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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2

    <352 – 각오의 무게>

     

    ‘이 정도였나.’

     

    루소의 다리가 떨렸다.

    잠깐의 교전으로 피투성이가 된 다리에 힐링포션을 부었지만 다리의 떨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근육이 입은 부상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통이 신경을 마구 건드리기 때문이다.

     

    ‘수명을 깎는 각오로도 진정한 천재란 넘을 수 없는 수준이었단 말인가?’

     

    지금이라면 알 것 같았다.

    암흑마나라는 극독을 받아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재단의 유혹에 넘어가던 열등생들이.

    루소의 인생은 치열하지 않았다.

    적어도 2학년을 마치고 3학년 진급시험을 치렀을 당시의 그는 그랬다.

    그때의 그에게는 수명을 바칠 각오 따윈 없었다.

    현실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꿈은 달콤했다.

    휴학 동안에 실력을 키워서 재도전하면 진급에 성공할 수 있어.

    그러면 100배 높은 금액으로 진급자격증을 사지 않아도 진급할 수 있어.

    뒤처졌지만 끝이 아니야.

    스스로를 위로하는 수많은 변명은 밑바닥까지 처박힌 자신을 돌아보며 사라졌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분루를 참지 못하며 아카데미를 떠나간 퇴학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실감했다.

    다음은 자신의 차례가 될 수 있다고.

    그는 낙오자에 불과하다고.

    고참교관의 충고는 결정타였다.

     

    -멍청한 녀석. 남들은 바보라서 몇 년이나 꿇고도 진급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냐? 진급시험의 난이도가 어째서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첫 진급시험도 탈락한 주제에 난이도가 오른 두 번째 진급시험을 성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세 번째도, 네 번째도 마찬가지다.

    25년.

    계산만으로도 막막한 시간을 인내하며 포인트를 버는 것이 유일한 길이 되었다.

    멀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좁다.

    한 발만 엇나가도 추락할 것처럼.

     

    ‘버틸 수 있을까? 25년을.’

     

    재능이 있었다면.

    포인트를 대신할 돈이 있었다면.

    기연을 만나 재능과 포인트를 대신할 수 있었다면.

    하루하루 쌓여가는 무의미한 가정들.

    희망조차 죽어가던 어느 날.

    소녀는 다가왔다.

     

    -교관님. 제 사업을 도와주시면 포인트를 챙겨드릴 수 있는데… 구미가 당기시나요?

     

    옳지 못한 방법으로 벌어들이는 포인트를 나누어 받더라도, 불의를 눈감으면 가혹할 정도로 긴 인내의 시간이 대폭 줄어든다.

    이것을 기연이라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 기연인가.

     

    “계약서를 찢더라도 이체는 해드릴 거예요!”

    “거짓말이면 수명만 쓰고 버려지겠죠.”

    “정말이에요!”

    “사기꾼들이 왜 계약의 신을 믿는지 알아요? 제 3자에 의해 찢어진 계약서는 효력이 사라지기 때문이에요. 힘없는 사람의 계약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크윽…”

     

    억울했다.

    이제야 각오를 다졌는데.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래, 처음으로 지금이라면 진급시험을 합격할 수 있을 실력을 발휘했는데.

    저 잔인한 아이는 그 시도 자체마저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포인트가 없는 희생 따위, 아무 의미도 없다.

    계약이 없는 카멜라 따위, 결코 믿을 수 없다.

    계약을 하고도 남을 속이기만 하는 여자에게 계약조차 없다면 악어의 입에 손을 넣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카멜라가 아주 인내심이 좋고 특별히 상냥한 기분이 된다면 이빨을 닫지 않겠지.

    그가 보아온 카멜라는 결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측근들조차 계약서로 이용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기저에 깔려있다.

     

    ‘잡초는 꽃을 피워도 결국 잡초란 말인가?’

     

    가능성이 멀어진다.

    미래가 다시금 닫힌다.

    써버린 시간은 지나가고 남은 시간은 줄어든다.

     

    “웃기지 말아요. 당신, 저라는 사람을 어디까지 무시하는 거죠?”

     

    절망에 빠진 루소의 귓가에 이를 악문 카멜라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렸다.

     

    “계약의 인의 주인으로 명하니, 루소와의 계약을 강제로 해제한다!”

    “아앗! 말도 안 돼. 여기서 이중억까가!?”

    “루소. 이걸로 저는 멋대로 계약을 해제한 대가로 위약금을 지불해야만 해요.”

    “너…!”

    “그래요. 계약은 끊어졌지만 역으로 위약금이라는 계약이 존재하죠. 이건 당신의 희생에 제가 보이는 선의예요.”

    “위약금은 진급시험에 필요한 모든 포인트였을 텐데. 어째서 그런 무모한 짓을!”

