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5

       “부고 편지와 함께 보내주신 위로금도 보관해 놨답니다.”

         

       상단주 그레이스가 편지와 보석을 꺼냈다.

         

       대저택을 정복한 이후 상황을 수습할 때 없는 살림을 털어 가신들의 일가친척에 위로금을 보냈었다. 괜히 닭꼬치 하나도 제대로 못 먹을 만큼 쫄쫄 굶은 게 아니다.

         

       “비록 주변 눈치가 보여 찾아뵙지 못했지만 언제나 가주께서 이 상황을 이겨내시길 빌었죠. 언니 또한 그랬을 테니까요.”

         

       허억.

         

       난 혼자가 아니었어.

         

       완전 감동.

         

       시시콜콜한 근황 얘기와 잡담이 이어졌다.

         

       상단주가 안쓰러워하는 눈빛을 보냈다. 손이 뻗어져 소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온기가 마음을 달래는 기분이었다.

         

       “마, 맞아요.”

       “앞으론 꽃길만 걸으실 거예요.”

         

       손등이 토닥토닥.

         

       “맞아요오.”

         

       파스텔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사람 완전 착한 거 같아.

         

       경계심이 사르륵.

         

       호의가 뿜뿜.

         

       이 사람이 무슨 요구를 해도 흔쾌히 수락할 거 같은 기분.

         

       대충 살인 청부까지는 들어줘야 할 거 같아.

         

       끄덕끄덕.

         

       호르몬 친구도 동의하는 바이다.

         

       악마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방심하지 않는다더니…….』

         

       마음이 풀리는 게 이해는 되지만 경계심까지 녹아내리는 건 우려된다는 의미 같다.

         

       파스텔은 움찔.

         

       풀린 입꼬리가 자각됐다.

         

       아앗.

         

       어느새 풀린 비스니스 모드?!

         

       완전 비무장 상태가 돼 버렸어!

         

       으아아.

         

       그치만그치마안.

         

       엠마 하녀장의 친족이 이렇게 호의적으로 말을 해오는데 마음이 안 풀릴 리가. 사람이라면 당연히 훌쩍훌쩍하게 되잖아.

         

       훌쩍훌쩍.

         

       물론 이게 본격 비즈니스 전에 치러지는 아이스 브레이킹이자 라포 형성에 불과하다는 건 이성적으론 안다. 이렇게 경계심이 풀리는 게 상대의 비즈니스적 수작이라는 건 명백하니까.

         

       하지만 이성적으로야 그렇다는 거고 마음은 아무래도 좋다고 느껴진다고 할까.

         

       응응!

         

       엠마 하녀장에게 받은 신의가 있으니 그 친족에게 사기 한 번쯤은 당해도 되지 않을까?

         

       허억.

         

       너무 맞는 말.

         

       파스텔 완전 똑똑!

         

       파스텔은 그냥 헤실헤실 잡담을 나눴다.

         

       경계심을 다 풀고 열린 마음을 가지니 오히려 상단주 쪽에서 반응이 왔다.

         

       상단주는 아이의 험난한 가정사를 노린 악랄한 화술이 너무 잘 먹히는데 당황했다. 그리고 살짝 미안해했다.

         

       마치 겉과 속이 다른 크래프트 가주를 상대하려고 자리에 앉았는데 막상 상대는 그냥 애였다는 걸 눈치챈 모습이었다.

         

       “저, 정말 고생하셨네요. 애 혼자서…….”

         

       상단주는 양심이 찌르르 아파 보였다. 접이식 부채가 펴지고 황급히 팔랑였다.

         

       물론 사기를 당해줄 마음만 생겼을 뿐 인생을 저당 잡혀줄 생각까진 아니라 비즈니스 모드를 완전히 푼 건 또 아닌 파스텔은 상단주의 변화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우와우와.

         

       착한 사람.

         

       파스텔 감동감동.

         

       호의엔 호의가 따라오는구나.

         

       역시 세상은 아름다워.

         

       “맞아요, 저 노력했어요.”

         

       생계형 비리를 저지르기 전에 겪었던 굶주림이 떠올랐다.

         

       꼬르륵꼬르륵.

         

       닭꼬치도 못 사 먹던 인생.

         

       흐윽.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슴이 먹먹했다.

         

       파스텔은 괜히 눈가를 훔쳤다.

         

       “정말, 험난했어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굶었거든요. 운이 조금만 나빴다면 아사했을지도 몰라요.”

         

       손가락에 눈물이 묻어나왔다.

         

       잉.

         

       나, 진짜 눈물 흘리고 있었네.

         

       으아.

         

       비즈니스 자리에서 무슨 실례래.

         

       서둘러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코가 훌쩍여졌다.

         

       으아, 왜 이러지.

         

       콧물 흘리면 진짜 대참사.

