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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

       일레인은 이미, 살아남기 위해서 두 손에는 많은 피를 묻혔습니다. 적대적인 귀족의 머리를 부수고, 소문을 흘려 누군가의 권위를 깎아내리거나, 협잡질을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최근에는, 이리드에게는 은인일── 자색 마탑을, 여러 빌미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애초에, 그 명분을 손에 넣기 위한 차원이동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소년 하나를 끊어내는 것은 대수롭지도 않을 일이건만.

       

       이토록 망설이게 되는 것은. 겹쳐 보고 있었기 때문이겠습니다.

       

       금발의 소년은 때때로 유년기의 이리드이기도 했고, 스레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의 의심이 고개를 치켜들 때마다, 소년의 그림자에서 1황자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옛날이야기를 압니다. 어릴 적 동생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서고의 동화책을 산더미처럼 찾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의심 많은 황제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남을 진심으로 믿지 못하는 왕은, 언젠가 그 의심으로 인해 자멸하리라는 교훈을 담은 간단한 이야기.

       

       1황자에게 독을 먹인 후에 다시금 펼쳐본 동화책은, 예언서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약한 의심에는 언젠가 대가가 따르리라는 걸. 그러나 순수하게 웃고, 순수하게 누군가를 믿었던 과거는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져서. 돌아가기에는 무척이나 험난한 길이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일레인.”

       

       “⋯⋯페로.”

       

       “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저도 그래요, 페로. 제가 먼저 하죠. 우리는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깔끔하게 이별을 고했습니다. 소년과의 동행은 위험했으니까. 소년의 안색이 창백해졌습니다. 노르스름한 모닥불 불빛에도 불구하고, 그 창백함이 잘 보였습니다.

       

       “⋯⋯⋯⋯.”

       

       “치유의 힘 때문에 쫒기고 있다고 들었어요. 또, 페로가 변이체에게 감염된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고요. 저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요.”

       

       “⋯⋯죄송해요. 숨겨서.”

       

       “죄송할 일도 아니에요. 각자, 서로가⋯⋯ 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이 정도면 오래 지냈던 것 같네요. 즐거웠어요.”

       

       “⋯⋯저도요! 저도, 즐거웠어요.”

       

       소년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습니다. 

       

       

       “모닥불은 마지막 선물인 셈 칠게요. 낙원, 꼭 도달하기를 바랄게요.”

       

       “벌써 가시는 거예요? 지금?”

       

       “야밤에라도 습격해 올 수 있는 거니까요.”

       

       일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페로에게 변이체 유충이라는 독을 먹인 게 자신이라는 죄책감은, 여전히 발목을 잡아채고 있었지만. 곧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세 걸음만 걸어나가면 됩니다. 소년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세 걸음만 걸어 나가면, 작별이었습니다. 

       

       모닥불 타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소리로도 들렸고, 반대로 작은 불꽃이 꺼져가는 소리로도 들렸습니다.

       

       타박. 타박.

       

       그렇게 마지막 한 걸음으로 끊어내려 할 때, 페로가 물었습니다.

       

       “나침반은요?”

       

       “⋯⋯낙원의 이야기라면, 낙원의 리턴보다도 당신의 리스크가 더 크다고 판단했어요. 페로.”

       

       “아뇨⋯⋯ 일레인. 나침반, 가져가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해서요.”

       

       “그건 당신의 물건이에요.”

       

       “황무지에서 그런 게 있나요⋯⋯? 사람도, 빼앗아 가면 그만인 곳인데.”

       

       “⋯⋯⋯⋯.”

       

       “떠나실 거라면, 나침반도 가져가시는 편이⋯⋯ 더 안전할 거예요. 어쩌면 누군가에게 팔 수도 있고요. 그것 말고도, 제 가방에는 도움이 되는 물건이 참 많아요.”

       

       일레인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가느다란 한숨을 내뱉었습니다.

       

       “죽이고 가져가 달라는 건가요, 페로?”

       

       “기왕이면 살려주셨으면 좋겠죠⋯⋯.”

       

       “그렇다면 왜?”

       

       “이상해서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서 떠난다고 하지만, 생존률을 올리는 물건을 챙기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는 게.”

       

       “⋯⋯⋯⋯.”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들어주신다면, 드릴게요. 나침반. 그리고 제 가방도.”

       

       

       손해 볼 것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득뿐이었습니다. 잠깐의 대화에 어울리고 난 뒤, 생존에 도움이 되는 물건들을 챙길 수 있다는 건.