     

    카멜라가 오크노디만큼이나 루소 또한 밉다며 새촘하게 노려봤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너… 우는 거냐?”

    “알고 있어요. 펫 계약에 조종당하는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는. 강제로 몸을 조종당해도 결코 최선을 다해, 전력을 다해 싸울 의무는 없다는 것을.”

     

    강제하는 계약의 맹점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수명까지 걸어가면서 싸운 그 진심마저 제가 배신하리라 생각했나요?”

     

    사람을 믿지 못해 계약을 이용했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멀어진 사람과의 거리에 더욱 사람에게 냉정해질 수밖에 없었던 카멜라.

     

    “부모와 친구, 어린 시절의 제 주변을 둘러싼 모두에게 배신당한 뒤로 제 세계에 타인에 대한 신뢰는 없었어요. 가장 친밀한 관계조차 계약이 없다면 얼마나 허망한지 알 수 있었죠.”

     

    배신에 치를 떨던 여자는 살아생전 그 누구에게도 받지 못한 신뢰감을 느꼈다.

    어쩌면 그것은 펫 계약서라는 사람의 마음을 조롱하는 장치로 연인들을 가지고 놀았던 카멜라가 추구했던 진심일지도 몰랐다.

    이런 계약이라도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누군가를 가지고 싶다고.

    스스로도 몰랐던 철없는 생각.

    내면의 여린 마음을, 본인조차 기대하지 않고 버려진 채 웅크렸던 슬픔을 루소는 목숨을 깎는 사투로 꿰뚫어버린 것이다.

     

    “이건 계약이에요. 당신의 성실함에 바치는 저의 일방적인 위약금으로 맺어진 계약!!”

     

    당신은 나를 신뢰했기에 목숨을 걸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당신을 신뢰하여 위약금을 걸겠다.

    그 대가를 받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목숨을 바쳤던 루소가 그것을 각오한 것처럼.

     

    투두둑.

     

    파편에 긁힌 팔뚝 위로 핏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피보다 많은 땀이 볼 위를 가로질렀다.

    그래도, 루소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루소의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오크노디의 얼굴에 진심으로 당황이 어렸다.

     

    “누구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목적이 아무리 부당하다 한들, 이런 분에 넘치는 계약은 처음으로 받아보는 정당한 대가였지.”

     

    루소가 카멜라의 처음을 가져갔다면 카멜라 또한 루소의 처음을 가져갔다.

    처음을 주고받은 남녀의 신뢰는 가볍지 않다.

     

    “25년이다.”

     

    깨진 타일 아래, 자동복구 마력회로가 새겨진 바닥이 세차게 진동했다.

     

    “학생회조차 나 같은 약자에게 이만한 신의와 성실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한 번쯤은 괜찮겠지. 자신의 인생에도 목숨을 걸지 못했던 겁쟁이가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도.”

     

    며칠에서 몇 주.

    그런 깔짝거리는 힘이 아니다.

    수개월에서 수년.

    그만한 출력으로 수명을 25년 치까지 태운다.

    6시간을 버티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카멜라가 보인 25년 치의 신뢰.

    그것을 갚기 위해 루소는 오늘 이 자리에서 25년의 수명을 태워 오크노디를 격퇴하기로 진심으로 다짐한 것이다.

    그 무거운 각오가 루소의 돌진에 힘을 실었다.

     

    <폭심결>

    <3중 폭발 – 전신증강>

     

    세차게 질주하는 심장의 피가 뇌의 사고속도를 가속한다.

    팔이나 다리, 신체 말단의 순간적인 강화와 이를 보조하고자 전신으로 부담하는 데미지 따위가 아니다.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기관.

    심장과 뇌를 건드린다.

    되는대로 살아왔기에 그리 깨끗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마저도 잃는다면 유일한 밑천인 자신의 몸과 건강, 내일마저 잃을 수 있는 혈관과 마나회로를.

     

    쾅!

     

    더 이상 가속잔상검은 통하지 않았다.

    분신을 쏘아 보내는 모든 순간을 사진의 프레임 단위로 찍어내듯이 관찰하는 뇌의 기능을, 한계를 넘어선 집중력을 속일 수 없었기에.

    밀려난 오크노디가 발을 디딘 벽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옆방에서 벽에 귀를 대고 엿듣던 얼간이가 잔해와 함께 쓰러졌다.

     

    “!!”

     

    사고다.

    그것은 루소와 오크노디, 그리고 카멜라와 현장에서 휘말린 얼간이까지 모두가 예상치 못한 상황임이 틀림없었다.

    루소는 각오를 증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걸 각오였다.

    지금 이 순간, 오크노디에게 공격을 이어나가는 행위는 저 얼간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중상을, 그리고 높은 확률로 확실한 죽음을 꽂아 넣는 짓이 된다.

