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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

       어디선가 꺼낸 담요로 가슴을 가린 리디아를 향해 울부짖었다.

       

       “왜, 왜죠?! 왜 안 된다는 건가요 리디아 님!”

       

       “싫으니까.”

       

       “그러니까 왜요?! 리디아 님이 먼저 유혹했잖아요! 그 큼직한 젖탱이를 내놓고 다닌다는 건, 제가 만져도 아무 말 않겠다는 소리 아닌가요?!”

       

       “…이상해. 보통 이런 말은 여자가 남자 엉덩이 쓰다듬다가 경비대에 끌려와서 하는 말인데.”

       

       “알게 뭐에요! 만지게 해줘요! 만지게 해줘!”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팔다리를 대자로 뻗었다. 지금의 나이로도 살짝 아슬아슬한 비기의 준비 자세.

       

       받아라! 요나 데스빔! …아니, 요나 떼쓰기!

       

       “빼애애애애애애애액!!!”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시끄럽던 주점이 일순 조용해지며, 나한테 집중되는 시선.

       

       오늘은 얌전하게 전신 수영복을 입고 접객 중이던 종업원 형님들은 물론, 그들을 음흉하게 바라보던 손님들도 일제히 나를 바라본다.

       

       기겁한 엘리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 모른 사람인 척하고, 리디아가 황망한 얼굴로 딱딱하게 굳은 사이.

       

       이 틈을 타 원하는 목표를 재차 선언했다.

       

       “가슴 만지게 해줘요! 해줘! 해달란 말이에요! 삐에에에엑!!”

       

       이쯤 되자 미친놈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 되는 사람들.

       

       흥! 리디아의 가슴에 담긴 꿈과 희망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세상이 나쁜 거다. 난 나쁘지 않아.

       

       그렇게 수치심과 양심을 내다 팔며 팔다리를 허우적대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결국 리디아가 가볍게 양손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이제 일어나 요나.”

       

       “넹.”

       

       잽싸게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너무 충격받은 나머지 일단 지르긴 했는데…솔직히 나도 쪽팔리긴 했거든. 

       

       하지만 바닥을 나뒹굴며 떼쓰는 걸로 리디아의 가슴을 만질 수 있다면 확실하게 남는 장사다.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 보내자,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는 리디아.

       

       피곤해 보이는 그녀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손을 뻗었다.

       

       찰싹!

       

       그리고 손등을 얻어맞았다.

       

       “왜요?! 알겠다면서요!”

       

       “눈이 무서워.”

       

       “음해에요. 저처럼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또 어딨다고요!”

       

       “…요나 말고 엘리 선배의 눈이 무서워. 여차하면 날 죽일 것 같은데.”

       

       “아.”

       

       뒤를 돌아보자, 즉시 고개를 틀어 내 시선을 피하는 엘리. 어찌나 그 기세가 강렬했는지 목이 꺾이는 줄 알았다.

       

       이 각도에선 보이지 않지만 저렇게 필사적으로 피할 정도면 보통 무서운 표정이 아니었으리라.

       

       뭐…아무리 그래도 엘리에게 지금 상황에 웃으라고 하는 건 너무 비인간적인 처사지.

       

       일단 어찌어찌 달래놨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판 대륙은 한번 문명이 리셋되어 많은 인구가 필요하기도 했고, 유일하게 남은 신이 사랑의 여신이라는 점도 있어서 남녀관계가 대체로 관대하고 자유롭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점욕이나 불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지구에서도 일부다처가 허용되던 과거라고 해서 부인들끼리의 질투가 없었던 건 아니잖은가.

       

       엘리 또한 마찬가지다. 조금 전의 배 코박죽으로 어찌어찌 안심시키긴 했지만, 눈앞에서 내가 리디아의 가슴을 만지는 게 정말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내가 멈칫하자 리디아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짐짓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중에. 엘리 선배가 없는 곳에서 만지게 해줄 테니까. 지금은 참아.”

       

       “네! 그런 거라면야 얼마든 참을 수 있죠.”

       

       “응. 착한 아이.”

       

       리디아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이제 가 볼게 엘리 선배. 요나 너도 내일 미궁 가야 하니까 일찍 자고.”

