ​

        “그건 그냥 진행해도 될 것 같아.”

        ​

        “예? 마리아 전하께 들켰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

        나는 이걸 말해도 될까 싶어 잠깐 고민했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일이었기에 그냥 털어놓았다.

        ​

        “마리아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랑 동행한다 그랬거든.”

        ​

        “하하, 참 애정 넘치시는-”

        ​

        대주교가 말을 멈추고 눈을 깜박거렸다.

        ​

        “잠깐, 동행한다는 것이 혹시…?”

        ​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대주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

        “난 안 하렵니다.”

        ​

        “이미 다 준비된 일을 이제 와서 안 할 순 없지.”

        ​

        “나보고 황녀 전하가 도성 탈출하는 일을 도우라는 겁니까?! 난 못 합니다!”

        ​

        그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는 귀를 틀어막고 아예 대화를 차단하려 했다.

        ​

        이러면 나도 치사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

        “크흠, 대주교님.”

        ​

        “아아아, 안 들립니다. 내가 술에 취해서 그런지 들리질 않는군요.”

        ​

        그에게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

        “마리아가 건네드린 돈이 얼마인지 세어보셨습니까?”

        ​

        멈칫.

        ​

        대주교가 움찔거렸다. 이래 봬도 오랜 시간 팔츠에서 로비스트로 활약해온 바오로 대주교였다. 그가 내 질문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

        “마리아가 말해주길, ‘아주’ 넉넉하게 챙겨드렸다고 하더군요.”

        ​

        “…설마.”

        ​

        프로 로비스트가, 의뢰의 ‘단가’가 어떻게 책정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반대로, 나름대로 황족으로서 자체적으로 정보망을 꾸려온 마리아가 ‘단가’ 계산을 어떻게 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

        그래.

        ​

        “이번에도 잘 부탁드린다고 하더군요.”

        ​

        마리아는 이미 값을 지불했다.

        ​

        대주교는, 그 돈을 이미 아이들 명의로 된 예금으로 털어버렸다.

        ​

        그리고 상인 길드는, 돈 지키는 일에서만큼은 철저해서 자신들의 뒷배인 성국 교황의 말이라 하더라도 중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이들이었다. 이미 국가 파산 위기에 상인이라는 이름의 저금통을 깨(주로 두개골이 마개 역할을 한다) 국고를 충당하려는 왕국에 공식 서한으로 쌍욕을 전달한 적 있는 이들이었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

        그리고 대주교의 성격상, 아이들이 파양 당할 때를 대비해 만든 예금이었으니 못해도 몇 년간은 절대 손대지 못하도록 묶어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

        요컨대, 체크메이트라는 말이었다.

        ​

        대주교는 술잔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

        “맙소사….”

        ​

        “으흠, 뭐, 그렇게 됐습니다.”

        ​

        솔직히 좀 양심에 찔리긴 했다.

        ​

        이렇게만 보면 마치 우리가 무슨 천인공노할 쓰레기처럼 보이는데, 이건 우리도 억울했다.

        ​

        아니, 그야 부담을 주려고 돈을 넉넉하게 준 건 맞는데, 그걸 냅다 이렇게 다 적금 형식으로 묶어버릴 줄은 나도 몰랐지.

        ​

        기껏해야 돈 들어오자마자 기쁘다 돈줄 오셨네를 외치며 술이나 좀 살 줄 알았지, 이럴 줄 알았겠냐고.

        ​

        “하아….”

        ​

        대주교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

        “어쩔 수 없군요. 이미 일이 이렇게 됐으니.”

        ​

        “…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

        여기서까지 반말을 하면 진짜 천하의 호로새끼가 되는 것 같아서 존댓말로 유감을 표명했다. 대주교는 됐다며 손짓했다.

        ​

        “그래서, 어떻게, 지금 바로 전해드리면 되겠습니까?”

        ​

        “지금 당장은 아니고, 대충 관료들 목이 달아나는(이번엔 비유적 의미가 맞다) 이번 풍랑이 잠잠해지고 난 뒤가 적당할 것 같은데.”

        ​

        “대충 일주일쯤 뒤면 될 것 같군요.”

        ​

        “그 정도면 적당하겠지.”

