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5

       *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친 소리 하지 말고 집중해요!!”

         

         

         유진은 여전히 시퍼렇게 타오르는 눈으로 엘프들을 내려 찍고 있었다.

         

         칼 끝에 걸린 새하얀 빛무리가 검격 한 번에 팡팡 터져 나가는 꼴을 보아하니, 그의 ‘신’도 그의 기도에 퍽 만족한 모양.

         

         그러나 제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그들은 결국 학생이다. 학년에 비해 실력이 뛰어나다 해봐야 경험의 질 자체가 다르단 의미.

         

         

         “밀린다! 밀린다고요!!”

         “나도 알아요! 버텨!”

         

         

         오스왈드와 유리는 이를 악물며 연신 손을 휘둘렀다. 공격은 번번히 막히고, 단단한 방진을 이룬 채로 전진하는 군대는 뚫을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이들은 마족 전쟁 시절을 거쳐온 병력들이다.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지 고작 4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 제 아무리 나태하게 풀렸다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들은 현역 시절을 기억하는 군인들이다.

         

         즉,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21세기 빙의자들이 첫 상대로 맞이하기엔 과도하게 정예한 병력이란 의미였다.

         

         처음부터 사살이 목표였다면 진작 전투가 종료되었을 상황. 갑판장은 피식 웃으며 외쳤다.

         

         

         “학생들? 슬슬 이제 그만하고 무기 내려 놓지.”

         “이반 씨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아!!”

         

         

         유리의 눈물겨운 비명이 점점 더 날카로워질 때쯤, 갑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뭣…?!”

         “조타실! 조타실로 가봐! 무슨 일이냐! 당직병!”

         “함장님은?!”

         

         

         갑판 아래에서부터 용골이 드득, 드득 울리는 소리와 함께 선체가 폭발하듯 큰 충격이 갑판을 강타했다.

         

         병사들과 빙의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비틀거리거나 넘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뭐야, 이거?”

         “이반 씨가 한 짓인가…?”

         

         

         오스왈드는 바닥을 짚고 균형을 잡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엄청난 마력… 아니, 고도의 기교가 포함된 마력의 흐름이 눈에 보였다.

         

         암녹색 마력이 휘몰아치듯 선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쾅, 콰앙. 폭음이 점차 가까워진다. 

         

         

         “아니, 이반 씨는 아니야. 이건….”

         

         

         오스왈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곧, 갑판 한복판에 짙은 마력이 뭉쳤다.

         

         

         “피해!!”

         

        -콰아아아앙!!

         

         

         용맹 버프로 눈이 돌아간 유진을 집어 던지고, 유리는 오스왈드의 뒷목을 붙잡은 채 뒤로 뛰었다. 갑판 한가운데에 큼직한 균열이 생기며 무언가가 튕겨 나왔다.

         

         튕겨나온 물체는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려 반전시키고는 빙의자들의 곁에 착지했다. 자로 잰 것 같은 깔끔한 낙법이었다.

         

         

         “이반 씨!”

         “음.”

         

         

         이반의 몸에선 매캐한 탄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도끼를 쥔 채로 침착하게 정면을 바라봤다.

         

         

         “훌륭해! 평화가 박제된 세상에서 이 정도의 의념을 가다듬다니!”

         “베, 베올그린 경?!”

         

         

         선원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 반응에 이반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뭐지, 같은 엘프들도 속였다고?

         

         굳이, 왜? 칼리온 군도가 국가 차원에서 알렉산드르를 지지하고자 했으면 이런 쓸데없이 음습한 방법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어, 이반 씨. 혹시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좀….”

         

         

         오스왈드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공중에 떠 있는 베올그린을 바라봤다.

         

         엘프 출신으로서, 그는 베올그린을 몇 차례 만난 적 있었다. 어마어마한… 그야말로 압도적인 마법사다.

         

         그런 존재가 지금 그들의 머리 위에 떠서 공격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금 모자랐나.”

         “거의 성공했지.”