       

       “어…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당연하죠! 내일 봐요!”

       

       나와 엘리가 반사적으로 인사하자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그대로 요정과 은화 밖으로 빠져나가는 리디아.

       

       그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히히 웃다가 깨달았다.

       

       …지금 리디아가 굉장히 자연스럽게 공수표만 남발하고 튀지 않았나?

       

       “……”

       

       나한테 당한 엘리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카운터에 올라가 엘리의 잿빛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카운터에 신발자국 묻히지 말라고 혼났다.

       

       ***

       

       카운터에 묻은 신발 자국을 빡빡 닦은 뒤에야 올라온 방.

       

       침대에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지금 가챠 한번 질러버릴까….”

       

       슬쩍 소매치기만 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스케일이 커져 버렸다. 3분 천하였지만 덕분에 모은 금액이 상당하다.

       

       무려 14실버 78쿠퍼. 평소였다면 망설임 없이 10연챠를 돌렸을 것이다.

       

       4실버면 그래도 며칠은 버틸 수 있고, 내일 미궁에 들어가기도 하니 수입이 조금은 들어올 테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본의 아니게 엘리를 멘붕시켰더니, 문득 전당포에 맡긴 라이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5실버 50쿠퍼였던가. 돌아오는 길에는 리디아에게 붙잡힌 상태라 들를 수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혼자 샤샥 다녀올 수 있다.

       

       “…그래. 내가 힘도 없고, 돈도 없고, 집도 없지만 엘리는 있잖아.”

       

       나올지 안 나올지 불확실한 가챠보다는 당장 옆에 있는 엘리를 챙기는 쪽이 더 옳은 일이리라.

       

       그냥 내일 미궁 다녀와서 가져와도 되긴 하는데…솔직히 그 돈으로 또 가챠 돌릴 것 같네.

       

       난 내 능지를 믿는다.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바로 가챠에 탕진할 정도로 박살 난 능지라고 믿는다…!

       

       그런 이유로 마음을 굳히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저녁을 넘어 완전한 밤이 되자, 주점답게 한층 시끌벅적해진 요정과 은화. 조금 시간이 지난 덕에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은 엘리가 멍하니 가게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놀고먹는 한량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대충 앉아만 있어도 돈이 굴러들어 오는 구조를 완성한 능력자의 여유 같은 거겠지.

       

       부러워라. 나도 전생에는 최종적으로는 건물주가 되어 돈 상관없이 쓰고 싶은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예를 들면 머리만 있는 히로인이 메인인 다크 판타지라거나, 피독주 피어싱을 한 히로인이 나오는 사이버펑크 무협이라던가 말이다.

       

       물론 그 꿈은 가챠 폭사와, 원인 모를 폭발로 좌절됐지만 말이다.

       

       …솔직히 전생의 사인이 폭사라는 점이 참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왜 하필 폭사한 내게 가챠 능력이 주어지는 걸까. 어쩌면 사랑의 여신은 생각보다 성격이 나쁠지도 모르겠네.

       

       속으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엘리의 옆으로 다가갔다.

       

       “어…요, 요나니. 안 자고 뭐하러 내려왔어?”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 아무래도 조금 전의 일이 신경 쓰이나 보다. 리디아의 가슴 때문인지, 내 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없이 다가가 엘리의 꼬리를 끌어안았다. 털이 풍성한 덕에 안는 맛이 있단 말이지.

       

       처음에는 놀랐는지 막 잡은 생선처럼 펄떡거리던 꼬리였으나, 강하게 잡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얌전해졌다.

       

       풍성한 털에 얼굴을 파묻고 크게 숨을 들이켠 뒤에야 입을 열었다.

       

       “엘리 꼬리 냄새 맡고 싶어서 잠이 안 오지 뭐예요.”

       

       “읏!”

       

       가벼운 농담에도 움찔하는 엘리. 다만 예전처럼 순수하게 설렌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농담이고 잠깐 바람 쐬려고 내려왔어요. …근데 엘리를 보니 그 전에 잠깐 할 말이 생겼네요.”

       

       “뭐, 뭔데?”

       

       혼자 움찔거리는 엘리의 옆에 바짝 달라붙어 물었다.

