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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

       가문끼리의 항쟁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

        경쟁자를 짓밟고 탑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마법사들의 갈망은 그들이 엮어온 마력의 총체가 피에 진하게 녹아들수록 강해진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더욱 정순한 마력을 발산하고 그 일부는 핏줄을 타고 내려와 후대에까지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무지 너머의 신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면, 비로소 ‘현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이었다.

       

        5년전, 백가의 서열 3위였던 프란츠 가문과 9위였던 운드라 가문은 공역의 소유권을 두고 치열한 마찰을 빚었다.

       

        트라팔가 호수.

        성수를 축성할 수 있을 정도의 순도 높은 담수를 무한히 공급받을 수 있는 천혜의 보고였다.

        조건은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호수의 가장 깊은 곳까지 마력을 흘려보내는 것.

        한때 프란츠 일가가 갖고 있던 소유권은 헤르헤 소롯이 실종된 이후 가문이 몰락하며 운드라에게로 넘어갔다.

       

        이러니 살살이가 가문의 원수이자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빈센트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살살(殺殺)!!!! 살(殺)!!!!

        “어허, 진정해.”

        — 제ㅂㅏㄹ 하ㄴ번 만 ㅈㅈㅣ르게 ㅎㅐ줘  ¡ㅇㅛㅇ¡

        “니가 그래봤자 하나도 바뀌는 게 없다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까.”

       

        안타깝게도 니플헤이르가 자신들의 핏줄을 공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면서 그들의 치세도 막을 내릴 예정이었다.

        비나는 통역을 맡은 정령사가 벌벌 떨 정도로 압도적인 마력을 뿜어내며 호수를 통째로 얼려 버렸다.

       

        옆에서 계속 잔소리 하던 크리스티나마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운드라의 소가주가 테러를 저지르면서까지 열차가 공역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했던 이유가 있었던 셈.

        허나 그는 단순히 자신의 영토를 지켜내는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큰 실수를 범했다.

       

        “살살아, 잘 들어. 원래 세상 일의 대부분은 안 들키면 범죄가 아니야.”

        — 살?

        “가면을 쓸 거라면 처음부터 벗을 생각을 안했어야 된다는 소리지.”

       

        나는 빈센트가 ‘메테오는물마법’ 계정으로 쓴 글을 모조리 살펴봤다.

        갤러리에 대해 잘 모르던 백가의 마법사들을 상대로 자신이 주딱이라며 대놓고 사칭하던 내용이 잔뜩 있었다.

        비어있던 꿀벌 게시판을 자신이 만들었다느니, 일을 제대로 완수하면 너희에게 완장의 직위를 주겠다느니.

       

        그 중에서도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내가 쳐놓은 분탕질을 마치 자신이 해온 것처럼 포장한 일이었다.

       

        ====

        — 사랑받는손주 : 그럼 이 ‘ㅇㅇ(1.1)’이랑 ‘초전도체은발미소녀’ 계정도 다 당신이란 말이야?

        — 메테오는물마법 : 바로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도록 여러 개의 계정들을 돌려가며 사용하죠. 여러분들과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 사랑받는손주 : 근데 왜 새벽에 갤러리에 ‘글레시아는 원래 임신이 잘 안 돼? ㅠㅠ’ 같은 글을 쓴 거야?

        — 메테오는물마법 : 어, 음 그건…….

        — 사랑받는손주 : ‘갤러리 분탕, 파딱 책임은 없나?’라는 제목을 달아놓고 본문에선 뜬금없이 점심 메뉴를 추천받은 이유는 뭐야? 이것도 작전이야?

        — 메테오는물마법 : …….

        — 사랑받는손주 : 리더?

        ====

       

        이쪽은 고닉 하나를 사칭할 때도 동선과 활동시간, 말투, 취미, 방어기재와 긁히는 포인트까지 정성을 들여가며 분석한다.

        가면을 쓰고 분탕을 치기로 작정한 날에는 파딱들에게도 잡히지 않도록 신고 게시판에 벨튀를 해가며 철저하게 부재중인지를 확인한다.

       

        하지만 모든 작전을 완벽하게 수행하더라도 절대 그게 나라는 사실을 대놓고 자랑하지 못하는데…….

        녀석은 노력은 커녕 정체를 감추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음에도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우러름 받으며 가장 맛있는 단물만 쏙쏙 빼먹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살살아. 이젠 너라도 갤러리를 위해 필요악을 자처하는 내 노고를 알아주겠지?”

        — 주ㄷ닥…….