     

    -1학년은 건드리지 마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힘들게 번 포인트를 전부 날려먹고 싶지 않다면.

     

    고참교관의 경고가 일순간 떠올랐다.

     

    “아, 아앗…”

     

    멍청한 얼굴로 바닥을 구르며 허우적거리는 얼간이의 한심한 몰골.

     

    ‘저것을… 내가 죽인다고?’

     

    이건 아니다.

    이 싸움에는 25년이 걸려있지만 일선을 넘는 순간 찾아오는 것은 평생의 후회가 된다.

    느슨하게 풀어지는 근육.

    억울함에 경련하는 눈가.

    그렇다고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무리하게 끌어낸 근육이 신체내부에 더한 충격을 준다.

    쏟아내야 해.

    루소는 다리를 뻗었다.

    생애 가장 큰 고양과 절망이 뒤섞인 일격을, 오크노디가 아닌 창밖을 향해서.

     

    서걱.

     

    핏빛이 뒤섞인 새빨간 투기.

    그것은 흔히 말하는 검기방출과 같은 경지였다.

    몇 번을 노력해도 각력을 강화하고 무기와 동등한 선에 서는데 그쳤던 <무투가>의 한계를.

    강철을 베는 <검기>나 <마나코팅>의 경지에, 그리고 그를 한 단계 뛰어넘은 검기사출의 경지에 담았다.

     

    <윙 커터>

     

    다중보안술식이 일격에 깔끔하게 절단되어 떨어져나간다.

    창밖의 나무가 깔끔하게 양단되는 모습에 반대쪽 벽에 붙어서 두려움에 떨던 얼간이의 단체실 룸메이트들이 일제히 입을 쩍 벌렸다.

     

    “어라? 아까까지만 해도 결계가…”

    “회수했다. 결계에 동원할 한 줌의 힘까지.”

     

    루소의 주먹이 벽을 후려쳤다.

    쿵.

    벽을 타고 흐르는 진동에 모두가 깜짝 놀랐지만 그의 눈에 타고 흐르는 눈물이 말문을 막았다.

     

    “그 정도의 진심이었다. 그래서는 안 됐었는데.”

     

    결계를 유지했더라면 외부공간과 격리된 환경 속에서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 텐데.

    순간의 오판에서 비롯된 실수는 루소에게 뼈저린 후회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가 몰랐던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만이 아니었으니.

     

    “누구 멋대로 다 끝난 것처럼 굴어요?”

     

    휙. 오크노디가 던진 물건을 받아낸 루소.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포션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수작이지? 같잖은 동정이라면…”

    “흥. 멍청한 소리 말아요. 고인물의 체면을 구겨놓고 순순히 끝날 줄 알았다면 오산이에요.”

    “…뭐하자는 거지?”

    “마셔요. 싱에게 준 것만큼의 상등품은 아니어도 인체기혈을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녀석이니까.”

    “적이었을 네가 남 좋을 일을 한다고. 지금 그걸 믿으라는 거냐?”

    “믿기 싫어요? 그럼 믿게 해드릴게요. 그거 마시고 다시 싸우지 않으면 전 지금부터 카멜라를 때릴 거예요. 죽지는 않아도 한 달 정도는 강의를 듣지 못할 정도로, 치유사도 손쓸 수 없는 심한 방식으로.”

     

    그래도 안 마실 거예요?

    오크노디의 도발에 루소가 다시금 포션을 내려다봤다.

     

    “그만둬요! 정말로 그런 짓을 한다면 오크노디에게도 손해이고, 결계가 해제되었으니 어차피 사감과 교관들이 올 거라고요!”

     

    카멜라의 다급한 외침이 루소의 갈 곳 잃은 분노에 다시금 불을 지폈다.

    텅 빈 포션병이 바닥을 굴렀다.

     

    “아아…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신념이란 사람을 바보로 만들지. 그것이 아니라도 이 싸움은 피할 수 없다. 보아라, 오크노디의 손을.”

     

    오크노디의 왼손에는 완드가 들려있었다.

    좀전의 싸움에서는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무기가.

    카멜라는 물라도 루소는 분명히 인지했다.

    혼란을 틈타 지면을 타고 번지던 힘의 파동을.

     

    “이곳은 이미 결계 속이다.”

    “결계라니, 방금 한 녀석이 문을 열었는데요?”

    “조건은 같다. 나간 사람은 결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내부공간은 파괴되지 않고 유지되지. 단지 범위가 다를 뿐.”

     

    복도 밖을 내다본 카멜라가 깜짝 놀랐다.

    분명 복도 저편을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던 얼간이의 룸메이트가 기숙사 복도 방화문을 열고 그 너머로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시야에서 사라졌다.

    루소가 무거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곳의 층 전체가 이미 오크노디의 결계 속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진짜 무서운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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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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