       

       “엘리. 지금 무슨 생각 해요?”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정말요? 그런 것 치고는 반응이 수상쩍은데.”

       

       키득이며 엘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본래라면 꽤 멋있는 구도의 백허그가 되었겠지만….

       

       지금은 키 차이 때문에 그냥 엘리의 등에 얼굴을 파묻은 꼴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평소처럼 야한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 오직 서로의 체온을 나눌 뿐인 건전한 스킨십.

       

       가만히 그러고 있자니 빳빳하게 굳어있던 엘리의 몸이 천천히 풀어지기 시작한다.

       

       “혹시 기대했나요? 하긴. 제가 요즘 너무 들이대긴 했죠.”

       

       “뭐, 그런 감이 적잖이 있긴 했지.”

       

       애써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 실제로 알고 지낸 건 몇 개월이나 됐지만, 그동안 나간 진도보다 지난 몇 주 사이에 뺀 진도가 훨씬 빨랐으니까.

       

       “사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어요. 그전까지는 제가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최대한 몸을 아껴야 했거든요.”

       

       “지금도 아끼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음…아낀다는 말에서 조금 오해가 있었네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참는다에 가까웠어요.”

       

       엘리가 좋다. 그게 남녀 간의 사랑인지는 모르겠으나, 평범한 호의 수준을 뛰어넘은 애정을 품은 것은 사실이다.

       

       스킨십을 원하게 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심지어 역전된 정조 관념 덕에 상대가 거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참았다. 섣불리 관계를 진전시켰다가는 그대로 정체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엘리를 도와 요정과 은화를 운영하고, 언젠가는 아이를 가질 수도 있고, 어쩌면 여유가 생겨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분명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이 되겠지.

       

       …허나,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았으리라.

       

       이 세계가 정말 내 소설과 똑같은 설정을 공유하는 세상이라면 그리 순탄하게 굴러가지는 않을 테니까.

       

       그거 아는가.

       

       난 한 번도 일상물을 써본 적이 없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어떻게 사람이 하나도 안 죽는 이야기를 쓸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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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

EP.35





       어디선가 꺼낸 담요로 가슴을 가린 리디아를 향해 울부짖었다.


       


       “왜, 왜죠?! 왜 안 된다는 건가요 리디아 님!”


       


       “싫으니까.”


       


       “그러니까 왜요?! 리디아 님이 먼저 유혹했잖아요! 그 큼직한 젖탱이를 내놓고 다닌다는 건, 제가 만져도 아무 말 않겠다는 소리 아닌가요?!”


       


       “…이상해. 보통 이런 말은 여자가 남자 엉덩이 쓰다듬다가 경비대에 끌려와서 하는 말인데.”


       


       “알게 뭐에요! 만지게 해줘요! 만지게 해줘!”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팔다리를 대자로 뻗었다. 지금의 나이로도 살짝 아슬아슬한 비기의 준비 자세.


       


       받아라! 요나 데스빔! …아니, 요나 떼쓰기!


       


       “빼애애애애애애애액!!!”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시끄럽던 주점이 일순 조용해지며, 나한테 집중되는 시선.


       


       오늘은 얌전하게 전신 수영복을 입고 접객 중이던 종업원 형님들은 물론, 그들을 음흉하게 바라보던 손님들도 일제히 나를 바라본다.


       


       기겁한 엘리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 모른 사람인 척하고, 리디아가 황망한 얼굴로 딱딱하게 굳은 사이.


       


       이 틈을 타 원하는 목표를 재차 선언했다.


       


       “가슴 만지게 해줘요! 해줘! 해달란 말이에요! 삐에에에엑!!”


       


       이쯤 되자 미친놈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 되는 사람들.


       


       흥! 리디아의 가슴에 담긴 꿈과 희망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세상이 나쁜 거다. 난 나쁘지 않아.


       


       그렇게 수치심과 양심을 내다 팔며 팔다리를 허우적대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결국 리디아가 가볍게 양손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이제 일어나 요나.”


       


       “넹.”


       


       잽싸게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너무 충격받은 나머지 일단 지르긴 했는데…솔직히 나도 쪽팔리긴 했거든. 