         

       파스텔이 허둥대며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할 때쯤, 그걸 보며 그레이스는 숨이 턱 막혀왔다.

         

       예상했던 크래프트 가주가 아니다.

         

       분명 예쁘장하고 귀여운 외견과 딴판인 시커먼 속내를 갖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정말 그 나이대의 애였다.

         

       “죄송해요, 주체가 안 되네요. 정말 죄송해요.”

         

       파스텔이 눈물을 닦으며 코를 훌쩍였다.

         

       그레이스는 서둘러 손수건을 꺼냈다.

         

       “이, 이거 쓰세요.”

         

       손수건을 건네는 손이 떨렸다.

         

       “감사합니다. 진짜 죄송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진정할 수 있어요.”

         

       아이가 눈물을 닦고 코를 흥 풀었다. 손수건을 접고 다시 흥 풀어냈다.

         

       공적인 자리에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의 모습.

         

       그레이스는 가슴이 아려왔다. 방금까지 자신이 했던 노골적인 수작이 무수히 상기됐다.

         

       힘든 사정은 뻔히 알고 있었다. 이 제국에 크래프트의 몰락을 모를 자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자신은 아이의 어두운 가정사를 일부러 언급하며 연약한 마음을 비틀고 빈틈을 찾아 속내를 들여다보려 했다.

         

       호의적인 위로인 양 기억을 상기시키고 감정을 자극해 유리한 고지에 서려 했던 이기적 과정.

         

       그 결과가 어떻던가.

         

       아이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려 했다. 그러다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는 눈물을 닦으며 사과를 반복했다.

         

       분명 해맑은 아이라 보고받았다. 미소가 아름답고 웃음이 발랄한 아이.

         

       도대체 그 밝은 모습 속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숨겨져 있었을지. 그리고 자신은 그걸 얼마나 냉정한 목적으로 헤집어버렸는지.

         

       시선이 부고 편지와 보석 위로금을 향했다.

         

       굶을지언정 가신의 친인척에게 위로금을 보내던 아이에게 자신은…….

         

       그레이스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해타산이 저 멀리 날아가고 양심이 심장을 채웠다.

         

       상단주는 상단주 아님이 됐다.

         

       어느새 진정한 아이가 해맑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손수건은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완전 깨끗하게!”

       “아, 아뇨. 가지셔도 돼요.”

         

       아이와 시선을 마주치기 어려웠다. 접이식 부채를 떨리는 손으로 살랑살랑 부쳤다.

         

       “그, 그보다 각하께선 무슨 일로 오신 거죠?”

         

       그레이스는 이 안쓰러운 아이에게 생활비 지원이든 뭐든 해줄 마음이 있었다. 마음을 넘어 의무감까지 든 참이었다.

         

       “앗! 맞아요.”

         

       아이가 해맑게 웃었다. 그러더니 서둘러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 웃음엔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는 걸까.

         

       저 변화엔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는 걸까.

         

       분명 자신의 마음을 망가트려 놓을 안쓰러운 목적이 나오리라.

         

       선량한 어른은 당해줄 생각으로 마음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빈틈을 포착한 파스텔이 비즈니스 모드로 냉혹하게 주먹을 날렸다.

         

       “학생회 산하의 상단 창설과 운영 위탁에 대한 건입니다. 잡설이 길었으니 바로 승낙 여부와 수익 분배율을 얘기했으면 좋겠군요.”

         

       밀무역……?

         

       차가운 현실이 상단주를 강타했다.

         

       선량한 어른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휩쓸려 버렸다.

         

         

         

       #

         

         

         

       파스텔은 세수를 했다.

         

       어푸어푸.

         

       문질문질.

         

       어푸어푸.

         

       “푸하!”

         

       뽀송뽀송한 수건을 들어서 얼굴을 닦았다.

         

       “어우, 협상에 집중하느라 눈물 자국이 그대로 있는 줄도 몰랐네요. 어쩐지 협상 내내 상단주님이 이상할 정도로 시선을 주던데 눈물자국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지.”

         

       부끄러워.

         

       “그래도 좋은 조건으로 계약한 거 같죠?”

         

       그레이스 상단주가 수익 일부를 나눠 받는 대가로 학생회 상단의 창설부터 운영까지 맡아주기로 했다. 자본은 학생회에서 대고 말이다.

         

       물론 상단 소유주는 파스텔이다.

         

       무려 지분율 100%

         

       우왕.

         

       그런데 경영은 그레이스가 하고 자본은 학생회에서 대는데 왜 소유주가 파스텔일까?

         

       이유는…….

         

       그냥.

         

       부학생회장 겸 총무부장 겸 기획부장 겸 홍보부장 겸 봉사부장 겸 선도부장이, 공식 계약서에 소유주를 학생회 대신 파스텔로 적었을 뿐이다.

