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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

       다소간의 소란 끝에 정문에서의 접수는 모두 완료되었다.

       

       허위로 지원서를 작성한 사람들 털어내고 외견상 부적격인 사람들 털어내고. 예를 들면 사지가 멀쩡하지 않거나 글자를 모른다거나 하는 그런 것들.

       

       그렇게 해서 대강당에 모인 인원들을 눈대중으로 세어 보니 처음 지원인원의 1/3 정도가 증발해서 약 이백 명 정도.

       

       저기서 체력측정으로 절반 정도를 떨친다고 하면 대략 백 명 정도가 오전 내로 또 사라지겠군.

       

       남은 애들로 오늘 오후와 내일 동안 평가해서 하나라도 과락이 나면 그 자리에서 퇴소를 족족 시킬 것이고.

       

       아마 예상키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건 세 명 남짓일 것이다. 전투학과 쪽 기준을 개빡세게 해놨거든.

       

       키르린은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했지만 이스메라가 승부욕이 붙어서 자기네들 이론평가도 엄청나게 어렵게 만들어 버렸고.

       

       졸업반에 바로 편입되어 당장 내년에 정식으로 아카데미 졸업장을 따고 관련 기관에 들어갈 수 있는 엄청난 특혜.

       

       게다가 올해 처음 시행하느니만큼 황성에서도 예의주시할 터.

       

       그러니 자질 미달자들은 과감하게 솎아내고 정 마음에 드는 애가 없으면 아예 선발 자체를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어중간한 애 뽑아서 황성에 꼬투리 잡히고 키르린의 경력에 흠집내면 그게 나비효과가 되어 내가 교장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거든.

       

       “교장님. 이제 슬슬 시작하시죠.”

       “그래야지.”

       

       키르린이 단상으로 나아가 이백여 명의 지원자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카데미 교장 키르린 네마라입니다.”

       “네마라…? 그 다크엘프 일족 네마라?”

       

       키르린이 자기소개를 하자 지원자들이 웅성거렸다.

       

       “우리 특수임무 아카데미에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쪼록 좋은 성과를 거두시기를 바라며 선발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키르린에 이어 이스메라가 선발의 전반적인 절차와 주의사항 등을 안내했다.

       

       단상에 선 이스메라는 솔직히 말하자면, 키르린보다 훨씬 더 교장처럼 보였다.

       

       순혈엘프 특유의 우아하고 기품 넘치는 외양과 분위기. 나긋나긋 또렷한 목소리와 조리있는 언행.

       

       거기다 현생의 박사 이상 학력인 고등석사 출신.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다.

       

       저러니 키르린을 극도로 싫어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아니다. 솔직히 내가 이스메라라도 그럴 것 같아.

       

       당장 이스메라가 교장이 된다면 우리 아카데미는 훨씬 더 발전할 거다.

       

       하지만 어쩌겠나. 황제가 개입한 이상 순수한 실력으로 승부를 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판이 되어버렸는 걸.

       

       전쟁영웅에 제국 최고요직 중 하나인 안보실장 2황녀도 뒤집지 못한 판을 고작 고등석사따리 이스메라 혼자서는 절대 무리지.

       

       찬찬히 지원자들을 둘러보던 나는 또 한번 그 핑크색 머리칼을 지닌 여자애를 발견했다.

       

       어찌나 튀는 색인지 곧바로 시야에 들어왔고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자세히 여자애의 얼굴을 관찰할 수 있었다.

       

       지금 여자애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꼬리가 처진 눈동자는 머리칼과 비슷한 분홍색. 입가에 걸린 미소는 굉장히 여유로워서 누가 보면 지원자가 아니라 이미 재학중인 학생처럼 보인다.

       

       흰 피부에 가녀린 목선으로 봐서는 용병일을 해온 몸이 아닌데.

       

       하지만 분명히 아까의 그 무장은 레블랑 용병대의 것. 역시 마법사 같은 간접전투직능인 걸까.

       

       그것도 그것대로 또 이상하긴 한데…. 마법사가 대체 왜 이런 곳에 지원을 해?

       

       좀 더 마법을 배우고 싶으면 마탑에 갈 것이고 마법으로 제대로 돈을 벌 요량이라면 얼마든지 갈 곳이 천지란 말이지.

       

       그럼 정령사나 힐러계열이려나. 그것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각각의 직능은 만화나 게임의 클리셰와 비슷한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데 쟤는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아.

       

       보면 볼수록 아리송하네….

       

       그때 갑자기 여자애가 마치 내 시선을 느낀 것마냥 이쪽을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애는 잠시 동안 나를 빤히 보다가 다시 이스메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 # # #

       

       

       체력측정이 시작되었다. 장소는 대연병장.

       

       우리 아카데미 정중앙에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평지로 얼마나 넓은지 기병돌격 실습을 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

       

       여기서 지원자들은 다양한 종목의 체력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다.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대연병장 외곽을 크게 도는 달리기 측정.

       

       현장의 요원들은 지구력이 뛰어나야 한다. 지구력이 있어야 쉽게 지치지 않고 쉽게 지치지 않아야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요원의 임무 특성상 홀로 위험한 지역에 들어갔다가 아무런 지원 없이 또 홀로 안전구역까지 도피 및 탈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비일비재.

       

       이럴 때에는 쉬지 않고 걷고 달릴 수 있는 지구력이 필수 중의 필수다.

       

       전투학과 교수와 조교들에 의해 체력측정이 시작되었다.

       

       체력측정은 각 항목별로 과락 기준이 정해져 있어서 단 한 가지 항목이라도 미달이면 그 즉시 탈락으로 간주.