         

         

         베올그린은 웃음기 섞인 얼굴로 이반을 내려봤다. 그는 한쪽 팔을 잃은 상태였다. 오거스트 경에겐 미안하게 됐군.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나타난 건 의외였지만, 뭐… 내가 엘리자베타 공주를 생각 이상으로 자극했던 모양이군. 이것보단 더 우호적인 상황에서 몰래 다녀갈 생각이었는데.”

         

         

         하나 남은 손을 들어 올리자 암녹색 마력이 짙게 휘몰아쳤다. 이반은 도끼를 던질 준비를 하며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빙의자 중 하나만이라도 베올그린의 시선을 끌 수 있다면 승기를 점쳐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전장도, 그리고 상황도 좋지 않았다.

         

         

         “나중에 또 볼 일이 있을 걸세.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군.”

         “베올그린.”

         “자네는 알렉산드르 왕세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그걸’ 알면서도 자네의 임금에게 충성하고 있는 건가?”

         “…뭐?”

         

         

         베올그린은 손을 휘저었다. 강대한 마력이 손아귀 모양으로 뭉치며 갑판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마차를 들어 올렸다.

         

         마차 안에선 소란이, 그리고 비명이 들려왔다. 곧, 덜컥. 하는 소란과 함께 문이 열렸다.

         

         

         “나오게나.”

         “이, 이게 다 무슨 소란인지…! 우, 우린 밀약을 위해…!”

         “쉿, 쉬잇. 조용.”

         

         

         베올그린은 하나 남은 팔을 휘둘렀다. 마차 밖으로 고개를 뺐던 중년 사내가 마력에 이끌려 공중에 떠올랐다.

         

         

         “역시 본인이 오진 않았나. 자네는 이름이 뭐지?”

         “니, 니콜라이 슬라파노보 류리크…! 나, 나는 이 나라의 외무성 전권을 위임 받고 왔네!! 나, 나를 해칠 수는 없네!”

         “오, 본인이 누굴 상대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나보군.”

         

         

         베올그린은 피식 웃으며 사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오른손을 사내의 머리 위에 얹으며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말해라. 알렉산드르 왕세자는 지금 어디에 있지?”

         

         

         손 아래에선 암녹색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력이 뱀처럼 도사리며 사내의 귀와 눈 안으로 파고들었다.

         

         사내는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전하는 지금 외무성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었나. 시간 낭비였군.”

         

         

         콰직, 하는 소리가 들리며 사내의 머리가 축 늘어졌다. 쓰레기를 던지는 느낌으로 사내를 집어 던진 베올그린이 천천히 갑판 위로 내려섰다.

         

         

         “이게 다 무슨 짓이지? 베올그린, 뭘 계획하고 있었던 거냐?”

         

         

         이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알렉산드르와 접촉하기 위해 엘리자베타를 자극했다기에, 당연히 칼리온 군도가 알렉산드르 왕세자를 지원하며 내정 간섭을 시도한다고 여겼다.

         

         그 외의 다른 추측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베올그린은 대뜸 사절을 죽였다. 거기에, 알렉산드르 왕세자의 위치를 묻는다고?

         

         

         “지금 이 도시에 있는 왕세자는 본인이 아닐세. 음… 우리 사이에 남은 이야기들이야 넘쳐나지만 말을 꺼내긴 어렵군.”

         

         

         베올그린은 몇 차례 입을 벙긋거리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금제라네. 자네가 스스로 알아내지 못한다면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를 건넬 수 없다네. 슬프게도 마법사란 천리를 얽는 이들이 아닌가.”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지. 알렉산드르와 밀약을 조인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미리 말해줬더라면….”

         “그럼 자네의 자격을 확인할 수 없었겠지. 자네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 알 수도 없었겠고. 난 자네가 죽은 줄 알지 않았나. 필요한 일이었네.”

         

         

         베올그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마력이 천천히 사그라들며 희미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언젠가 칼리온의 내 탑을 찾아오게나. 아마 날 직접 마주할 순 없겠지만… 이반. 우리의 척후. 자네는 자격이 있네.”