       


       하지만 바닥을 나뒹굴며 떼쓰는 걸로 리디아의 가슴을 만질 수 있다면 확실하게 남는 장사다.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 보내자,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는 리디아.


       


       피곤해 보이는 그녀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손을 뻗었다.


       


       찰싹!


       


       그리고 손등을 얻어맞았다.


       


       “왜요?! 알겠다면서요!”


       


       “눈이 무서워.”


       


       “음해에요. 저처럼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또 어딨다고요!”


       


       “…요나 말고 엘리 선배의 눈이 무서워. 여차하면 날 죽일 것 같은데.”


       


       “아.”


       


       뒤를 돌아보자, 즉시 고개를 틀어 내 시선을 피하는 엘리. 어찌나 그 기세가 강렬했는지 목이 꺾이는 줄 알았다.


       


       이 각도에선 보이지 않지만 저렇게 필사적으로 피할 정도면 보통 무서운 표정이 아니었으리라.


       


       뭐…아무리 그래도 엘리에게 지금 상황에 웃으라고 하는 건 너무 비인간적인 처사지.


       


       일단 어찌어찌 달래놨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판 대륙은 한번 문명이 리셋되어 많은 인구가 필요하기도 했고, 유일하게 남은 신이 사랑의 여신이라는 점도 있어서 남녀관계가 대체로 관대하고 자유롭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점욕이나 불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지구에서도 일부다처가 허용되던 과거라고 해서 부인들끼리의 질투가 없었던 건 아니잖은가.


       


       엘리 또한 마찬가지다. 조금 전의 배 코박죽으로 어찌어찌 안심시키긴 했지만, 눈앞에서 내가 리디아의 가슴을 만지는 게 정말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내가 멈칫하자 리디아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짐짓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중에. 엘리 선배가 없는 곳에서 만지게 해줄 테니까. 지금은 참아.”


       


       “네! 그런 거라면야 얼마든 참을 수 있죠.”


       


       “응. 착한 아이.”


       


       리디아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이제 가 볼게 엘리 선배. 요나 너도 내일 미궁 가야 하니까 일찍 자고.”


       


       “어…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당연하죠! 내일 봐요!”


       


       나와 엘리가 반사적으로 인사하자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그대로 요정과 은화 밖으로 빠져나가는 리디아.


       


       그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히히 웃다가 깨달았다.


       


       …지금 리디아가 굉장히 자연스럽게 공수표만 남발하고 튀지 않았나?


       


       “……”


       


       나한테 당한 엘리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카운터에 올라가 엘리의 잿빛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카운터에 신발자국 묻히지 말라고 혼났다.


       


       ***


       


       카운터에 묻은 신발 자국을 빡빡 닦은 뒤에야 올라온 방.


       


       침대에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지금 가챠 한번 질러버릴까….”


       


       슬쩍 소매치기만 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스케일이 커져 버렸다. 3분 천하였지만 덕분에 모은 금액이 상당하다.


       


       무려 14실버 78쿠퍼. 평소였다면 망설임 없이 10연챠를 돌렸을 것이다.


       


       4실버면 그래도 며칠은 버틸 수 있고, 내일 미궁에 들어가기도 하니 수입이 조금은 들어올 테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본의 아니게 엘리를 멘붕시켰더니, 문득 전당포에 맡긴 라이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5실버 50쿠퍼였던가. 돌아오는 길에는 리디아에게 붙잡힌 상태라 들를 수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혼자 샤샥 다녀올 수 있다.


       


       “…그래. 내가 힘도 없고, 돈도 없고, 집도 없지만 엘리는 있잖아.”


       


       나올지 안 나올지 불확실한 가챠보다는 당장 옆에 있는 엘리를 챙기는 쪽이 더 옳은 일이리라.


       


       그냥 내일 미궁 다녀와서 가져와도 되긴 하는데…솔직히 그 돈으로 또 가챠 돌릴 것 같네.


       


       난 내 능지를 믿는다.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바로 가챠에 탕진할 정도로 박살 난 능지라고 믿는다…!