       

       때문에 마지막 단계인 오래달리기까지 살아남은 지원자는 최초 이백 명에서 백이십 명으로 순식간에 40퍼센트가 감소했다.

       

       “이제부터 오래달리기를 할 텐데,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파합니다.”

       

       웨이버가 지원자들에게 안전과 관련된 것들을 교육하는 동안 나는 지원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리고 거기서도 또 그 핑크색 여자애를 발견할 수 있었다. 탈락을 면한 몇 명의 레블랑 용병 출신 애들과 함께였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그래도 기본적인 근력과 근지구력이 수준 이상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확실히 마법사는 아니다. 마법사는 평생 공부를 해도 모자란 직업이라 통상 오렌디처럼 신체능력이 떨어지는 편이지.

       

       정말로 용병인 건가.

       

       뭐… 전장에서 남자 못지 않은 기량을 발휘하는 여자들도 많이 봐왔으니 아주 이상한 건 아니긴 한데….

       

       사실 저 애 말고도 다른 여자애들도 많이 있는데 유독 쟤한테 자꾸 시선이 가는 건 저 말도 안 되는 색깔의 머리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보고 있으려니 이번에도 여자애는 돌연 고개를 들어 웨이버 뒤에 서있는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 자주 시선을 마주치는데.

       

       “그럼 모두 출발선에 서세요!”

       

       지원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정렬하자 웨이버가 호각을 날카롭게 불었다.

       

       “뭐야, 저건?”

       

       우르르 출발하는 지원자들을 뚫고 핑크색 여자애가 엄청난 속도로 선두를 앞지르는 것이 아닌가?

       

       처음부터 저렇게 달렸다간 도중에 지칠 텐데 괜찮은 건가.

       

       “무리하는군요.”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웨이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래달리기는 체력안배가 중요한데 말입니다.”

       “쟤, 보니까 레블랑 소속인 것 같던데 혹시 아는 거 있냐?”

       “레블랑이면 유명한 대형 용병대 아닙니까? 저 여자애가 거기 소속이라고요? 설마요.”

       “아니야. 무장도 그렇고 다른 레블랑 용병들이랑 계속 같이 다녔어. 혹시 레블랑 용병대장의 딸이나 되는 걸까?”

       “글쎄요. 그 사람한테 딸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미 반 바퀴나 앞서 나가는 핑크색 여자애를 보던 웨이버가 손가락을 튕겼다.

       

       “어쩌면 레블랑 소속이 아니라 레블랑 친구들을 고용한 것 아닐까 싶은데요?”

       “경호원으로 말이지?”

       

       작위가 없어 사병대를 보유하지 못하는 평민 갑부들 중에 종종 용병을 장기고용해 사병대처럼 쓰는 경우가 있지.

       

       아니면 웨이버의 추측처럼 단기간 경호 목적으로 돈을 주고 부리는 경우도 있고.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거라 생각하면 앞뒤가 맞습니다. 혹시나 선발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 있으니 경호용병들도 지원자 명목으로 따라 들어온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러네. 네 말이 일리가 있다.”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미 여자애는 지원자의 꼴찌를 따라잡는 중. 정말 엄청나게 빠르다.

       

       과연 이 넓은 연병장을 저 페이스대로 스무 바퀴를 돌 수 있을까 싶네.

       

       그리고 약 한 시간 후.

       

       놀랍게도 다른 지원자들을 몇 바퀴나 제친 여자애가 가장 먼저 결승선에 도달했다.

       

       땀을 조금 흘리기는 했지만 숨은 거의 차지 않아 보이는 게 체력이 굉장히 좋은 모양.

       

       “수고했어요. 달리기를 아주 잘하는군요?”

       

       웃으며 말을 걸자 여자애가 다소 짓궂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봤다.

       

       “좀 해요.”

       “그 자신감 좋아요. 하지만 체력측정은 가장 첫 번째 관문이고 이후로도 여러 평가들이 남아 있으니 최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도록 합시다.”

       “명심하죠.”

       

       딱히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네. 웨이버 말대로 어디 돈 좀 있는 집안의 공무원 되고 싶은 딸인 듯하다.

       

       여자애가 결승선을 통과하고 삼십 분이 지나서부터 후발주자들이 차례로 도착하기 시작했다.

       

       열이면 열 결승선을 지나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토하고 난리도 아니다.

       

       의무지원을 나온 마야사제가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며 신성치료를 실시했다.

       

       체력측정을 통과한 인원은 모두 육십 명.

       

       처음 이백 명이 와서 접수처에서 백이십 명이 되고 거기서 또 체력측정으로 육십 명이 됐다.

       

       첫 번째 평가가 겨우 끝났을 뿐인데 최초 지원자에서 무려 칠십 퍼센트가 탈락한 것이다.

       

       결국 지원자 대부분이 우리 기준에 미달하는 허수였고 이제부터가 진짜 평가 시작이다.

       

       과연 내일 오후에 최종적으로 얼마나 남을지 궁금하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기, 쓰러져 웩웩대는 지원자들 너머에 핑크색 여자애가 허리에 손을 얹고 삐딱하게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받아쳤지만 여자애도 딱히 피할 생각이 없는듯 눈싸움이라도 할 것마냥 응시.

       

       몇 번이나 서로 눈이 마주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대놓고 저렇게 쳐다보고 있네.

       

       “수석교수님. 오후 평가 관련으로 잠깐 회의가 있답니다.”

       

       그때 막 조교 한 명이 다가와 말하기에 여자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본청으로 향했다.

       

       가면서 뒤를 보니 아직도 여자애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에피소드 소제목 변경

    소설이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올랐으니 이제부터는 에피소드별로 진득하게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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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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