       

       생존을 위해서 떠나려던 발은, 생존을 위해서 멈췄습니다. 그 사이의 간극에서 일레인의 마음만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우선은 감사를 전하고 싶어요, 일레인. 지난 5일간, 정말로 즐거웠어요. 누군가와 함께 여행한다는 건⋯⋯ 꿈에서도 나온 적 없었던 일이에요. 막연한 상상보다도 멋진 일이던걸요? 누나가 생긴 것 같아서⋯⋯ 기쁘기도 했고요.”

       

       “그건 계약이었어요. 당신은, 제게 부족한 지식을 알려주고. 저는, 당신의 무력을 보완하는.”

       

       “제가 더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일레인이 없었다면, 아마도 저는──.”

       

       “살았겠죠, 어느 멍청한 여자가, 당신에게 억지로 점액을 먹이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테니까.”

       

       “그건,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일레인의 탓이 아니에요. 저도 웅덩이에 들어있을 줄은 몰랐고, 또, 일레인은 기억상실이잖아요?”

       

       “어째서, 그렇게까지 저를 변호하는 건가요?”

       

       “일레인은 착한 사람이니까요.”

       

       “지금, 버려지고 있다는 자각이 없나요?”

       

       “진짜 나쁜 사람은, 진작에 나침반을 챙겨 갔을 거예요. 지금보다도 훨씬 전에요. 일레인에게는, 저를 버릴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있었잖아요.”

       

       “그건⋯⋯.”

       

       일레인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페로는, 머릿속의 기생충님이 얼른 고백하라고 재촉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떠나가는 일레인에게 마음의 짐을 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언제나, 무리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일레인의 눈빛은 가끔, 무언가에 목이 매인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래서, 일레인은⋯⋯ 어쩌면 저처럼, 두려움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보다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저와는 조금 다르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는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고, 일레인은 두꺼운 갑옷을 입기로 한 것 같아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요?”

       

       “어울리지 않아요, 일레인.”

       

       

       페로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오해가 생기는 일 없게, 자신이 온전하게 생각하는 바를 확실히 전달할 수 있도록. 

       

       “우리는 서로 상처를 숨기고, 등을 돌린 채로 5일간의 여정을 이어 나갔지만. 알잖아요 일레인, 우리는 더⋯⋯ 나을 수 있을 거예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예요. 막연한 감상일 뿐이지만⋯⋯.”

       

       “⋯⋯⋯⋯.”

       

       “갑옷을 내려놓고, 일레인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식량도, 변이체도 걱정할 필요 없는 좋은 곳에서, 생존이나 의심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대신에⋯⋯ 평화롭게. 무엇 하나에 얽매이는 일 없이.”

       

       소년이 내뱉는 것은, 막연한 언어의 나열에 불과했지만. 그 마음만큼은 전해지는 것 같아서.

       

       “당신이── 무엇에 괴로워하고, 무엇에 슬퍼하는지, 저는 몰라요. 그렇지만.”

       

       무채색이던 세상에 실금이 가고, 그리고 그 틈 사이에서.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일레인.”

       

       빛이 스미는 듯하였습니다.

       

       “몇 번이고, 우리는 나아갈 수 있다고 외칠게요. 일레인, 그러니까⋯⋯!”

       

       소년의 말이, 끝맺음(엔딩)에 이르기 직전.

       

       

       

       쿠궁──!! 

       

       “⋯⋯⋯⋯!!”

       

       “이건, 대체⋯⋯?!”

       

       갑자기, 지면을 울리며 커다란 소음이 발생했습니다. 대지가 흔들리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일레인은 고개를 들어 저 너머,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습니다.

       

       -우우우우우우.

       

       거대 변이체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일레인은 등장 방향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이제는 변이체를 유인할 미끼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거리가 있으니, 지금부터 전력으로 달리면, 페로와 함게 살아나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으오아아아아아아!

       

       그곳에서는, 또 한 마리의 거대 변이체가──.

       

       ===============================================================

       

       

       마탑주의 페로 RP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게 정말 초짜의 실력이라는 말이냐⋯⋯!

       

       나는 그 모습을 정말 훈훈하게 보고 있다가, 타이밍을 맞췄다. 지금까지 복선은 알차게 깔아뒀다. 의도해서 깐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건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1) 이상할 정도로 일행을 쫒아 온 평원의 거대 변이체

       2) 페로가 점액질을 마심 (변이체 유충 설정을 채용)

       3) 페로가 멍때리면서 평원 어딘가를 바라보던 떡밥

       4) 아까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터져 나온 보라색 빛무리

       5) 무언가에 잠식당한 듯이 삐걱거리던 페로의 움직임

       

       머릿속에서 모든 떡밥이 맞물려 돌아갔다. 그리고 하나의 멋진 그림을 그려내었다.