       


       그런 이유로 마음을 굳히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저녁을 넘어 완전한 밤이 되자, 주점답게 한층 시끌벅적해진 요정과 은화. 조금 시간이 지난 덕에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은 엘리가 멍하니 가게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놀고먹는 한량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대충 앉아만 있어도 돈이 굴러들어 오는 구조를 완성한 능력자의 여유 같은 거겠지.


       


       부러워라. 나도 전생에는 최종적으로는 건물주가 되어 돈 상관없이 쓰고 싶은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예를 들면 머리만 있는 히로인이 메인인 다크 판타지라거나, 피독주 피어싱을 한 히로인이 나오는 사이버펑크 무협이라던가 말이다.


       


       물론 그 꿈은 가챠 폭사와, 원인 모를 폭발로 좌절됐지만 말이다.


       


       …솔직히 전생의 사인이 폭사라는 점이 참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왜 하필 폭사한 내게 가챠 능력이 주어지는 걸까. 어쩌면 사랑의 여신은 생각보다 성격이 나쁠지도 모르겠네.


       


       속으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엘리의 옆으로 다가갔다.


       


       “어…요, 요나니. 안 자고 뭐하러 내려왔어?”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 아무래도 조금 전의 일이 신경 쓰이나 보다. 리디아의 가슴 때문인지, 내 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없이 다가가 엘리의 꼬리를 끌어안았다. 털이 풍성한 덕에 안는 맛이 있단 말이지.


       


       처음에는 놀랐는지 막 잡은 생선처럼 펄떡거리던 꼬리였으나, 강하게 잡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얌전해졌다.


       


       풍성한 털에 얼굴을 파묻고 크게 숨을 들이켠 뒤에야 입을 열었다.


       


       “엘리 꼬리 냄새 맡고 싶어서 잠이 안 오지 뭐예요.”


       


       “읏!”


       


       가벼운 농담에도 움찔하는 엘리. 다만 예전처럼 순수하게 설렌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농담이고 잠깐 바람 쐬려고 내려왔어요. …근데 엘리를 보니 그 전에 잠깐 할 말이 생겼네요.”


       


       “뭐, 뭔데?”


       


       혼자 움찔거리는 엘리의 옆에 바짝 달라붙어 물었다.


       


       “엘리. 지금 무슨 생각 해요?”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정말요? 그런 것 치고는 반응이 수상쩍은데.”


       


       키득이며 엘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본래라면 꽤 멋있는 구도의 백허그가 되었겠지만….


       


       지금은 키 차이 때문에 그냥 엘리의 등에 얼굴을 파묻은 꼴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평소처럼 야한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 오직 서로의 체온을 나눌 뿐인 건전한 스킨십.


       


       가만히 그러고 있자니 빳빳하게 굳어있던 엘리의 몸이 천천히 풀어지기 시작한다.


       


       “혹시 기대했나요? 하긴. 제가 요즘 너무 들이대긴 했죠.”


       


       “뭐, 그런 감이 적잖이 있긴 했지.”


       


       애써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 실제로 알고 지낸 건 몇 개월이나 됐지만, 그동안 나간 진도보다 지난 몇 주 사이에 뺀 진도가 훨씬 빨랐으니까.


       


       “사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어요. 그전까지는 제가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최대한 몸을 아껴야 했거든요.”


       


       “지금도 아끼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음…아낀다는 말에서 조금 오해가 있었네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참는다에 가까웠어요.”


       


       엘리가 좋다. 그게 남녀 간의 사랑인지는 모르겠으나, 평범한 호의 수준을 뛰어넘은 애정을 품은 것은 사실이다.


       


       스킨십을 원하게 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심지어 역전된 정조 관념 덕에 상대가 거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참았다. 섣불리 관계를 진전시켰다가는 그대로 정체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엘리를 도와 요정과 은화를 운영하고, 언젠가는 아이를 가질 수도 있고, 어쩌면 여유가 생겨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분명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이 되겠지.


       


       …허나,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았으리라.


       


       이 세계가 정말 내 소설과 똑같은 설정을 공유하는 세상이라면 그리 순탄하게 굴러가지는 않을 테니까.


       


       그거 아는가.


       


       난 한 번도 일상물을 써본 적이 없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어떻게 사람이 하나도 안 죽는 이야기를 쓸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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