        “왜? 나중에 너도 같이 해볼래?”

        — 겔으ㄹ 우!해 주ㄱ어

        “어어, 자꾸 찌르려고 하지 말라니까.”

       

        나는 갑자기 칼끝을 이쪽으로 돌리는 살살이를 검집에 넣으며 비나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크리스티나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마력을 갈무리하는 중이었다.

       

        “비나! 내 말 무시하지 말라니까? 누가 그렇게 멋대로 혼사를 결정하래?”

        “혼사라뇨? 전 관리인에게 마법을 주겠다 말했을 뿐이에요.”

        “그게 그거랑 같은 뜻이라고!”

        “사감은 믿을만한 사람이니 걱정할 거 없어요.”

        “둘이 무슨 약속이라도 했어?”

        “메테오가 얼음마법이라는 간증을 받았어요.”

        “그딴 걸로 사람을 판단하지…… 비나! 어디 가아!”

       

        순혈 가문에게 마법을 내어주는 것이 곧 혼인을 의미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들이 빚어낸 모든 마법의 근간을 이루는 고유술식.

        그것을 외부인에게는 절대 공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니플헤이르의 순혈 마법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전에 사용인 자리를 제안했던 것도 그렇고, 호감이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수줍은 짝사랑과 애착가는 애완동물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 것 같긴 한데…… 그 간극이 트라팔가 호수만큼 깊었다.

       

        “여기 겉옷입니다. 다 끝나셨나요?”

        “네, 이제 이곳에 온 목적은 하나만 남았네요. 늦어도 내일 밤에 출발하는 막차는 탈 수 있을 거에요.”

        “조사 위원회 말이군요. 그에 관해서 말입니다만…….”

       

        여하튼 그녀가 나를 공역에까지 데려와준 덕분에 주딱을 사칭하는 사악한 마법사를 혼내줄 수 있게 되었다.

        살살이는 심장을 찌르고 싶어하는 모양이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완벽한 복수가 될 수 없다.

        그렇게 주딱이 되고 싶다면, 기꺼이 만들어 줄 용의가 있었다.

       

        나는 비나에게 조심스럽게 다음 회의에 빈객으로 참석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

       

        “그럼 과반 이상의 동의에 따라, 조사 위원회는 앞으로 마탑에서 마족에 대한 사건을 전담할 기구를 설립할 것을 의결합니다.”

       

        “원소학파의 칠현자이신 밀로네 님의 뜻을 기려 해당 조직의 이름은 ‘극채색’으로 명명하며, 마족의 흔적이 발견될 시 탑의 어디라도 ‘급행’을 이용할 권한이 부여될 것입니다.”

       

        “초대 의장은 순혈 마법사이신 비나 네타니아 님께서 사사(辭謝)하셨기에 다음 후보인 백가의 서열 3위 운드라의…….”

       

        마탑에 마족의 침공만을 전담하는 조직이 신설되었다.

        흑마법사 집단 ‘검은별’의 발족 때문에 정보부가 세워진 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극채색의 중심은 백가의 상위 서열인 운드라 가문을 중심으로 한 원소학파 마법사들이었다.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의장으로 추대된 빈센트에게 많은 축하의 말이 쏟아졌다.

       

        “축하드립니다, 빈센트 님.”

        “고맙네.”

        “이걸로 순혈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시겠군요!”

        “하하, 다음 세대 쯤에는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칭찬을 받는 와중에도 그의 미소는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아침 트라팔가 호수의 소유권이 니플헤이르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머리를 숙였는데 기어코 이쪽의 사다리를 걷어차다니.

       

        가문을 합치게 되면 서로 반목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도 비나 네타니아는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에 둔 남자가 있는 듯한 태도가 더욱 열받았다.

       

        ‘이놈들이 시키는대로만 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거늘……!’

       

        빈센트는 위치노트를 꺼내 꿀벌 게시판을 확인했다.

       

        ====

        [노란 꽃가루 가득 묻힌 꿀벌이 호박꽃 안에서 빠져 나오려고 바동대다 지쳐서 색색거리는 움짤]

       

        (움짤)

       

        — 헉헉, 허억, 허어어억……!

        — 와아앙 우와아앙 부와아아아앙!!

        — 호로로로로롱 햐아아아아앙

        — 위에 애들 다 뭐임? 저게 다 뭐라고 하는 거임?