       

       페로의 머릿속에 심어진 변이체 유충이, 페로를 교묘하게 조종해서, 거대 변이체를 이곳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오오오오오아아아아악!!

       

       -그으으어어어어어!

       

       마탑주의 무빙을 보면 그녀는 잔잔한 해피엔딩 노선으로 향하던 모양이지만, 해피로 가더라도 주인공에게 난관은 필요한 법. 그래서 하나 만들어줬다. 거대 변이체와의 2차전이다. 물량을 두 배로 늘린!

       

       어딘가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이 개새끼야-!!”

       

       아, 이건 마탑주다.

       

       마탑주가 조금 화가 난 것 같긴 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나는 두 사람의 피날레를 멋있게 꾸며주고 싶었을 뿐이다. 일레인이 한 발짝 모자란 것 같기도 했고.

       

       일레인의 문제는 생존 욕구나 독에 대한 트라우마, 인간 불신 같은 게 아니었다. 그 모든 문제는 한 가지 특성으로부터 기인한다.

       

       내가 보기에, 요점은 책임감이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는 대신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해내려는 성질. ‘내가 해내야만 한다’는 생각 그 자체. 자신을 부수어가면서도 목표를 이루려는 맹목성.

       

       고작 열한 살짜리 꼬마가 동생들을 위해 존속살해를 결심하고 혼자서 실행에 옮기게 된, 어마어마한 책임감 말이다.

       

       일레인 주변의 누구도 ‘범인은 1황자’라는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 경험과, 타고 태어난 책임감이 비틀린 방향으로 시너지를 냈다⋯⋯ 는 가설이다.

       

       계산해 내는 변수가 오로지 자신뿐이기에, 무언가를 버리는 선택지밖에 떠올리지 못한다. 개인이 해낼 수 있는 일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야를 넓혀서, 작은 소년을 짐 덩이나 잠재적 위협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아군으로 인식하는 순간, 전원생존 엔딩 각이 보이도록 설계된 전장이다. 이곳은.

       

       소위 말해서 간단한 기믹전이다. 

       

       정보는 주어졌다. 에스페로는 감염되었고, 변이체의 어그로는 소년에게 끌린다. 또한 소년에게는 누구라도 탐내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묘사되었다. 어그로와 힐링이 합쳐지면, 그건 탱커라는 뜻이다.

       

       소년이 탱킹하는 사이에 변이체를 부수면 된다. 심플하다.

       

       이 기믹에 대해서는 마탑주에게 사전 전달이 끝난 상태였다. 물론 통증 감도도 고양이 펀치에 맞는 정도로 낮춰뒀고.

       

       과연 일레인은 소년을 탱커로 볼까, 미끼로 볼까. 그 부분이 관전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면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것 같은 레아로의 존재를 떠올려내거나⋯⋯. 레아로는 서브딜러 포지션으로 설계되어 있다. 피차 습격당한 처지 아닌가. 다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 협조하라는 식의 짧은 말로도 좋았다. 간단한 설득에만 성공하면 나름대로 보조딜을 넣어 줄 거다. 

       

       자, 거대 변이체의 첫 번째 공격이 날아가고 있었다.

       

       도주냐, 전투냐. 페로를 이용하느냐, 마느냐. 레아로는 잊었느냐, 기억하고 있느냐⋯⋯. 

       

       쿠아아아아아아-!!

       

       “?”

       

       1황녀가 변이체의 팔을 갈아버렸다.

       

       ===============================================================

       

       우화(羽化)란, 영혼의 색을 바꾸는 과정이었습니다.

       

       충격적인 경험, 굳건한 결의, 흘러넘치는 애정 따위의 강한 감정이, 영혼을 물들여 색을 입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색 있는 영혼을 태워 얻어내는 마력은── 특수한 효과를 갖게 됩니다.

       

       1황녀 일레인이 동부전선에서 성과를 올릴 수 있던 이유는, 그녀 자신이 우화(羽化)의 경지에 들어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의 극단성 때문에 사용하는 것을 자제해왔지만⋯⋯.

       

       지금은 써야 할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일레인은 팔을 뻗어, 시동어를 외웠습니다.

       

       “『교곡의 바람 장갑』.”