        ​

        너무 일정이 촉박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나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

        수도를 아직 다 돌아보지 못해 아쉬운 점이 있는 건 맞지만, 이번에 황후파의 팔다리를 날려버리며 깨달은 게 있었다.

        ​

        수도는 마경이다. 권력에 미친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복마전이나 다름없었다. 나야 이번에는 마리아라는 치트키가 함께하고 게임 매니저(황제라고도 불린다)가 은근히 뒤를 봐주었기에 날뛸 수 있었지만, 선제후 본인도 아니고 겨우 삼남이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날뛸 수는 없었다.

        ​

        그런데, 이 마경은 지체 높은 사람이 묵으면 일단 집어삼키고 자기 위장 중 하나에 넣어 소화시키려는 습성이 있는 것 같았다. 위장의 이름은 황후파, 태자파, 근황파라고 하던가.

        ​

        하여튼, 여기 오래 있으면 마리아와의 혼담 문제와는 별개로 정치적 사안으로 발목이 묶일 것이 뻔했다.

        ​

        그래서 바로 튀기로 했다.

        ​

        수도 구경이야, 오늘만 날인 게 아니니까. 아마 지금의 태자가 황제가 되고 난 직후면 이 풍랑도 좀 잠잠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

        “뭡니까?”

        ​

        “혹시 의뢰 내용이 뭔지 알 수 있을까 싶어서.”

        ​

        “아, 그러고 보니 그걸 말씀 안 드렸군요.”

        ​

        대주교는 종이를 한 장 꺼내 들었다.

        ​

        “사실, 따로 명분을 조작하거나 만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마침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가 모든 교구에 내려져 있었는데, 마침 딱 조건이 맞더군요.”

        ​

        그는 그 종이를 내게 건넸다.

        ​

        그 내용은, 내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

        ――

        ​

        빌헬름이 대주교를 만나고 있을 때, 마리아는 황제를 알현하고 있었다.

        ​

        “속은 좀 시원하더냐?”

        ​

        “…예.”

        ​

        황제의 질문에 마리아는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

        부녀관계라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애틋함이란 없었다.

        ​

        황제는 마리아를 황녀로서 대우하고, 마리아는 황제를 부황으로서 응대했지만, 그 안에 친족으로서의 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

        단지, 아비로서의 의무와 딸로서의 의무가 있을 뿐이었다.

        ​

        이번에 마리아가 빌헬름을 부마로 내정했을 때 황제가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그것도 이 선 안에서의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황제가 와병하거나 상을 당하면 슬퍼하겠지만, 이 선을 넘지는 않을 거고.

        ​

        두 사람의 이런 관계는, 마리아가 태어나고 전 황후가 죽으면서부터 이어진 관계였다.

        ​

        다른 이들에게는 따듯하진 않아도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황제가, 마리아에게만 유독 방치에 가까운 대우를 하는 건, 아마 그가 전 황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마리아는 추측했다. 그녀가 죽은 건, 마리아를 낳은 이후부터 앓던 산욕열 탓이었으니까.

        ​

        그나마 황실이 돈과 의약재, 마법을 퍼부어 그나마 몇 년을 버티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병을 치유하진 못했다.

        ​

        마리아 또한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그나마 황제와 마리아의 연이 이어지긴 했지만, 둘 사이를 잇는 당사자가 부재했기에 이보다 더 가까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아무튼, 일처리는 확실했구나. 보상은 나중에 따로 내려주도록 하마.”

        ​

        “과찬이십니다.”

        ​

        “다만, 한 가지 분쟁의 씨앗을 남겼더구나.”

        ​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리아를 책망했다.

        ​

        “왜 직접 사무에 개입한 것이더냐? 정녕 무력이 필요했다면 용병을 고용하거나 명문 군인 귀족 집안을 끌어들이는 것도 가능했을 터.”

        ​

        그러나 마리아가 직접 부마 후보 빌헬름을 밀어 넣은 탓에 의견이 분분하긴 해도 황실이 직접 귀족 간의 알력 다툼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지금이야 황후파에 대한 불만이 더 크니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지만, 만일 시간이 지나 황후파가 반격하는 때가 온다면 저들은 반드시 그걸 써먹을 것이다.