         “무슨 자격을 말하는 거지?”

         “진리의 마지막 장을 넘길 자격. 이 놀이판 위의 손아귀들을 바라볼 자격. 아, 이런. 제기랄.”

         

         

         베올그린의 얼굴에 금이 쩍, 하고 갈라졌다. 그는 얼굴을 한 차례 더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도 말해줄 수 없다는 건 너무 잔인한데.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말이 많단 말일세.”

         “내가 뭘 해야 하지?”

         “대비하게. 이번 놀이판은 우리 발 아래에 있는 저 대학인 것 같으니. 많은 날줄이 저 아래에 펼쳐져 있다네.”

         “대비…?”

         “저 녀석들도 나쁘진 않지만 처음부터 준비된 말들은 아니지. 체스판 위에 갑자기 나타난… 그래. 플레잉 카드라고 할까. 그러니 체스말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게나. 내 딸을 잘 부탁하네.”

         

         

         베올그린의 얼굴이 점차 희미해졌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그는 이반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이반은 반사적으로 독순술로 입술을 읽었다.

         

         

        -막시밀리앙은 사라진 게 아닐세.

         

         

         작은 웃음과 함께 베올그린의 마력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

        

        

        갑판 위에서 일어났던 소란은 프리첸카야 시민들에겐 전해지지 않았다. 그저 평소대로, 고요하게 하늘 위에 떠있다고 여겨질 뿐.

        

        이반과 빙의자들은 겁에 질린 함장의 배웅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반파된 마차를 골목 구석에 버려둔 채로, 이반은 빙의자들을 훑었다.

        

        놀이판이라.

        

        체스판 위에 올라온 카드들이라. 규칙과 다른 게임이 뒤섞였단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까.

        

        이들이 필요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무슨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었고, 어떤 흐름을 유도하고 있는 것인가.

        

        놀이판 위의 손은 누구인가.

        

        신?

        

        이반은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유진을 바라봤다. [용맹 부여] 버프가 끝난 탓인지, 유진은 굉장히 지친 얼굴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성 주문 슬롯이란 것. 아직도 있나?”

        “네? 아, 네네.”

        “음.”

        

        

        마법과 달리 신성 주문은 신이 직접 내려주는 일종의 가호다. 신의 의사를 대행하여 인간의 육체를 이용해 펼치는 주문이다.

        

        즉, 신성 주문 슬롯이라는 말은 곧 유진의 ‘상태창’이 신의 인가를 받았다는 뜻과 다름없다.

        

        아니, 어쩌면 신이… 이 빌어먹을 전근대 판타지 세상의 인격신이 만들어 둔 대화 창구일지도 모른다.

        

        퀘스트창과 같은 구구절절한 것들까지 구현된 것을 본다면.

        

        

        “오늘은 고생들 많았다. 들어가서 쉬고, 내일 보지.”

        “어, 형님. 이렇게 그냥 끝난다고요?”

        “내일.”

        

        

        이반은 떠나는 빙의자들을 한번 훑고는 등을 돌렸다.

        

        보고하는 자리에 저 녀석들을 데려갈 순 없는 노릇이니까. 특히 이번 일 같은 경우엔, 저 녀석들이 더 이상 깊게 얽혀선 안 된다.

        

        단순히 왕녀와 왕세자의 정쟁에 휘말린 사건이라면, 차라리 한쪽 편을 들어 확실히 승리한다면 낫겠지만.

        

        프리첸카야에 있는 왕세자가 본인이 아니란 소리를 들은 이상, 이 사건은 학생이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하물며 빙의 4년차의 어린 아이들이라면 더욱이.

        

        몇 년 만이더라.

        

        이반은 밤거리를 걸어가며 생각했다.

        

        키릴로브나 대령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이반은 방첩사령부로 향했다.

        

        왕녀를 마주해야 할 시간이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바로갑니당!
    다음화 보기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