       

       일레인의 상처투성이 양손에 바람이 휘감기기 시작했습니다. 

       

       바람 칼날로 장갑처럼 손을 감싸 안는, 공방일체의 범용 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다시 한번 색을 덧입히면.

       

       날카로운 바람은 점차 그 속도를 빠르게 하며,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어느 시점에서 고요해졌습니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범주를 넘어섰으므로.

       

       스걱. 

       

       피가 튀었습니다. 

       

       너무나도 거센 바람은, 시전자인 일레인의 피부를 베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람의 궤적을 따라 상처가 생기고, 피가 흘러, 바람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일레인의 손이 누더기처럼 흉터가 나 있던 것은, 이 기술 때문입니다. 영혼의 색을 바꾸어 발현하는, 마력을 이용하는 특정 동작의 강화.

       

       “우화(羽化) – 『피바람(血風)』.”

       

       멀리서 보기에, 그녀는 두 손에 붉은 폭풍을 휘감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어어어어어!!

       

       거대 변이체의 팔이 지면을 긁어가며 날아왔습니다. 땅에서 먼지구름이 피어나며, 사방으로 돌이 튑니다. 

       

       거대한 벽이 날아드는 듯한 상황에도, 일레인은 그저 자세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진각과 함께 폭풍을 때려 박았습니다.

       

       쿠아아아아아아-!!

       

       끄그그그그극!

       

       폭풍이 맴도는 나선의 궤적을 따라, 거대 변이체의 팔이 말 그대로 갈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터져나오는 후폭풍으로, 변이체의 어깨가 크게 튕겨 나갑니다. 하늘에 피바람이 번졌습니다.

       

       다른 우화와 비교해도 현격한 우위에 있는 파괴력. 

       

       그러나, 일레인의 안색은 빠르게 창백해지고 있었습니다. 기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대량의 출혈이 발생하기에, 동부전선에서 그녀는 사제단의 백업을 받으며 사용해 왔습니다.

       

       사제가 없는 지금은, 실혈사까지 약 5분.

       

       5분 안에 선택해야 합니다. 시간 안에 거대 변이체 두 마리를 도륙할 수 있는가.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튼튼하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거대했습니다.

       

       핵이 존재할 거라고 짐작되는 머리는 까마득할 정도로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다리부터 조각내어가며 머리에 유효타를 넣으려면, 적어도 네 번. 변이체의 재생력을 고려하면 다섯 번의 주먹질이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적은 두 마리.

       

       막대한 질량의 공격을 피하거나 받아넘겨 가며, 도합 열 번. 시간이 좀 더 주어진다면 모를까, 5분으로는 촉박했습니다.

       

       그렇다면. 돌파해서── 도주해야 합니다. 

       

       “도주해야── 하는데!”

       

       콰아아아앙-!!

       

       일레인은 제자리에서 한 번 더, 거대 변이체의 공격을 받아쳤습니다. 어째서, 발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걸까.

       

       지쳤는지도 몰랐습니다. 모든 의심과, 모든 생존에. 악을 써가며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것이 지긋지긋해서.

       

       소년의 호의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게워 내는 자신이 한심해서.

       

       어쩌면, 아직 듣지 못한 소년의 마지막 말이 발목을 잡았는지도.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도망치라고. 추억도, 마음도,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가면, 그 날 그랬던 것처럼 너는 살아남을 수 있다고.

       

       다시금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변이체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세 번째 받아치기를 준비할 때.

       

       

       “여기다──! 못된 변이체들아, 여기야──!! 너희들의 새끼는, 내 안에 있다──!!”

       

       “⋯⋯페로?!”

       

       페로가 외쳤습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두 손에서 보라색 빛무리를 뿜으며.

       

       거대 변이체들은 고개를 돌려 작은 소년을 바라보았습니다. 소년의 머릿속에서, 이쪽을 보라며 외쳐대고 있는 무언가를 향해서. 그리고 손을 뻗었습니다.

       

       커다란 손이 작은 소년을 뭉개버리기 위해 떨어졌습니다.

       

       “이, 바보가⋯⋯!!”

       

       일레인은 비스듬히 몸을 띄워, 지면을 사선으로 내리쳤습니다. 붉은 폭풍과 함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가속도로 쏘아져 나갔습니다.

       

       순식간에 소년의 지척으로 도달해, 낚아챕니다.

       

       쿠웅-!

       

       일레인과 페로가 부둥켜안고 날아서 지나간 자리 위, 간발의 차로 변이체의 손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 사이에, 『피바람』은 해제했습니다.