        ​

        황제는 그것에 대해 마리아에게 따져 물었다.

        ​

        그러나 마리아는 이미 답을 준비해두었다.

        ​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이런 경쟁에 황실이 직접 끼어들면 서로 누가 더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는지를 겨루는 전통이 무너지기 때문이겠지요?”

        ​

        “그렇다.”

        ​

        “그리고 이는 소녀 또한 피선거권이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일테지요.”

        ​

        “…그렇다.”

        ​

        어째 약간 찜찜한 질문이었지만, 말이야 옳은 말이었기에 황제는 일단 수긍했다.

        ​

        그리고 그것이 뇌관을 건드렸다.

        ​

        “그럼 제가 피선거권을 포기하면 되는 일 아니겠어요.”

        ​

        툭.

        ​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시종이 마리아가 터트린 폭탄에 정신이 혼미해져 손에 든 서류를 놓친 것이다.

        ​

        갑작스런 폭발에 직격당한 황제는 말할 것도 없었다.

        ​

        “…지금 뭐라 했느냐?”

        ​

        “제가 피선거권을 포기한다면, 경쟁의 당사자가 직접 나서 판의 규칙을 깨뜨렸다는 비판은 사라지지 않겠어요?”

        ​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옳은 말이라는 것이 꼭 합리적인 선택이란 것은 아니었다.

        ​

        특히나 황제의 자녀라고 한다면, 황제가 될 권리를 포기한다는 건 단순한 상속 문제를 정리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귀족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온갖 특혜가 증발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결국 귀족들이 차기 권력에 줄을 대는 건 그들이 정말 권력을 잡았을 때 떡고물을 받아먹기 위해서지, 그들이 황실을 너무너무 사랑한 나머지 충성을 다하기 위해 무상으로 공물을 바치는 게 아니었다.

        ​

        그걸 모를 정도로 마리아는 무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도피를 위해 수도 바깥으로 피난 갔을 때에도 일대의 경영을 능숙하게 수행했고, 지금도 황제가 무언가를 맡길 때마다 오차 없이 수행해내며 정치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능력을 보였다.

        ​

        “…괜찮겠더냐?”

        ​

        황제는, 마리아가 태어난 이후로 그녀에게 진심 어린 걱정을 건넨 적이 없었다. 언제나 의례적으로, 의무적으로 아버지 된 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황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한순간의 변덕이었을 뿐인 정부를 황후로 추대한 황제였다.

        ​

        그는 자신이 무엇을 누리고 있는지, 자신의 권력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걸 포기한다는 마리아의 말이 함의하고 있는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

        만약 마리아가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직접 가르쳐줄 생각도 있었다.

        ​

        그러나 마리아는, 명확하게 그걸 잘 이해하고 있었다.

        ​

        “괜찮아요.”

        ​

        지금 누리는 것, 매년 들어오는 선물, 자신에게 바쳐지는 온갖 귀물들, 거기에 그녀가 가는 곳마다 편의를 봐주는 사람들의 존재를 마리아는 모두 언급했다.

        ​

        “이 모든 걸 포기하더라도, 아니, 제 성이 더는 호프부르크가 아니게 되더라도 상관없어요.”

        ​

        황제는, 순간 마리아의 안광이 붉게 빛나는 것만 같은 환각을 보았다.

        ​

        “빌이 제 곁에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요.”

        ​

        그제야 황제는, 마리아가 빌헬름을 원하는 것이 권력이니 선제후니 하는 복잡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

        ――

        ​

        그날 저녁, 황제는 수도에서의 일정을 마친 빌헬름이 대주교의 의뢰를 받아 수도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

        급하게 마리아의 행방을 찾은 그는, 마리아가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수도에서 빠져나갔다는 소식만을 들을 수 있었다.

        ​

        그리고, 그녀가 누구의 피를 짙게 물려받았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

        저렇게 맹목적인 모습은, 젊을 적의 자신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으니까.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낭만 판타지를 꿈꿨는데 로맨스 판타지였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dreamed of a life filled with romance¹ and romanticism, but I didn’t dream of a romance fantasy… —- ¹ The “Romance” here means a feeling or atmosphere of something new, special and exciting, e.g., a hero’s ad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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