         

       오예.

         

       『매우 좋은 조건이다. 저 상단주가 매일 이런 조건으로 계약한다면 상인은 관두는 게 맞아.』

         

       그 정도?

         

       뿌듯함이 올라온다.

         

       “제가 딱 포착했죠! 울면서 분위기가 바뀌어서 그런가 상단주님이 당황하신 게 보이더라고요! 분위기 변화에 적응을 못 하신 거죠! 평소에 진지하거나 느긋한 분위기에서만 협상을 진행해 보신 게 분명했어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 흔히 가진 전형적인 약점. 의도하진 않았지만 완벽한 빈틈이었다.

         

       “그래서 바로 협상으로 강행!”

         

       정신이 혼란한 틈을 타 각종 사안을 파바박.

         

       “교수님의 소개서를 미리 직원에게 건네주지 않고 목적을 감춘 것도 시너지가 있었어요! 처음 듣는 사안이 몰아치니 더 혼란스러워진 거죠!”

         

       이것이 비즈니스 모드.

         

       파스텔은 스스로의 지성에 뿌듯함을 느꼈다.

         

       “얼마나 잘 먹혔는지 상단주님이 정신도 못 차리더라니까요!”

         

       아하하.

         

       “이거 참 하녀장의 동생분께 너무 한 건 아니었는지 모르겠어요. 기분 따라 너무 밀어붙였나?”

         

       그래도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니 이 계약 말고 따로 챙겨드려야지.

         

       과일(금괴) 바구니 같은 거.

         

       파스텔은 혼자 웃다가 떠드느라 제대로 닦지 않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았다.

         

       우와, 수건 완전 뽀송뽀송해.

         

       『어린 크래프트.』

       “네?”

         

       파스텔은 수건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검을 내려봤다.

         

       『삶에 스스로를 잃지 마라.』

         

       잉.

         

       “뭐가요?”

       『……아니다. 고민 없이 살아라. 그저 해맑게.』

         

       정말이지, 악마님은 가끔 이해하기 어렵단 말이야.

         

       너무 늙으셔서 그런가.

         

       허억.

         

       이건 진짜 실례되는 생각!

         

       하극상을 넘어선 노인 공격!

         

       으아아.

         

       배덕감조차 느껴지지 않아아.

         

       파스텔은 양심의 욱신거림에 휘청대며 후다닥 응접실로 돌아갔다. 난 아무것도 생각 안 했어.

         

       응접실엔 그레이스 상단주가 초췌한 안색으로 계약서를 내려보고 있었다.

         

       헛.

         

       역시 하녀장의 동생분께 계약 조건이 과했나?

         

       지분을 절반 넘길까?

         

       급격히 마음이 약해진 파스텔은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상단주님……?”

         

       그레이스 상단주가 돌아봤다.

         

       “아. 오셨군요.”

       “역시 계약 조건이 좀 그렇죠?”

         

       지분 100%는 너무 한 거 같아.

         

       머리를 짚고 바보처럼 웃었다.

         

       아하하.

         

       그레이스 상단주가 말없이 계약서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충분해요. 학생회 권한으로 밀무역을 하는 건 메리트가 크답니다. 수익 분배율이 낮긴 하지만 안전성이 남다르거든요. 그리고 이것저것 제 개인적으로 챙길 수도 있고요.”

       “아하!”

         

       그 와중에 고려하실 건 고려하셨구나.

         

       이것이 상단주의 위엄?

         

       안심.

         

       그레이스 상단주가 복잡한 시선을 보내왔다. 탐색하는 듯하면서도 안쓰러워하는 눈빛이었다.

         

       잉.

         

       “왜 그러세요?”

         

       상단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비공정은 아카데미 비공정을 유용한다 해도 인력이 문제라 당장 크래프트 상단의 창설은 어렵겠어요.”

         

       엇.

         

       “핵심 인력과 자원은 저희 상단에서 차출해야 할 듯한데, 현재 해적 토벌로 바쁜 상황이라 여유가 없거든요. 다른 상단들도 마찬가지고요.”

       “아앗.”

         

       그럴 수가.

         

       자동 밀무역이 임시 점검이라니.

         

       파스텔은 해적들에게 깊은 서운함을 느꼈다.

         

       “엠마 하녀장의 동생분께서 못된 해적 때문에 곤란에 빠지시다니, 절대 두고 볼 수 없네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해적 토벌! 제가 도울게요!”

         

       파스텔은 귀족다운 얼굴로 상단주를 직시했다.

         

       품위 있게 자신의 가슴팍을 짚었다.

         

       “이 파스텔 러브 크래프트, 크래프트 가주로서 하녀장의 동생분을 기꺼이 돕겠습니다!”

         

       신의를 다하여!

         

       오예.

         

         

         

         

         

       

       

    다음화 보기


           


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