       

       일레인은 페로의 멱살을 틀어쥐고 외쳤습니다.

       

       “멍청이예요, 페로?! 남이 시간을 끌고 있으면, 미적대지 말고 도망쳤어야 할 거 아니에요-!!”

       

       “⋯⋯일레인이 남았잖아요!”

       

       

       일레인의 표정이 일그러졌습니다. 

       

       이 소년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녀를 살리고 싶었다고, 모든 걸 떠안고 죽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마치, 1황자의 놀이에 휘말려 든 일레인이, 고통 속에서 결단을 내렸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 화를 토해내려고 할 때.

       

       “저는, 치유 능력이 있어요⋯⋯ 레아로에게 들으셨나요? 그래서, 즉사하지만 않으면, 버틸 수 있어요. 제 머리 안의 변이체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폭력적으로 굴지 않을 거니까!”

       

       “⋯⋯⋯⋯.”

       

       “그때, 일레인이 거대 변이체를 마무리하면 돼요! 제가 다져지기 전에!”

       

       일레인은 당혹스럽게 눈을 깜빡였습니다. 소년은 다 플랜이 있었습니다.

       

       “⋯⋯자기희생이 아니었나요?”

       

       “에, 어, 음⋯⋯. 다, 다 같이 힘을 합쳐서, 살아 나가면, 좋지⋯⋯ 않나요⋯⋯?”

       

       일레인의 표정이 맹하게 바뀌었습니다. 

       

       새삼스러웠지만, 소년은 일레인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함께 싸우면 누구 하나 죽지 않고, 이번 난관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일레인은 1 더하기 1이 3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들은 것처럼, 얼떨떨한 표정으로 굳어 있다가. 이내 실소를 터트렸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알고 있던 게 아닐까 해서. 무언가, 흩어진 퍼즐 조각이 끼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사람을 믿어본 게 얼마 만이었던가요.

       

       회화궁에서의 사건 이후로, 일레인은 누군가를 온전히 믿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믿어본 적은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위험이 있다면 우회하고, 누군가를 만날 때에는 항상 배신을 주의했습니다. 고민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 해낼 수 있는가’. 그녀의 마음속은 삭막한 세상이었습니다.

       

       이것이 확고한 신념에 의한 안전제일주의였더라면 번민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페로의 말마따나, 적성에 퍽 어울리는 태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선택을 해나갈 때마다, 퍼석퍼석하게 메마른 심장을 느낄 수 있었으니.

       

       

       페로를 미끼로 쓰면 확실하게 도망갈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을 미끼로 쓰면 페로를 확실하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페로와 자신을 동시에 구해내려고 한다면. 만약 실패한다면,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되겠지만⋯⋯ 마음은 참 후련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일레인은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자신도, 에스페로도.

       

       

       그녀의 살가죽을 베어내던 바람은 멎었습니다. 이미 벌어진 상처에서는, 어쩔 수 없이 끈적거리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더 이상 상처가 늘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서. 바람이. 부자유한 나선의 궤적을 그리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풀려나갔습니다. 얽매이지 않으려는 것처럼. 

       

       일레인은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더 이상, 『피바람』은 쓸 수 없겠구나.

       

       그러나, 대신 얻어낸 이 힘은. 파괴력은 낮아졌을지언정── 많은 것들이 가능했습니다. 일레인은 신기하다는 듯이 일렁이는 바람을 바라보다가, 문득 마음에 떠오르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우화(羽化) – 『기대(期待)』.”

       

       작은 깨달음은 마음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온전히 이겨낸 것이 아니기에 승화(昇華)에는 닿지 못했지만, 분명한 전진이었습니다.

       

       바람이 일레인의 몸을 가볍게 휘감았습니다. 그리고 손을 뻗으면, 바람 한 줄기가 페로의 몸을 타고 빙빙 돌기 시작했습니다.

       

       “⋯⋯우, 우와앗?!”

       

       “부탁해요, 페로. 두 거대 변이체의 목을 한꺼번에 날릴 거예요. 시선, 끌어줄 수 있겠어요?”

       

       처음으로 받아 본, 불안하게 흔들리지만⋯⋯ 분명히 반짝이는 신뢰에. 에스페로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반격의 시간이었습니다.

       

       ===============================================================

       

       ‘낙원’까지 남은 거리──

       0.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되게 넉넉하게 담았습니다. 고봉밥이다 그죠?
    배부르게 드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한가득⋯⋯.
    오늘도 좋은──
    다음화 보기


           


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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