        — 하, 씨발 미치겠다…… 저 엉덩이에 와바바밧 얼굴 파묻고 싶다

        ㄴ 님 그러다 쏘여요

        ====

        ====

        [요 며칠간 눈팅하고 나서 드는 생각인데 여긴 순 인간 실격인 새끼들밖에 없네]

       

        아르르르…… 컹컹!!

       

        — 짐승 합격!

        — 크르릉! 크르르륵……!

        — 물들었냐 ㅅㅂ

         ㄴ 자세히 보다 보면 좀 귀엽긴 해

         ㄴ 자세히 보면 더 안 귀여운데?

         ㄴ 응 아니야~ 겹눈이랑 빨대처럼 낼름거리는 혓바닥이랑 두 갈래로 갈라진 발톱 끝 큐티클 반짝이는데 기회 되면 우리 집에도, 우리, 우, 우아아아아앙!!!

         ㄴ 님

         ㄴ 님아

        ====

        ====

        [왜 갑자기 인기 게시판 순위에 올랐나 했더니 주딱이 프로필 바꿨구나]

       

        매번 회색 배경이다가 갑자기 꿀벌 사진이네

        근데 여기서 활동한 내역이라도 있음?

       

        — 몰루?

        — 있는 거 같던데? 기존부터 활동하던 고닉들이 옛날에 쓴 글들 올리더라

         ㄴ 그것도 깡계 아님?

         ㄴ 모르지 자기 말로는 주딱 맞다고 하고 다니던데

        — 우리 주딱이 취향도 참 독특해…….

         ㄴ 갤러리를 이끌어가기 위해선 심연에 물들어야 하는 법

         ㄴ 우아아아앙~ 부아아아앙~!!!

         ㄴ 아오, 꿀벌단들 

        ====

       

        하루에 글도 몇 개 올라오지 않던 버려진 게시판에 갑자기 유저들이 몰려와 놀고 있었다.

        주딱이 활동하던 곳이라는 소문이 퍼져서였다.

        대부분 정보부에 의해 잡혀간 듯 했지만, 어째서인지 아직 남아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익숙한 닉네임들도 있었다.

       

        “쯧, 됐어. 차라리 다음번에 마족과 엮어서…… 뭐야 이건?”

       

        그래도 마족 전담기구의 수장이 되었으니, 좀 더 확실히 글레시아를 부숴버리려던 그의 눈에 이상한 글이 하나 보였다.

       

        ====

        살살살이

        [꿀벌 게시판에서 활동하던 주딱의 실체를 저격합니다!!]

       

        (사진)

       

        이름 빈센트 에본 데 운드라

       

        경쟁 가문의 자제들을 공역으로 유인해 담궈 버렸어요!

       

        이번 열차 테러에도 가담했다는 의혹이 있어요!

       

        제가 믿을만한 루트로 확인한 정보에요!

       

        — 아오, 주딱 또 너야?

        — 시즌 4572814325호 주딱 저격

        — 응 안 믿어~

        — 그래서 증거 있음?

        — 거 저격을 하고 싶으면 혼자하지 왜 주딱을 끌어들이냐

        ====

       

        순간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지만, 이내 진정했다.

        이제 와서 백가의 마법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갤러리의 주인 행세를 했던 일 따위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꿀벌 게시판에서 활동할 때부터 신상을 비롯해 운드라 가문이라는 증거는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어느 쪽이든 자신과의 연결고리는 찾을 수는 없을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갤러리에서 저런 식으로 주딱의 정체에 유명인을 덧붙이는 저격은 지금껏 수도 없이 있어왔다.

       

        ‘다른 가문의 생존자인가? 이목을 많이 끌기 위해 여기에 올렸나보군.’

       

        원한 살 곳이 많다보니 당장 짚이는 데가 한 둘이 아니었다.

        우선 여기서 나가는대로 노트부터 없애야겠다.

       

        그런데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조금 전까지 시끌시끌하던 회의실에는 정적이 감돌고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빈센트 님……?”

        “응?”

       

        옆에 있던 마법사의 말을 듣고 그는 황급히 노트를 확인했다.

        지금껏 어떤 저격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던 갤러리의 관리자가, 글을 올린 것이었다.

       

        ====

        관리자

        [관리자에 대한 이번 저격에 관한 입장입니다]

       

       흠…… 들켰네

        ====

       

       

       주딱의 한마디는 빈센트가 극강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채신기술의 힘을 빌어 어여쁜 아가씨 마리엘의 표지가 나왔습니다!

    전체 이용가라 수위 조절이 참 어색한데 애정하는 히로인중 하나랍니다.

    오늘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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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

[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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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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